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63화 (63/230)

〈 63화 〉 선녀와 나무꾼 (1)

* * *

“따라오십시오, 맹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나와 세령을 인솔해주는 주작단 부단주 갈단려.

그러고 보니 단주는 어디 가고 항상 부단주만 있는지 궁금했다.

‘주작단이 하는 일이 뭐였더라.’

사신단(四??)이 맹에 있는 건 알지만.

대체로 주인공이 바깥에서만 돌아다녔던 까닭에 별로 기억나는 게 없다.

“갈 부단주님,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만. 혹시 단주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겁니까?”

내 물음에 살풋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는 그녀.

그녀는 내가 이국에서 왔다는 걸 깨달았는지, 나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희 무림맹 사신단은 각자 맡은 임무가 있습니다. 청룡과 백호는 무림맹의 무력을 상징하고. 현무는 맹의 수호를, 그리고 주작은...”

달칵. 어느새 도착한 방문을 열어주며 갈단려가 말을 끝마쳤다.

“비밀스러운 업무를 수행하고 있지요.”

말해주기 싫다는 거구만.

어차피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하느라 뒤쳐진 걸음을 내딛으려는데.

“잠깐만요, 백 소협.”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가려는 나를 붙잡는 그녀.

평소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야릇한 미소를 지은 것이 보였다.

“...부단주님?”

“제 느낌이지만... 소협께선 저희와 한 번쯤은 마주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

“아니, 반드시 마주치겠죠.”

“허접! 안 들어오고 뭐하는 것이에요!”

잠시도 못 기다리고 나를 재촉하는 소소유.

“곧 갑니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고 고개를 다시 돌렸을 땐, 이미 갈단려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감추며 방으로 들어섰다.

*

“혈교의 세작을 찾아냈다고?”

“네.”

“잘됐군, 그러면 바로...”

“이미 전부 잡아두었습니다.”

“...뭐라?”

허무맹랑한 소리.

중한 일에 거짓을 고한다며 역정을 낼까 했지만.

함께 온 손녀와 세령이 또한 담담한 얼굴로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오히려 자신감이 가득 찬 표정.

‘세령이는 몰라도...’

소유라면 저딴 허술한 거짓말에 동조할 이유가 없을 텐데.

소서화의 눈동자가 가늘게 뜨여졌다.

“상세히 말해보게. 단, 한 톨의 거짓도 없어야 할 것이야. 자네가 소율의 제자라도, 본인은 그런 것에 자비를 베풀 생각 따위는 없네.”

“물론입니다.”

함께 앉아있는 소율도 의문스러운 표정을 하고있었다.

그녀 또한 전혀 몰랐다는 증거. 더더욱 의심이 커져만 갔다.

‘진정 혈교의 간자라고 해도, 이리 쉽게 의심 받을 짓을 하지는 않을 텐데.’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수작이잖은가.

그래서 오히려 더 의심이 가기도, 가지 않기도 했다.

그렇다면 답을 알아낼 방법은, 직접그 몸에 물어보는 것.

고통에 솔직한 육체는 순순히 거짓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그럼 말해보시게.”

소서화가 서서히 기세를 끌어올리며 무진을 압박했다.

둔검의 묘리가 섞인 절대 고수의 내기.

강대한 내기가걸레를 쥐어짜듯그의 전신을 찍어눌렀다.

"윽..."

조금씩 일그러지는 무진의 표정.

그가 힘겹게 소서화의 말에 답했다.

“큭,우선은... 그, 앙드레의 일기장부터 이야기 해드려야겠군요.”

“별다른 것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뇨, 그때는 거짓으로... 후, 대답했었습니다.”

콰직.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값비싼 탁자에 실금이 그어졌다.

정확히 무진의 앞자리.

사타구니 사이를 가로지르는 균열에 무진이 마른 침을 삼켰다.

‘씹... 내가 잘린 것 같잖아.’

또 개소리를 하면 진짜 조지겠다는 무언의 경고.

무진은 흑천묵지신공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소서화의 기세를 버텨냈다.

'그래, 이정도는 버틸 깜냥이 되나보구나. 그럼 어디...'

소서화 또한 생각보다 잘 버티는 무진을 보며 더더욱 내기를 끌어올렸다.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다했는데, 벌써부터 거짓을 고하는 겐가?”

“크... 하지만, 장 사제를... 구하려면, 이 방법이 제일 낫다고 생각, 했습니다.”

뒤이어 무진을 거드는 백세령.

오롯이 무진에게 가해진 소서화의 내력이지만, 그 주변도 영향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녀 또한 창백해진 얼굴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맞아요, 사숙. 저희는 그저, 장 사제가... 아니길 바래서, 저희가 먼저 조사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런 멍청한 것들...!”

철없는 둘의 행동에 주먹을 움켜쥐는 담소율.

그녀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나왔다.

“양광이 거기 있었으면 어쩔 뻔 했느냐!”

“없었잖... 습니까, 태사부. 우선, 크... 이야기라도 들어주시죠...”

“이, 이... 생각 없는 놈!”

단단히 화가 난 듯, 차가운 얼굴로 둘을 노려보는 담소율.

소서화가 기세를 조금 낮추며 무진의 숨통을 트이게 만들었다.

“그래, 이야기는 들어봐야겠지.”

“감사, 합니다.”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너희 둘 다 계도를 내릴 것이야.”

계도라. 소율이 아무래도 생각보다 더 많이 화가 난 듯 했다.

아니, 화보다는 걱정이랄까.

나를 향한 눈빛에서 분노보다는 걱정과 슬픔이 더 엿보였던 것 같다.

‘거짓말 두 번 했다간 죽겠네, 진짜.’

나는 전신을 찍어누르는 소서화의 내력을 천천히 밀어내며.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일기장엔, 그가 낭인들에게 의심되는 곳을 알아냈다는 것까지 적혀있었습니다.”

“거기가 오늘 갔던 곳인가?”

“아뇨, 양가장이란 곳입니다.”

“...양가장? 하...!”

어이가 없다는 듯 탄식을 터트리는 소서화.

양가장이란 이름에서 이미 어림짐작 했겠지.

나는 뒤이어 그곳에 동자궁이란 곳과 혈동자들이 있다는 것을 전했다.

“동자궁과 혈동자라니. 양광이 그곳에 있었다는 건 확실했겠군.”

“아무튼, 그렇게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여기선 살짝 진실을 감췄다.

이미 세령과도 말을 맞춰두었다.

색마의 사술을 쓴 건 비밀로 하기로.

‘섭혼술 같은 걸 좋게 볼 리가 없지.’

담소율이야 나를 사랑하기도 하고, 이미 신뢰관계가 두터워진 후에 쓴 것이지만.

보통의 무림인들은 섭혼술같은 사술을 좋게 보지 않으니까.

나는 탁자 아래로 세령의 손을 감싸쥐며 말을 이었다.

“왕가장, 철혈방, 활검문. 이렇게 세 곳이 진짜 혈교의 세작들이 있는 곳이란 걸 알아냈습니다.”

잠시 서책을 꺼내 눈으로 흝는 소서화.

그녀는 몰래 귓가로 들어오는 전음과 함께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흠... 세 곳 다 최근 10년 새에 새로 모습을 드러낸 곳들이군.”

“예. 그리고 혈교도라는 것을 저희 셋이 확인했고. 활검문주는 사살, 다른 둘은 생포했습니다.”

“맞아요, 할머님. 더러운 혈교의 무공을 쓰는 것을 소녀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에요.”

아는 얘기가 나오자 옆에서 한 마디 거드는 소소유.

소서화와 담소율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것이 보였다.

‘믿을 수 없지만, 진정 혈교의 사람들을 잡아냈단 말인가.’

갈단려가 전해준 전음.

그것은 무진이 생포해온 여인 둘이 모두 혈교도가 맞다는 이야기였다.

그중 한 명은 상당히 협조적으로 나왔다고도 하고.

심복마저도 옳다고 한 것을 괜한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이 소서화조차 알아내지 못했던 것을. 이리 쉽게 해내다니.’

더 의심해봤자 후속처리만 미뤄질 뿐이다.

나아가 무진의 스승인 담소율조차도 의심하는 꼴이고.

소서화가 마른 입술을 핥아내며 기세를 거두었다.

“후우...”

몇 호흡이 안되어 금세 안색을 되찾는 무진.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약관은 분명히 넘었다고 했었지.

‘꽤 진심으로 찍어눌렀는데...’

아직 안색이 좋지 않은 세령이나 소유와는 달리 벌써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다.

‘어디서 이런 자가 튀어나왔는지...’

사랑에 빠져 콩깍지가 씌인 소율 대신.

자신이 조금 더 이 사내를 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어보였다.

아무튼 이것은 나중의 일.

“그래, 믿어보도록 하지.”

소서화가 표정을 풀며 완전히 기세를 감췄고.

담소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무진을 빤히 노려보았다.

‘...꼭 부가설명을 해야할 것이야, 무진이 이 녀석.’

소서화에게는 말하지 못할 비밀 몇 가지를 그녀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저 무진이 그리 넘어가기를 원하는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을 뿐.

어차피 결과는 좋았으니까.

‘혈교도를 색출했고, 은밀히 데려온 것을 보면 다른 세작과 간자를 잡는 일은 이어나가라는 뜻이겠지.’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소서화 또한 생각한 듯, 그녀의 입이 열렸다.

“수고들 했고, 며칠 간은 맹에서 쉬도록 하게나. 혈교의 세작말고도 섬서에 숨어든 쥐새끼들이 분명 더 있을 터이니.”

“알겠습니다.”

“편히 쉬도록 하시게. 세령이랑 소유도 오늘은 편하게 지내려무나.”

“네, 사숙.”

“흐흥, 알겠다는 것이에요, 할머님!”

그렇게 셋을 내보내고, 소서화가 따라 나가려는 담소율을 붙잡았다.

“네년은 나랑 같이 지하로 가봐야지, 어딜 가는 게야.”

“...쳇.”

잠깐 무진의 품에나 안겨있으려고 했건만.

담소율은 입술을 삐죽이며 소서화의 뒤를 따랐다.

*

“허접! 오후에 할게 있느냐는 것이에요.”

“아, 소 소저. 딱히 없습니다. 세령과 방에서 쉬려고 했는데요.”

“쉬, 쉰다니! 뭘 하며 쉬려는 것이에요!”

아침에 내 자지를 본 충격이 큰지.

야한 쪽으로 대가리가 팽팽 돌아가는 듯한 소소유.

토실토실한 볼따구며 가슴이며 발간 빛으로 생기를 띠는 것이 보였다.

“남녀가 함께 방에서 쉬면 뭘 하겠습니까.”

“뭐, 뭐, 무, 뭘 하려는 것이에요! 이 변태! 허접! 쓰레기!”

"아니..."

무슨 상상을 하는지 코에서 콧김까지 뿜어지는 듯한 소소유의 얼굴.

나는 세령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답했다.

“한숨 잘까 합니다. 세령도 그렇고, 저도 어제 꽤나 피곤했거든요.”

“무, 무진...”

“읏... 자, 자지 말고소녀랑 대련이나 하는 것이에요!”

“대련이요?”

고개를 위아래로 흔드는 그녀.

따라 움직이는 빨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 상관 없습니다만. 세령도 같이 할래요?”

“...아뇨. 전, 잠깐 나갔다오려구요.”

“흐흥! 허접 언니, 역시 소녀가 무서운 것이에요?”

팔짱을 끼는 소소유의 볼을 살짝 꼬집어주는 세령.

“오늘 꼭 하고 싶은 게 있거든. 내일 하도록 하자.”

“흐응... 알겠다는 것이에요. 그럼 어서 연무장으로 가도록 해요 허접!”

“같이 가줄까요, 세령? 어차피 저한테 패배한 소 소저에겐 배울 게 딱히 없는데.”

“이익...!! 바보 허접! 죽고싶냐는 것이에요!!”

팩트폭력에 길길이 날뛰는 소소유를 무시하며 세령에게 물었다.

살짝 들뜬 얼굴로 고개를 젓는 그녀.

“괜찮아요. 그, 혼자 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알겠어요. 그럼 잘 갔다와요.”

“네. 그럼 이따 봐요. 소유도, 안녕.”

“빨리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허접!!”

이미 연무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소소유를 바라보며, 세령을 꼬옥 품에 안았다.

“기대할게요, 세령.”

“읏... 그, 무,무슨 소리에요... 무진.”

“선물이요. 선물.”

“앗, 아으...”

쪽소리가 나도록 그녀의 발게진 볼에 진한 입맞춤을 남기고.

팔짝팔짝 뛰고 있는 빨통에게로 달려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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