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74화 (74/230)

〈 74화 〉 추적 (7)

* * *

“안돼...”

그냥 서있으면 다행이련만.

“크크... 본좌의, 승리니라.”

그의 명치를 관통한 양광의 팔.

거칠게 뽑혀나온 상처에서 피가 한움큼 터져나왔다.

“쿨럭...”

무진의 입가에서 쏟아지는 검게 죽은 피.

그의 육신이 얼마나 상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으읏...”

당장 달려가서 그를 구해내야 하는데.

지친 듯 서있는 노괴의 모습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알아챈 듯 고개를 돌리는 노괴.

“응? 아, 소서화의 손녀로구나. 다 되었다. 거기서 기다리거라.”

양광이 반대손에 목만 남은 장두식의 시체를 내던지며 말했다.

‘더 이상...’

바보같이 도망치고, 가만히 있는 것은 사절이었다.

할머님께 배운 무공을.

하늘을 끊어내는 파도를 일으켰다.

“하아아압!!”

어느새 눈앞에 다가오는 파도처럼, 순식간에 그의 뒤를 잡은 소소유.

그녀가 검집에 꽂힌 검을 뽑아들어, 양광의 등을 깊게 베어냈다.

“끄하아악!! 이, 망할 년이...!!!”

무진의 공격에 심하게 당했는지 자신의 공격을 피해내지 못하는 양광.

하지만 방금 것은 요행이라는 듯.

단숨에 제압당해 복부에 발이 틀어박혔다.

“카흐읍!!”

볼품없이 날아가 바닥을 뒹굴고.

목구멍에서 울컥 올라오는 핏덩이.

입가로 넘쳐흐르는 핏줄기를 삼키며 다시금 양광에게로 달려들었다.

“당장 백 소협에게서 떨어지라는 것이에요!!”

“오냐, 네년부터 죽여주마!”

한 번의 합에 하나의 상처.

백옥같던 피부에 깊은 혈선이 줄기줄기 그어졌다.

"네년의 모가지를 소서화 그 계집에게 보여주마!!"

"어림도, 없는 것이에요...!"

이렇게까지 약해진 노괴라도, 자신의 힘으론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었다.

‘백 소협... 정신 안 차리고 뭐하냐는 것이에요!’

죽은 듯 멍하니 절벽 끄트머리에 서있는 그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데.

한 발 내딛어 안쪽으로 오는 것이 그리도 힘들단 말인가.

“아흑, 꺄아악!!”

“어딜 본좌의 앞에서 한눈을 파느냐, 망할 계집년이!!”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으스러진 손가락.

놓쳐버린 검이 하늘을 날았다.

“아...”

“흐, 끝을 내주...”

“당장 멈추거라!!!”

무언가 얇고 가는 것이 양광의 손을 가격해 진로를 바꾸었다.

심장을 꿰뚫는 대신 가슴팍을 길게 스치고 지나가는 혈기.

“네이놈 양과아아앙!!!”

“큭, 네년은... 독선!!”

드디어. 드디어 구원이 도착했다.

뒤를 돌아본 시야에, 당가의 무사들과 개방의 거지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다시 시선을 돌리자, 양광이 벌써 저 뒤로 내뺀 것이 보였다.

다급히 그를 추적하는 무사들.

‘백 소협은...?’

앞을 향한 시야에.

이미 뒤로 넘어가고 있는 그가 보였다.

“...안돼!”

“소, 소 소저!!”

생각할 새도 없이 발이 먼저 움직였다.

끄트머리에 도착해 다급히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

투둑, 끊어진 옷소매가 나풀거렸다.

그가, 저 아래 만장단애로 떨어지고 있었다.

“백 소협...!”

발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소소유는 그대로 그와 함께 떨어지는 것을 택했다.

*

‘시발...’

명치에 처박힌 늙은이의 팔.

내 몸에 남의 손이 들어온 모습은 꽤나 그로테스크했다.

“카흑...”

양광의 몸뚱아리도 이미 걸레짝이었다.

휘황찬란하던 붉은 장포는 이미 다 찢어져 나갔고.

몸뚱아리에도 끔찍한 상처가 여럿 있었다.

‘이게 안되네...’

하지만 양광은 살아있었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날 죽일 듯 바라보면서.

놈의 반대손에 들린 장두식의 머리.

그마저도 입 아래가 갈려나가서 원형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설마 프렌즈 실드를 쓸 줄이야.’

광룡만천은 분명히 양광을 갈아버릴만한 공격이었다.

대가로 내 손 두 짝도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넌 것 같기는 한데...

녀석을 죽였으면 어떻게든 되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놈은 그대로 장두식을 붙잡고.

기겁할 정도의 혈기를 불어넣어 방패로 삼았다.

‘좆같은 새끼...’

푸확!

급소에 박힌 손이 거칠게 뽑혀져 나갔는데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대신, 뒤쪽에서 달려오는 소소유가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다.

‘도망치라니까, 좀...’

괜히 운휘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어 양광에게 한 방 먹인 뒤 연신 처맞는 소소유한테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마냥 움직이질 않았다.

“아흑, 꺄아악!!”

“어딜 한눈을 파느냐, 망할 계집이!!”

간신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죽는 모습은 보기 싫어서.

‘잘 따먹다 갑니다.’

쉬지도 않고 섹스만 한 게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그 시간에 수련을 했으면 좀 나았을라나.

의식이 멀어지고, 귀가 먹먹해졌다.

끝없이, 추락했다.

*

“...”

“팔은 좀 괜찮으시오, 걸견?”

“아... 가주님.”

끝이 보이지 않는 죽음의 절벽. 만령곡(???).

만 개의 영혼이 이곳에 떨어져 잠들었다 하여 붙은 이름.

그곳에서 시선을 돌린 걸견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정도야, 괜찮습니다.”

“...떨어진 것이 누구라 했소?”

눈을 감은 걸견의 앞에 거구의 사내와 귀여운 소녀가 떠올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강렬했던 만남.

특히, 사내는... 지금껏 만나온 그 누구보다도 뇌리에 남았다.

“...맹주님의 손녀, 소소유 소저와... 천극혜검님의 제자인 백무진 소협입니다.”

“허어...”

한숨을 내쉰 독선의 눈이 감겼다.

사천당가의 가주, 독선(??) 당예인.

그녀는 개방 사천분타주 유개의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참이었다.

며칠전 맹에서 특급으로 받았던 혈교의 잔당에 관한 소식.

‘양광.’

그리고 놈이 이곳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시급한 연락.

서둘러 달려왔건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것도 한참이나.

“이 소식을 어찌 전해야 할꼬...”

“복귀 준비를 마쳤습니다, 가주님.”

“...그래, 우선 돌아가자꾸나.”

누구를 탓해야 할까.

자신을 알아챈 양광은 부리나케 도망가버렸고.

그나마 살려낸 소소유는 스스로 절벽에 몸을 던졌다.

‘연인이었는가.’

소소유, 그 앙큼한 계집아이가 사내를 위해 몸을 던지다니.

‘그래도 장소는 가리지 그랬느냐.’

하필 다른 곳도 아니고 만령곡이라니.

몇백년간 살아돌아온 이가 전무후무하다는 죽음의 계곡.

뒤가 없는 선택의 책임은 누가 지라고.

답답함이 독선의 가슴을 옥죄었다.

*

머지않아 소식은 무림맹에 전해졌다.

다음 날 출발하려 잠에 들었던 백세령과 담소율.

그리고 소서화까지.

전부 새벽에 일어나 사천으로 향했다.

떠나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만령곡으로 향하는 동안 단 하나의 소리조차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만령곡.

절벽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여기더냐.”

“예, 천극혜검님. 이곳에서... 소 소저와, 백 소협이 떨어졌습니다.”

힘겹게 말을 꺼내는 걸견.

부상당한 몸으로 다시금 올라온 그녀의 안색이 창백했다.

그런 걸견을 뒤로 물리고, 독선이 담소율의 옆에 섰다.

“양광은?”

“도망쳤다.”

그녀에게서 정황과, 그때 당시의 상황은 모두 들었다.

그리고, 절벽에서 보였던 엄청난 수위의 무공도.

‘무진아, 네가 한 것이냐.’

그 흔적은 절벽 곳곳에 남아있었다.

마치 용이 똬리를 틀고 간 듯 성한 곳이 하나 없는 절벽의 끄트머리.

디디고 서있는 이곳마저도 그 파괴로 지반이 불안정했다.

독선도 그리 얘기했었다.

양광을 넘어서는, 새로운 절대 고수의 등장인 줄 알았다고.

‘그럼 뭣 하느냐.’

다시는 얼굴도 볼 수 없게 떨어져버렸는데.

가슴이 미어져 눈앞이 흐릿했다.

“네년이...”

“...”

“조금 더 빨리 왔어야지.”

목소리 끝이 잘게 떨렸다.

가슴 한구석이 공허했다.

처음을, 모든 것을, 사랑을 주었던 사내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흑... 흐윽, 흡...”

“...스승님.”

담소율이 눈을 돌려 또 다른 제자를 바라보았다.

제자의 눈 또한, 총기를 잃어 죽은 눈이었다.

“...아니죠? 거짓말이죠? 무진이, 왜... 왜...?”

세령 또한 마음 한구석이 텅 비었다.

믿지 않았고, 믿기 싫었다.

분명, 잘 가라고. 꼭 돌아온다고.

그리 약조하고 보냈는데.

‘이제야... 당신을 품었는데...’

그와 함께 했던 밤이 아직도 선명한데.

이곳에서 떨어지면 그를 만나러 갈 수 있지 않을까.

“안된다, 세령아.”

“싫어요. 갈 거에요... 놔요!!”

붙잡는 스승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 역시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을 거다.

똑같이 무진을 사랑했으니까.

“무진, 무진...!!!”

툭.

“읏...”

풀썩 쓰러지는 백세령을 독선이 받아냈다.

그녀의 눈동자가 담소율을 노려보았다.

“미쳤나, 담소율? 왜 잡지를 않는 게야!”

“시끄럽다.”

조용히 내뻗은 손에 쓰러진 세령이 둥실 떠올랐다.

아이를 품듯 제자를 품에 안은 담소율.

서로의 온기가 맞닿았지만, 공허하게 뚫린 구멍으로 전부 흘러나갔다.

“소율아.”

“...서화.”

“떨어지기 전에, 천리추향을 묻혀놨다는구나.”

조심스레 다가온 친구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사위와 딸, 이제는 손녀마저 잃어버린 친구의 얼굴은 전보다 훨씬 어두웠다.

“...하지만. 만령곡에 들어갈 이가 누가 있겠느냐.”

“...내가. 내가 갈 것이다.”

“그것은, 불가하다 소율아.”

입술을 짓씹고, 쥐어짜듯 내뱉는 소서화.

혈교의 잔당들이 대두되고, 과거의 악몽인 양광마저 모습을 드러낸 시기.

자신이나 소서화가 자리를 이탈하는 것은 커다란 손해고, 위험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 사랑하는 이를 잃었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단 말인가.

“아아아아!!!”

그리고 자신이 그리 가버리면, 세령이마저도 어찌될지 몰랐다.

방금의 모습을 보아, 몰래 절벽으로 가버릴 지도.

마음 깊숙이 품은 제자를 잃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흐윽, 흡... 으흐흑...”

“...우선 돌아가자꾸나. 응?”

울음을 참아내어 잘게 떨리는 그녀의 등 위로, 소서화의 손이 닿았다.

친우의 손 역시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가로 가지.”

“예인.”

“서화. 아니, 지금은 맹주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독선의 말에 고개를 젓는 소서화.

둘은 쓰러진 담소율과 백세령을 부축하며, 절벽을 벗어났다.

“어푸, 어푸풋...”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옷속으로 들어와 체온을 앗아갔다.

그탓에 아린 상처들이 무뎌지는 게 다행일지, 불행일지.

물 위로 올라온 가슴을 지지대 삼아 소소유가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배, 백 소협... 백 소협! 어딨는 것이에요...!”

계곡의 거친 물살에 휩쓸리는 소소유의 눈동자가 한 사내를 찾았다.

분명 떨어질 때 감싸안고 떨어졌는데.

‘소녀도 정신을 깜빡 잃은 것이에요.’

수면 위에 부딪힐 때의 충격이 너무 강해 의식을 잠깐 잃었었다.

비록 금방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문득 위로 올려다본 시야엔, 밤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개가 껴있었다.

“하으... 어서, 찾아야...”

무서운 속도로 몸이 얼어붙고 있었다.

한가득 피를 흘리고 다친 무진은 더욱 위중할 터.

“아...!”

연신 주변을 훑던 눈동자가 마침내 그를 발견했다.

다행히 나뭇가지에 걸려 흔들리고 있던 무진의 몸.

다급히 그를 챙기고, 붙잡을 것이 있나 주변을 살폈다.

“하아, 하아... 으으, 왜 이리 무거운 것이에요...”

무진의 덩치도 덩치지만, 정신을 잃은 사람의 무게는 족히 배는 더 나갔다.

‘흐으, 너무 추운 것이에요...’

이미 손발엔 감각이 없었고, 무진의 몸 또한 얼음처럼 차가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절벽 곳곳에 찢어진 옷가지나 사람의 뼈같은 것도 보였다.

‘으으으...! 제발...’

두려움으로 콩닥콩닥거리는 그녀의 가슴.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었는지, 조금 뒤쪽에 뻥 뚫린 구멍이 하나 있었다.

“저기로, 가야...”

볼을 때리는 거센 물살.

팔이 저리도록 힘을 주어도 끌리지 않는 무진.

‘소녀만 믿으라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깎아지는 절벽에 달라붙어 발을 맞대고.

양광과 싸우며 바닥을 드러냈던 내기를 박박 긁어냈다.

“후우, 후읍...”

검도 잃어버린 상황, 검결지를 만들어내 곧은 검기를 세웠다.

파둔은 모든 것을 제압하는 검술.

일순이라면, 이 거친 물결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히야압!”

콰앙!

소소유의 손이 빠르게 휘둘러졌다.

물살이 터져나가며 허연 물보라가 일었다.

‘지금...!’

공간을 제압하는 자신의 내기에 잠시 흐름을 멈춘 계곡의 물결.

높이 솟은 돌덩이 하나가 보였다.

“하압!”

팔과 다리에 남은 내기를 전부 쏟아부었다.

두 팔로는 축 늘어진 무진을 껴안고, 발로는 절벽을 박찼다.

‘된 것이에요!’

이어 돌덩이에 발을 내딛고, 제어가 풀려 덮쳐오는 물살 위로 뛰어올랐다.

콰르르르!!!

“하아, 하아... 됐다, 해낸 것이에요...”

무사히 동굴에 안착한 자신과 무진.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는 무진을 옆으로 밀어냈다.

“아으... 이, 뚱땡이 허접...”

서둘러 그의 얼굴을 살피고, 맥을 짚었다.

“아...”

정신을 집중해야 느껴질 정도로 희미한 맥박.

무엇보다도, 그의 체온이 너무나 차가웠다.

‘우, 우선 안쪽으로...’

다행히 동굴은 깊었고, 그를 질질 끌어가며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힐끔힐끔 무진의 신색을 살폈다.

‘다친 곳에서 피가... 전혀 흐르지 않는 것이에요...’

좋은 상황은 절대로 아니었다.

흘릴 피가 없어 피를 흘리지 못하는 것일 테니까.

“흐윽...”

울컥.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온힘을 다해 나아갔다.

그리고 겨우 계곡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닿지 않는 곳에 도착했다.

“하아, 후우... 부, 불! 불을 피워야 하는 것이에요.”

그를 마른 흙이 있는 부드러운 바닥에 눕히고.

근처에 있는 이끼를 박박 긁어모았다.

그리고 떠나며 챙겨온 봇짐을...

“...어, 없는 것이에요.”

등 뒤에 단단히 매어두었던 봇짐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필시 절벽에서 떨어질 때 사라진 것일 터.

“아, 아아...”

소소유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지금에 와서 그것을 찾을 수도, 아니면 젖은 이끼에 불을 붙일 수도 없었다.

“아니에요, 방법이. 방법이...”

보랏빛으로 변한 무진의 입술을 보며 소소유가 정신을 다잡았다.

문득. 오래전, 언뜻 보았던 서책이 하나 떠올랐다.

언젠가 강호에 나갈 일을 꿈꾸며 보았던, 강호생활백서.

거기엔 강호에서의 온갖 생존 수단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분명, 체온이 떨어졌을 때의 방법도...’

살을 맞대어 체온을 올린다.

“읏...”

분명 그리 적혀있었다.

체온을 앗아가는 젖은 옷을 벗고.

불을 피운 뒤 살을 맞대라고.

“이,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닌 것이에요...!”

훌렁. 소소유가 먼저 젖은 암행복을 벗어냈다.

속곳까지 푹 젖어버려 으슬으슬한 몸.

그것마저도 전부 벗겨내고, 무진을 바라보았다.

“으읏... 이, 이건 불가항력인 것이에요, 바보 허접... 알았냐는 것이에요?”

기식이 엄엄한 채, 죽은 듯 누워있는 무진.

하반신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소소유가 눈을 질끈 감고선 그의 옷을 벗겨냈다.

“오, 와...”

그의 사타구니를 바라본 소소유의 입이 벌어진 채로 닫히지 않았다.

역시나 왠지 모르게 익숙한 기분.

“으읏!”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그녀가 천천히 그의 몸을 덮어갔다.

차갑게 식은 무진의 나신.

“하으... 제발, 죽지 말라는 것이에요...”

추위에 빳빳하게 선 유두가 그의 단단한 근육에 부벼지는 야릇한 느낌.

이내 무진을 꼬옥 껴안은 소소유가 천천히 운기를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내력이지만, 운기를 하기에는 충분한 양.

자신의 체온이 그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그녀가 차분히 숨을 골랐다.

“후우, 후...”

조금 남아있던 진기가 몸을 돌며 점차 따뜻하게 덥혀지는 몸뚱아리.

맞닿지 않은 등 쪽은 이제 조금 으슬으슬했지만.

맞닿은 배꼽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제발... 죽지 말아요, 흑...”

희미하게 느껴지는 그의 심장소리를 자장가 삼아.

소소유 또한 천근만근 내려앉는 눈꺼풀을 붙였다.

*

“허어...”

얼마 뒤 동굴의 안쪽에서부터,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등이 잔뜩 굽어진 노인.

그녀의 시선이 무채색의 동굴에 어울리지 않는 야릇한 살덩이들을 보았다.

“손님인줄 알았더니, 망측한 것들이로고.”

탁탁탁.

지팡이가 바닥을 짚고, 노인이 둘에게로 다가갔다.

그나마 멀쩡한 소녀와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사내 하나.

“용케 살아있구만.”

다만 그 생의 불꽃이 바람 앞에 등불이라.

꺼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으음...”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노인.

이내 그녀의 눈이 뜨여졌을 때, 전에 없던 총기가 반짝였다.

“천지신명께서 내 가는 길, 마지막 과업을 하나 주시는구나.”

그녀가 손짓하자, 찰싹 달라붙어있던 무진과 소유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발걸음을 돌려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그녀.

마침내 도착한 동굴의 안쪽은, 생각보다 사람 사는 곳처럼 꾸며져 있었다.

“계집은 그나마 좀 나으니 옆에 두고... 음?”

공중에 붕 뜬 채로 날아가는 소소유.

그녀의 흉부에서 출렁이는 것을 본 노인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요즘 아해들은 잘 먹나 보구만.”

왠지 모를 부러움을 감춘 채, 그녀가 무진을 침상에 뉘였다.

톱니에 갈린 듯 뼈가 훤히 드러난 양팔, 관통당한 명치.

산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시체의 혈색.

“그럼에도 살아있다니... 허어, 정기가 보통이 아니구나.”

무진의 몸을 훑던 노인의 시선이 사타구니에 닿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남자를 자주 안진 않았지만, 저것은 비정상적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저것으로 인해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흠흠...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평생 불구가 되겠구먼.”

하지만 이렇게나 생기와 정기를 빨리면 살아나도 제 역할을 못할 것이 확실했다.

그냥 두면 그렇게 빨리고도 회복하지 못해 죽을 것이고.

노인이 서둘러 손을 뻗자, 저 멀리 찬장에 있던 것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우선 생령초(生靈草)로 원기를 북돋고... 아차차, 상처부터 메꿔야겠구만.”

오랜만에 만난 사내라 그런지, 얼굴이 화끈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내젓고선 통을 하나 꺼내 안쪽의 내용물을 듬뿍 덜어냈다.

“이 생령고(生靈膏)로도 살아나지 못한다면, 네놈의 운명인 게다.”

만령곡에 떨어진 영혼들이 목숨으로 피워낸 생령초.

그리고 그것을 빚어, 자신의 비술로 만들어낸 생령고.

그녀는 직접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고, 뼈를 부러트려가며 이 약의 효용을 입증했기에.

실패한다면 그 누가 와도 이 사내를 살릴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음음, 몸이 참으로 단단하기도 하여라.”

그 외에도 자잘한 상처들이 많았기에, 생령고를 전신에 다 발라두었다.

특히나 사타구니 사이의 그것을 만질 땐...

온몸에 살짝 전율이 돋았다.

‘잠시 여인이 된 듯 했구나.’

다 늙어서 주책이었다.

중원엔 이제 자신의 이름 석자마저도 기억할 이가 없을 텐데.

그리고 이제 옆에 있는 계집을 좀 봐주려 하려던 차.

“다, 당신은 누구신 것이에요?”

풍만한 젖가슴을 앙증맞은 팔로 가리고.

작은 짐승을 해체할 때 쓰던 날붙이를 손에 든 계집 아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적의가 없어서 가만히 내버려 두었었다.

“내려놓거라. 내 하는 것을 보지 않았더냐.”

“그, 그건 감사한 것이에요... 하지만...”

“그리고, 젖가슴만 가리고 비부는 드러낼 거면 뭐하러 가렸느냐.”

“아, 아앗...!”

다급히 하반신을 가리는 그녀.

그동안 무진의 미색령에 당해 항상 아랫도리를 드러내고 다녔던 소소유는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허허, 발랑 까진 계집이로고.”

“으읏... 아, 아니에요!”

“아무튼, 내려놓고 거기 앉거라. 너도 좀 봐줄 터이니.”

“그, 그럼 오, 옷부터 부탁을...”

그래도 부끄러움은 아는 겐가.

노인의 손이 또 뻗어지더니, 짐승가죽으로 엮은 거친 털 옷이 소소유의 앞에 떨어졌다.

“입거라. 네가 입고 온 옷은 불에 쬐이고 있으니.”

“네, 네엣...”

잠시 뒤 소소유의 상처를 매만져주는 노인.

생각보다 그 손길이 다정하다고 느끼며, 소소유가 물었다.

“그... 배, 백 소협은 괜찮은 것이에요?”

“아직 모르겠다만. 저것을 바르고도 죽는다면 어쩔 수 없는 게지.”

허연 연고로 뒤덮인 사내의 몸.

이전의 생을 전부 의술에 투자하고, 이곳에 와서도 의술에 매진했지만.

삼도천 바로 앞에 있는 이를 구하는 것은 오로지 천지신명의 뜻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아무래도 아직 건널 때가 아닌 것 같다고, 노인은 어림짐작했다.

“무진...”

“혹, 정인이더냐?”

“네, 네에? 아, 아닌 것이에요! 그, 그냥...”

“흠, 껴안고 있는 모습이 꼭 연인 같길래 말이다.”

“저, 절대 아니에요! 저런 허접한 사, 사내랑 무슨!”

노인이 피식 웃음 지었다.

어린 계집 아이가 볼을 붉히고, 횡설수설하는 모습은 언제봐도 귀여운 것.

이곳이나 자신에 대한 궁금증보다도 사내의 안부를 묻는 것을 보니, 연심을 품고 있는 걸까.

노인이 소소유의 등을 토닥이고는 먹을 것을 들고왔다.

“좀 들거라.”

“가, 감사한 것이에요...”

“그래. 저 치가 깨어날 때까지 시간이 좀 있는데...”

이리저리 나불거리는 성격은 아니지만.

몇십년만에 본 산 사람이다.

넌지시 계집 아이에게 운을 띄우자, 덥썩 무는 아이.

“...고인께서는 누구이신 것이에요...?”

“그냥 홍 노야라고 부르거라.”

오래전에는 의선이니, 만병쾌의니 갖가지 별호로 불렸었지만.

이제 와선 부질 없는 것.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보단, 눈앞의 소녀에 대한 것이 궁금했다.

“그럼...”

“네 이야기나 해보거라. 저 치의 이야기도 좋고. 오랫동안 홀로 있었더니 사람 이야기가 그립구나.”

잠깐 노인이 가져다준 물과 음식으로 배를 채운 소소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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