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의 이장로, 운휘일세.”
“무림맹 수색조 조장 이양휘라고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것이라도...?”
말도 없이 새벽에 대뜸 찾아온 외팔의 검객 하나.
이양휘는 의심스러웠지만, 청명한 그녀의 기운에 다급히 포권을 올렸다.
‘절대에 발을 들였다고 했던가.’
무당에 절대의 고수가 둘이라니.
혈교의 위협이 드러난 이 시기에 무림의 홍복이요, 축복이지만.
‘...오른팔을 잃으셨다지.’
허나 느껴지는 기도는 더없이 맑고 정순했다.
“조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옛 기록들을 찾아보고, 주변의 수색을 철저히 하고 있지만... 소득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양휘가 보고서를 들고와 그녀에게 내밀었다.
차분히 글을 읽어내려가는 운휘.
눈에 띄는 보고가 하나 있었다.
‘마치 결계에 막힌 듯 들어갈 수 없었다라...’
이 주변의 지형에 관한 정보는 전부 만령곡이 생기고 난 이후의 것이라.
이전의 만령곡이 어땠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결계라는 단어를 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제갈가의 인물들은?”
“군사께서 이미 수많은 진법을 사용해보았으나, 효력은 없었습니다.”
무림맹의 군사, 천변만뢰(千變萬腦) 제갈여령.
진법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녀조차도 실패했다라.
‘...허나 그녀도 할 수 없는 게 있지.’
예를 들어 그녀는 초절정 끝자락이긴 하지만.
결코 절대지경의 무인은 아니다.
그리고 절대에 오른 자신이 느끼기엔.
초절정과의 차이는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벽이 있었다.
“조장, 군사께서 계셨던 곳으로 안내해주시게나.”
“아... 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일전에 무진이 전부 개박살을 내둔 터라, 절벽에 성한 곳이 없었다.
그탓에 수색조의 막사도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설치되어 있고.
그나마 성한 곳을 통해 절벽과 맞닿아 있는 곳으로 향하는 둘.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백무진이라 했던가요. 이런 흔적을 남길 정도의 무인과 소 소저께서...”
“그들은 반드시 돌아올 터이니, 그런 말은 마시게.”
“...죄송합니다.”
이내 도착한 절벽의 바닥 근처.
움푹 패인 고랑 같은 그곳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만령곡의 안개가 가까이 있었다.
“흠...”
확실히 무언가 다른 기운이 맴돌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사특하고, 불경한 것.
운휘가 이양휘를 멀리 뒤로 물리고,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지난 몇 주간 꼬박꼬박 잘 챙겨먹고, 명상에 명상을 거듭한 결과.
그녀의 몸과 정신은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다.
‘내 무식해서, 이런 방법 말고는 모르겠소 사저.’
자신의 생각에 만령곡은 진정 만장단애의 절벽은 아닐 것이었다.
그저 그 말마따나, 만 개의 영혼이 만들어낸 진법의 일종.
사념들이 오랜 시간 쌓이고 쌓여 태어난 가짜 무저갱.
그리 생각되었다.
‘그리고 진법을 부수는 방법은...’
해체하거나, 깨부수거나.
평생 검만을 잡아온 자신에겐, 후자가 익숙하고 편리했다.
“큭... 이, 이장로님??”
“멀리 떨어져 계시게나!”
이후의 후폭풍은 전혀 계산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끊어질 때까지, 저 안개를 부술 뿐.
“후우...”
절대의 경지에 오른 내기가 운휘의 육신에서 올올이 풀려나왔다.
그것만으로도 공간이 휘고, 아지랑이가 보이는 듯한 밀도 높은 내력.
“허어... 도,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게야...”
막대한 내공의 향연에 질겁한 이양휘가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그것을 느끼고, 이제 막힘없이 푸른 강기를 끌어내는 운휘.
마치 강처럼 그녀의 내공이 도도하게 흘러가고.
태극의 흐름에 따라 운휘의 주변을 맴돌았다.
‘무릇, 절대란.’
오로지 자신만의.
확고한 영역을 구축하는 것.
쌓인 세월과, 흘러간 시간을 토대로. 의지를 구현하는 것.
그녀는 오래전, 자신의 스승에게 들었던 가르침을 되새겼다.
‘그리고 내가 원했던 것은...’
절대의 경지에 들어서기 위해 간절히 바랬던 것.
그때 그녀가 바랬던 것은, 항거할 수 없는 폭력을 찢어내는 의지.
“하아아...”
이내 눈에 보일 정도로 구현화된 검 한 자루.
새어나온 강기 한톨까지 전부 통제해 만들어낸, 검의 형태를 한 파멸.
“공허탈백참(空虛奪魄斬).”
휘둘러진 검의 흔적이, 산의 꼭대기까지 닿았다.
콰아아아아앙!!!
-끼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 키아악!!!!
만령곡의 안개가 순간 일렁이듯 옅게 흩어지고.
귀를 찢는 듯한 귀신의 곡소리가 울려퍼졌다.
“허억... 이, 이게 무슨...”
저멀리 떨어져 있던 이양휘에게는, 마치 안개에서부터 영혼이 승천하는 듯한 모습이 보였고.
필사의 일격이 통한 것을 본 운휘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흐읍!!”
이어서 내질러진 이검(二劍).
-키아아아악!!
-아파!!! 아파아아아악!!!
또다시 들려오는 소름끼치는 귀곡성(鬼哭聲).
아까 전보다 확연히 흐릿해진 안개.
‘좋아, 통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공허탈백참을 준비하는 그녀의 앞에.
만령곡의 안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뭣이...!?”
하나의 거대한 악의가 되어 자신을 집어삼키려 하는 만령곡.
서둘러 공허탈백참을 끌어낸 운휘가 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각!!
-끼아악!! 계집--!!!
또다시 무수한 혼령이 하늘로 흩어지고.
한층 더 짙어진 악의가 운휘의 정신을 흔들었다.
“큭...!”
명확한 실체를 가지고 그녀를 향해 휘둘러지는 안개.
깨어진 공허탈백참으로 그것을 막아낸 운휘가 죽은 피를 한움큼 흘려냈다.
-몸을!! 내놔라!!!
“크윽...!!”
절대의 경지에 오른 심신이 조금이나마 저항하는 그 순간.
투콰앙!!
한 자루의 검이 빛살처럼 날아와 안개를 흩어냈다.
-키아아악!!
고통스러워하며 물러나는 혼령.
검에 그려진 소나무 무늬가 맑은 빛을 내뿜으며 공명했다.
“목미려!!!”
“사숙!!”
“...장, 문인?”
세령이 빠르게 다가와 운휘를 뒤로 데려가고.
고고하게 하늘로 떠오른 담소율의 손아귀로 검이 빨려들어갔다.
“사특한 것이 활개를 치는구나.”
만령곡의 영혼에 반응하듯 흰 빛을 내뿜는 송문고검.
별다른 동작도, 전조도 없이.
그저 담소율의 손이 흐릿하게 점멸했다.
“본녀의 가족을 또 빼앗아 가지는 못할 게야.”
-끄하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잘게 흩어지는 안개.
베이고 또 베이고, 세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득하게 새겨지는 참격.
마침내 주변을 뒤덮던 불길한 기운이 사라지고.
만령곡의 안개가 평상시처럼 잔잔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
“...사저, 제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이 나이에...”
“물통 추가.”
“네!”
“세령아 너마저...!”
무림맹 수색조의 막사 중 하나.
무당의 여인 셋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중 하나는 외팔에 물통 다섯 개를 얹은 채 마보 자세를 유지중이었고.
하나는 그 옆에서 새 물통에 물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자에 앉아 뾰로통한 얼굴을 한 여인.
“본녀가 막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또 큰 사단이 났을 게야.”
“...”
그저 천운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이미 한참 전에 떠난 운휘의 뒷모습을 그리는 와중에, 세령이가 앞을 막아선 것은.
담소율이 정말 오랜만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무, 무진이... 무진이 살아있어요, 스승님!!
-...그게, 무슨 소리더냐.
-잠시만요, 일호씨.
그리고 튀어나온 혈동자 하나.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미색령을 썼다고?
-네, 무진이 죽었다면... 금제가 풀리고, 이들은 도망치거나 했겠죠. 하지만...
-여전히 너를 따른다, 이 소리더냐.
-네, 스승님.
안도감과 동시에, 벌써 멀리 사라진 운휘가 생각났다.
-일단 따라오거라.
그리고 웬 귀신에게 공격당하는 운휘를 향해 검을 쏘아보냈고.
구해내어 이곳으로 돌아왔다.
“하아...”
“사, 사저... 저 아직 부상이...”
“허허, 부상 당한 년이 그런 기술을 쓰더냐? 세 번째엔 선천진기(先天眞氣)까지 쓰려한 것을 본녀가 보았거늘!”
“큭...”
정말 끝이라 생각했기에 썼던 것이지만.
무진이 놈의 생존 소식을 들은 이상 개죽음이 될 뻔한 일이었다.
“아무튼... 녀석이 살아있다면, 소 소저도...”
“소유가...”
“그래. 가능성이 있겠지.”
이미 수색조를 통해 무림맹에 연락을 넣어둔 참이다.
설레발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심한 부상을 당한 무진이 녀석도 살아있는데.
‘비교적 멀쩡했다던 소유도 그럴 확률이 높지.’
어디까지나 희망이지만.
꽤나 가능성이 있는 희망이었다.
“근데... 아까의 그, 마치 귀신같은 건 무엇이었을까요, 스승님?”
“흠... 모르겠구나. 송문고검에 반응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존재같은데.”
영수나 영물도 있는 마당에 괴력난신이야 있을 만도 하지.
저 혈교의 놈들은 죽었다고 생각한 양광마저 되살려 보내지 않았던가.
“우선 여령도 불러냈으니, 와서 확인하면 될 것이다. 아참, 그놈은?”
소율의 물음에 세령이 조심스레 답했다.
“멀찍이 대기시켜 놓았어요. 괜히 가까이 왔다간...”
“그래, 잘했다.”
“누구를, 허억, 말하는 것이더냐... 세령아?”
“알 것 없다, 네년은.”
싸늘한 담소율의 말과 함께 입을 다문 운휘.
그렇게 동이 터오고, 숨을 헐떡이며 찾아온 소서화와 제갈여령.
일행은 운휘가 있었던 그 고랑으로 다시 모였다.
“흐으음...”
자다 깨서 불려온 것이 마뜩찮은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무림맹의 군사, 제갈여령.
그녀가 불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떤... 미친년이 여기에 구멍을 뚫은 것이냐?”
“구멍을 뚫어?”
“그래, 안쪽에 수백년 묵은 미친 악귀들과 악령들이 그득그득한 이곳에. 구멍을 뚫은 미친년은 앞으로 나와봐라.”
툭하고 자신의 사매를 미는 담소율.
절대 고수의 신묘한 손놀림에 운휘가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아윽, 장문인...?!”
“호, 그래. 운휘 도사. 그대요?”
부채로 입을 가리고, 나긋한 목소리로 묻는 제갈여령.
“...군사님. 그것이...”
“이 씨바랄 년이!! 저기에 구멍은 왜 뚫어!!”
마치 사람이 뒤바뀐 듯, 변명할 틈도 없이 쏟아지는 욕설.
운휘의 안색이 새파랗게 죽어갔다.
“씨부랄 한평생 박히기만 하더니 이젠 박고 싶은가? 이리 오시게. 내 가슴팍의 그 좆만한 지방덩어리를 잘라내서 거기에 붙여줄 터이니. 어!!!”
“죄, 죄송...”
“이 개씨팔! 중원을 귀신 소굴로 만들고 싶은겨!! 이 썅련아!!”
“어허, 제갈 군사.”
“놔봐 씨팔!”
“쓰읍...”
결국 맹주인 소서화가 나서고 나서야 그녀가 진정했다.
그리고 한참을 욕을 처먹은 운휘는 그대로 담소율의 뒤로 숨어 남몰래 훌쩍였다.
“...너무 상심치 마세요, 사숙...”
“흐윽... 내가, 이 나이에...”
잠시 뒤, 담소율과 함께 안개에 새겨진 상흔으로 다가간 제갈여령.
소율이 검을 들어 기운을 내뿜자, 마치 안개가 살아있는 듯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역시... 당분간 담 장문인께서 여기에 계셔주셔야겠소이다.”
“흠, 본녀의 검때문인가?”
“그렇소. 무당의 신검이 이름값을 하는구려.”
개파조사인 장삼봉 진인이 무당에 남겼다는 신검.
그분의 기운이 남아있는 걸까.
잠시 눈을 감아 그녀를 위한 담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군사. 서둘러 방법을 찾아주시오.”
“알겠소.”
다시금 만령곡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맹주인 소서화마저 미약한 희망을 느끼며 안전하게 안개를 뚫어낼 방법을 모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