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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58화 (58/230)

〈 58화 〉 두더지 잡기 (8)

* * *

“교에서 따로 내려진 명령은 없습니까, 혈사대주?”

“우호법께서는 이미 섬서를 떠나셨습니다. 저희도 숨을 죽여야 화를 피해가겠지요.”

“무림맹에서 며칠 내로 조사가 시작될 거라 합니다. 뭐라도 조치를...”

“그만.”

활검문 안쪽의 숨겨진 골방.

중년의 여인 셋이 모여 은밀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웅크리는 게 상책이오. 대신 잡혀갈 끄나풀은 충분하니, 아랫것들 단속에 힘 쓰는 게 낫겠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혈사대주.”

“그리고 밖에서의 호칭은 자제하시오, 철혈방주.”

“크흠, 죄송합니다. 활검문주님.”

섬서의 활검문주.

그리고 혈교의 세작부대 혈사대(血??)의 대주.

그것이 그녀를 가리키는 두 개의 호칭이었다.

“왕가장주께서도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시오. 대업을 위해 지금 웅크리는 것이, 그분의 뜻이니.”

“알겠습니다.”

이미 한 번 실패했던 대업.

두 번의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투자한 5년이고, 그것을 위해 참아온 5년이다.

‘소서화.’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그 계집에게 꽂아넣을 비수를 위해서.

혈사대주라 불린 여인이 찬장의 서랍에서 검붉은 색으로 물든 천을 꺼내었다.

본디 하얀 천이었던 듯, 군데군데 남아있는 백색.

“혈세.”

“혈세.”

“혈혈세.”

혈마재림 만마앙복이라 쓰여진 낡은 천 위로.

세 여자의 핏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이어 복종의 의식을 마친 그녀들이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다음 지령이 오면 부르겠소. 그때까지는....”

­이리 오너라!!!!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우렁찬 외침.

세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이리 오너라!!!!”

콰아앙!

“무, 무진!!”

“미, 미친 놈인 것이에요!!”

경첩까지 한 번에 뜯겨나가 바닥을 나뒹구는 활검문의 대문.

보기 좋게 활짝 열린 입구로 발을 내딛었다.

“무... 무슨?”

“저, 저 또라이는 뭐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색다른 방문에 벙찐 활검문의 제자들.

나는 사과의 의미로 죽립을 슬쩍 들어올리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들 하시오?”

“...네, 네놈은 뭐냐!!”

“웬 미친 새끼가...!!”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새끼니, 놈이니 하는 몰상식한 말들.

나는 혀를 차며 활검문에 발을 들였다.

“무진, 지금 뭐하는 거에요!”

“허, 허접이 드디어 미쳐버린 것이에요...”

당황에 찬 둘의 말투를 흘려들으며 안쪽을 살폈다.

어차피 일을 터트린 이상, 둘은 내가 뭔 짓을 하든 따라와야한다.

‘음.’

넓게 뻗어나간 기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활검문의 안쪽, 아마도 문주일 것이 분명한 강렬한 기척.

그곳으로 가기 위해 발을 뻗었다.

“멈춰라!! 네놈은 누군데 감히 이딴 개짓거리를 저지르느냐!!”

역시나 앞길을 막는 활검문의 문도들.

‘문도?’

주체할 수 없는 전진욕구가 끓어올랐다.

저들이 누구라고 나를 막는단 말인가.

내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게 만들 수 있는 건 오로지 내가 따먹고 싶은 여자뿐이다.

그런 면에서 나를 막아선 중년인은 그다지 먹음직스럽지 않았다.

“활검문의 제자들은 모두 검을 들어라!”

“추우웅!”

살기등등한 얼굴로 검을 든 활검문의 제자들.

나는 상황을 수습하려는 세령과 소소유를 막아서며 몸을 풀었다.

지금부터 나는 가고 싶은 데로 간다.

“본인은 문도라 하오.”

“...들어본 적도 없는 자로군. 내 광증이라도 걸린 천치라면 어떻게든 이해하겠으나, 말하는 것으로 보아 머리도 멀쩡한 놈이로구나.”

“이름을 말했으면 똑같이 이름을 대야지. 미친놈으로 몰아가는 건 무슨 심보요? 혹시 노처녀요?”

“갈(?)!!! 정녕 미친놈인가!”

울그락불그락해진 얼굴을 보니 역시 대화로 푸는 것은 어려울 듯 했다.

허나 상관없었다.

나는 대화하러 온 게 아니니까.

안쪽에서 멈춰있는 활검문주의 기척을 놓치지 않으면서, 살며시 내기를 끌어올렸다.

생각보다 심상찮은 무진의 내력에 난색을 표하는 중년인.

“큿... 정녕 피를 볼 것인가!”

“활검문은 주둥아리로 싸우나 보군.”

이렇게까지 도발한 이상, 질 것을 알더라도 오는 것이 무림인의 체면.

예상대로 중년인이 결국 먼저 발을 내딛었다.

“후회나하지 말거라!!”

사람을 살리는 검치고는 꽤나 살기등등한 기세.

상당히 빠른 속도와 깔끔한 검로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봤자...’

담소율의 손가락만도 못한 검술.

들어오는 검격에 왼손으로 태극을 그리고.

꼬인 검로에 허둥대는 중년인의 배에 일장을 날렸다.

터엉!

“크하악!”

호쾌하게 달려온 만큼 시원하게 날아가는 중년인.

연무장의 중앙으로 날아간 그녀는 더 이상 일어서지 못했다.

‘이쯤하면 나오려나.’

문주라는 직함을 달고 아래의 제자가 얻어터졌는데 안 나오면 안되지.

하지만 그녀의 기척은 안쪽 그대로.

증거라도 태우고 있나 싶어 한 번 더 도발을 감행했다.

어차피 그녀 자신이 증거가 될 텐데 헛짓거리 그만하고 나오면 좋으련만.

“그대들의 문주께선 꼬리라도 말고 도망치셨나보오?”

“이익... 닥치거라!!”

“감히 문주님을 모욕하다니!!”

꽤나 평판은 좋았는지, 실력차를 알면서도 달려드는 제자들.

중년인처럼 가볍게 제압해주며 멀리 날려보내기를 몇 분.

“그만 두시게나!!”

드디어 활검문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다급히 연무장을 가로질러오더니, 쓰러진 중년인부터 챙겼다.

“괜찮나.”

“괘, 괜찮습니다... 문주님. 다만, 저 무뢰한의 실력이...”

“알겠네. 내게 맡기게나.”

활검문주, 진서연이 쓰러진 제자의 손을 잡아주고 앞으로 나섰다.

죽립을 쓴 무뢰한과 면사로 얼굴을 가린 두 여인.

‘...계집 둘은 초절정. 사내놈은... 기이하군. 쓰러진 년도 저놈이 한 것인가.’

서둘러 왕가장주와 철혈방주를 보내고, 제단을 봉인하고 오는 길.

불길한 직감이 진서연의 뒷통수를 간질였다.

‘뭔가 오해라도 있는 모양이니, 적당히 풀고 보내야겠군.’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어 무림맹주의 눈에 띄는 것은 사절이었다.

활검문의 다른 자들이야 복수하자고 길길이 날뛸 테지만.

어차피 위장으로 쓰고 있는 쓰레기들일뿐.

진서연은 오히려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무진을 달래려 했다.

“젊은 고수께서 무슨 연유로 행패를 부리는 지는 모르겠으나...”

“아가리.”

“윽...?”

흠칫. 사내에게서 갑작스레 터져나오는 기세에 순간 단전의 내공이 꿈틀거렸다.

살기라기보단, 아주 거칠고 폭력적인 패기(?).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길래 이 지랄이란 말인가?’

진서연은 혈교의 대업을 위해 한 번 더 참으려 했으나.

이어진 사내의 말에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입이 걸걸하시오, 소협. 혹 뒤의 두 소저께서 이 소협과 관련이 있으시다면...”

“활검문. 왕가장. 철혈방.”

“...무슨, 소리신지.”

“오리발 내밀지 말고 뒤질 준비나 해, 혈교의 씹련아.”

샜다. 어디선가 정보가 새었다.

“...혈교?”

“그게 무슨 소리더냐 이 미친놈아!!”

그간 쌓아온 모습 덕분에 믿지 않는 활검문의 사람들.

지금이라도 놈을 제압해 입을 막는다면...

콰아앙!

“크윽...!”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짓쳐드는 사내의 주먹.

간신히 막아낸 왼쪽 팔의 소매가 갈가리 찢겨나갔다.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오 소협!”

“막아? 이건 네 몸 아니냐?”

“큭, 크읏...!!”

쾅! 콰앙!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연격.

벌써부터 팔이 부러지기라도 한 듯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혈교의 대법으로 쌓아올린 정파의 검 따위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도아니된다, 여기서 드러내선...!’

힘겹게 놈을 떨쳐내고, 억울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외쳤다.

“그만두시오, 소협! 오해가 있다면, 말로... 크학!!”

“끝까지 말로 지랄이네. 어지간히 들키기 싫나봐.”

하지만 이전보다도 더욱 빨라진 속도로 옆구리를 짓뭉개는 사내의 발차기.

튕겨나간 몸뚱아리가 전각을 부수고 안쪽에 처박혔다.

“쿨럭, 커흑...”

마지막 순간 다급히 내공을 끌어올렸지만, 폭력적인 내기가 이미 내부를 진탕시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진서연은 참아냈다.

혈교의 목적을 위해서.

그녀가 바깥의 기척을 느끼고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이미 전각 안으로 들어온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숨겨봐, 씹년아. 뒤질 때까지 처맞으면 안 쓰고 배기겠어?”

“대체, 왜 그러시는...”

“앙천화. 지금 교주 이름이지?”

“...!”

저 존함은 중원의 어느 누구도 알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오롯이 혈교의 재림이 이뤄지고 난 뒤, 시산혈해 위에서 그분이 직접 읊으셔야 하는 존귀한 신명(?名)이거늘.

어찌하여 저 사내가 알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진서연의 마지막 인내심이 툭 끊어졌다.

“앙천화가 걸레마냥 다 대주고 다녀서 교주의 자리를 따냈다던데. 맞나?”

“...네놈.”

방금 그 말을 기점으로 활검문주의 기운이 변했다.

역시 혈교니 마교니 하는 새끼들은 교주 욕 못 참지.

나는 그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변하기를 바라며 덧붙였다.

“그런 거라면 나한테도 한 번 대주면 좋겠는데. 보지 씹창내기 전문가거든 내가.”

“반드시... 죽여주마.”

아, 눈깔 뒤집혔다.

활검문주의 전신에서 질척하고 불쾌한 기운이 폭포처럼 흘러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 내게로 달려드는 그녀.

“감히 교주님의 신명을 모욕한 죄! 죽음으로 갚거라!!”

뒤로 빼어든 검에 뱀처럼 휘감겨있는 새빨간 기운.

나는 일부러 그녀의 공격을 받아내는 척 밖으로 함께 튕겨져 나갔다.

온갖 잔해와 함께 다시 연무장으로 날아온 나와 활검문주.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무, 문주님?”

“어찌 내기의 색이...?”

그 모습을 본 아까의 중년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활검문주에게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무, 문주님! 지금 그 모습은 대ㅊ... 끄륵!”

원래부터 거기 있던 것처럼, 중년인의 목을 관통하는 칼날.

그녀의 몸뚱아리가 허망하게 쓰러졌다.

‘시원하게 저질러 주시는 구만.’

이어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활검문주.

“혈사대 전원. 활검문을 청소해라.”

“그렇겐 안 되지, 혈교의 쓰레기.”

“저 시커먼 놈은 내가 직접 처리할 것이다.”

활검문도들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비명과 함께.

나와 활검문주 사이의 거리가 다시 한 번 좁혀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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