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응...”
“깼느냐.”
“스승님...?”
막사에서 눈을 뜬 세령.
아침 햇살속에 한가로이 서책을 읽고 있는 스승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장면.
다만 스승의 표정이 그에 맞지 않게 조금 방정맞았다.
“흐흥... 소설 주제에 제법...”
무진이 살아있다는 일말의 희망만으로도.
저리 밝아진 표정이라니.
‘스승님도 참.’
자신도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울면서 웃지 않았던가.
근데, 왜 겉표지에 저리도 살색이 가득...
“저, 스승님...”
“누워있거라. 간단히 찬거리를 내오라 했다.”
“...네?”
조심스레 책을 덮고는 세령의 맥을 짚는 소율.
제대로 먹지 않아 몸이 상해서 그런가, 제자의 맥의 흐름이 조금 이상했다.
‘뭐, 몇 주 전부터 이러긴 했다만...’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아준 소율이 말을 이었다.
“어제 기억 안 나느냐. 갑자기 픽하고 쓰러진 것.”
“...제가요?”
“그래.”
“...아.”
곧 그젯밤의 기억이 떠오른 세령이 죄송스러움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무진이 만령곡에 떨어지고 몇 주간, 식음을 전폐하고 수련에만 매달렸었다.
가끔 너무 목이 마를 때쯤 물이나 조금 마셨을 뿐.
음식이라고는 입에 대지도 않았었다.
“살아돌아올 희망이 생겼으니. 이제부턴 잘 챙겨먹어야지.”
“...네.”
스승님이 슬며시 건넨 거울엔, 초췌한 얼굴의 계집이 있었다.
입술은 갈라지고, 볼은 패이고.
‘...무진이 싫어하겠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쥐어 주물러주시는 스승님.
맑게 짓는 미소에 애정과 사랑이 듬뿍 담겨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흠, 들어가마.”
“...네가 왜 들어오냐.”
“맹주님...”
막사로 들어온 것은 바로 무림맹주, 소서화.
그녀 또한 한층 밝아진 얼굴이었다.
“동병상련인 처지 아니더냐. 세령이 얼굴을 보니 네년이 뭐 해준 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다. 숙수들을 닦달해서 좋은 것들로만 가져왔다.”
과연 그녀가 내기로 둥실 띄어온 상엔 온갖 몸에 좋은 것들이 가득했다.
향긋하게 피어오르는 육향과 먹음직스러운 윤기가 흐르는 요리들.
“허어... 비싼 것만 가져왔구나.”
“내가 누구더냐, 소율아.”
“쯧. 본녀도 무당에선 이런 것 쯤 다 구해서 세령이 먹일 수 있느니라.”
“도사라는 년이 고기를?”
“이런 씨...”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을 상으로 지내던 둘이 싸우는 모습.
그 모습에 세령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풋, 푸훗...”
손으로 입까지 막아가며 미소를 짓는 그녀.
세령의 모습에 다툼을 멈춘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제자라는 년이 스승을 비웃기나 하고 말이야.”
“세령이 넌 또 왜 웃고 그러느냐.”
“아뇨, 그냥... 보기 좋아서요. 스승님, 그리고 사숙. 웃으시니 얼마나 좋아요.”
“...그래, 너도 잘 먹고 원기회복 좀 하거라.”
서둘러 상 앞에 앉은 셋.
소율이 먼저 통으로 푹 삶아진 닭다리를 주욱 찢어 세령에게 건넸다.
“스승님 먼저 드세요. 저는...”
“되었다. 그래도 좀 챙겨먹은 본녀보단 네가 먹어야지.”
“그래, 세령이 네가 잘 먹거라. 다 늙은 우리보다야 네가 먹어야지.”
“자꾸 우리라면서 몰아가지 말거라, 이년아.”
하늘 같은 둘이 재촉을 하니 결국 먼저 닭다리를 잡아든 세령.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다리를 입에 베어물고, 쭉 뜯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역겨움에 그녀가 입을 틀어막았다.
“우웁...”
“...?”
“응...?”
막사 안쪽이 순식간에 침묵으로 가득 찼다.
설마하니 선녀봉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품과 예의가 넘치는 세령이가...
스승의 앞에서 먹기 싫다고 대놓고 구역질을 하지는 않을 것이고.
“어...”
담소율이 당황한 얼굴로 옆에 있던 나물무침을 내밀었다.
“...구, 굶다가 갑자기 고기를 먹으니 그렇지. 이거, 야채 먼저 먹어보거라.”
입을 틀어막은 채, 스승이 내민 가지무침을 바라본 세령.
질척하게 묻은 양념과 축 늘어진 가지의 혐오스러운 자태가 심신을 어지럽혔다.
‘더, 더 올라올 것 같은데...’
세령이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 이년이...”
“아니... 잠깐만. 세령아, 너 혹시...”
“우웁...!”
결국 막사 밖으로 뛰쳐나간 그녀.
안쪽에 가득하던 역겨운 음식 냄새에서 벗어나.
맑은 산공기를 마시니 그제야 헛구역질이 가셨다.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세령의 시선이, 아랫배에 닿았다.
‘설마...’
그녀의 기억이, 무진과의 첫경험이었던 그때로 돌아가 되짚기 시작했다.
“읏...”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가 저릿해지는 그날의 기억.
분명 하루 반나절을 넘게, 그의 정을 받고 받고 또 받았었다.
‘배가, 꽉 차도록...’
그 뒤에 분명, 피임을 위해 운기조식을...
“아...”
한 기억이 없었다.
그저 짐승처럼 교성을 내지르고.
그에게 안겨 헐떡이고.
비부를 휘젓는 자지와, 질벽을 적셔내는 뜨거운 정액에 몸을 떨기만 했었다.
무진의 것이 안쪽을 채우는 그 감각이 너무 좋아서.
조금 늦게 해도 되겠지 했었는데.
‘백세령, 이 바보 같은 년...’
그 사실도 모르고.
지난 며칠간 미치도록 내공을 운용한 것이 떠올랐다.
거기에 더해, 식음을 전폐하고 수련에만 몰두하지 않았던가.
“세령아!”
“스, 스승님...”
“왜, 왜 또 울려고 그러느냐.”
“아, 아기...”
제자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담소율의 눈동자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아기?”
“네, 무진의 아기...”
“...아까, 그게 정말로 입덧... 이더냐?”
세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뱃속의 그의 아이가 자리를 잡은 줄도 모르고.
얼마나 몸을 험하게 굴렸던가.
“어, 어떡해, 어떡해요... 저, 저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않고...”
“일단은, 그... 어...”
갑작스런 소식에 담소율조차도 어안이 벙벙했다.
어쩔 줄 모르고 울먹이는 제자를 토닥이는데, 뒤늦게 다가온 소서화가 입을 열었다.
“세령아, 회임... 한 것이 맞느냐?”
“사, 사숙... 맞는, 것 같아요...”
소서화의 눈에는 도대체 이 둘이 왜 이렇게 바들바들 떠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아비 될 사람이 정말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있다는 가능성까지 생긴 마당에 왜들 저러는지.
“근데 왜 우느냐. 경사스런 일일진데.”
“...제가 그런 줄도 모르고, 막... 막... 몸을, 막...”
“운기조식도 막 하고, 밥도 막 안 먹고 그랬느냐?”
“허읍... 네, 네에... 어, 어떡하면...”
자기 상황을 정확히 때려맞추니 놀랐는지 숨을 들이키는 세령.
소서화가 차분히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다고 전부 회임에 실패하면... 이 중원 무림에 사람이 남아있겠느냐.”
“아...?”
토끼눈을 한 세령을 보고선 소서화가 스스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이 둘이 임신에 대해 무얼 알겠는가.
여기서 혼인하고 애를 배어본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일단은 이 무지한 두 계집년들을 달래는 것이 우선.
“물론 정사를 치룬 뒤에 곧바로 운기조식을 행하면 보통 아기씨가 전부 죽기 마련이다.”
“호오...?”
“네년도 몰랐느냐?”
시선을 피하는 담소율.
그래도 이 친구는 그 녀석과의 동침마다 꼬박꼬박 운기조식을 한 것으로 보였다.
저 얄쌍한 아랫배가 튀어나오지는 않았으니.
“아무튼 그 시기를 지나고, 그래... 이미 아기씨가 자리를 잡은 상태라면 다르다. 어미의 몸이 본능적으로 그곳을 보호하지.”
“하아, 그, 그렇군요...”
“다만 이제 배가 나오고하면, 당연히 내기는 못 쓰게 된다. 이 또한 어미라면 본능적으로 알게 될 것이야.”
어째 요 몇 주 기의 흐름이 조금 다르다 느껴진 것이 그런 이유였나.
세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담소율 또한 세령에게 진기를 불어넣으며 느꼈던 이상함의 이유를 깨달았다.
‘...회임이라니!’
그리고 느껴지는 왠지 모를 질투와 부러움.
괜시리 긴장이 풀린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세령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이, 이 발칙한 것!”
“아야! 스, 스승님...!”
“...하아, 얼른 가서 음식이나 먹거라. 아, 아가한테 뭐라도 먹여야할 것 아니야!”
“아... 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막사로 돌아가는 세령.
하지만 안쪽의 음식 냄새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는지, 몇 가지 찬을 들고 밖으로 나와 오물오물 씹어삼키는 것이 보였다.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경사지, 무어겠느냐.”
“하아...”
왠지 모르게 축 내려앉은 친우의 어깨.
소서화가 실소를 흘렸다.
“왜, 부럽느냐?”
“...그래.”
“...뭐?”
설마 긍정을 표할줄은 몰랐는데.
그 고고하던 담소율이, 사내의 씨를 받아 어미가 되고싶다니.
“본녀도 녀석의 아이를 배고, 저리 행복하게 미소짓고 싶다. 서화야, 너는 어땠느냐?”
오히려 슬픈 얼굴로 물어오는 소율.
소서화가 당황을 숨기며 조심스레 옛 기억을 끄집어냈다.
꼬물거리던 손과, 자신을 애타게 부르던 목소리.
이미 세상에 없는 아이지만, 기억속에선 영원히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딸.
“아... 음. 신비로웠지. 내가...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그래, 그렇구나.”
처연하게만 보이는 친우의 표정.
아마 자신에게는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러니 운기조식도 꼬박꼬박 했을테고.’
그녀가 멋쩍은 웃음과 함께 소율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언젠가 기회가 오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고, 저러다 세령이 체하겠다.”
“아... 세령아! 적당히 처먹거라!”
그동안 못 먹은 영양분을 한 끼에 먹으려는지 볼이 터지도록 쑤셔넣는 세령.
푼수 같은 제자의 모습에 담소율이 다급히 달려나갔다.
“돼지도 아니고 뭘 그렇게 허겁지겁 처먹느냐!”
“죄, 죄송해요... 먹다 보니까, 배고파져서...”
볼이며 입가에 찰싹 달라붙은 식사의 흔적들.
결국 아직은 어린 아이구나 싶어 손수건을 꺼내 슥슥 닦아냈다.
하긴 무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이 먹는 족속인데.
그래도 무당의 체면을 생각해 이리 두는 것은 조금 아닌 듯 싶었다.
“막사에 창을 좀 내어달라 할테니 안에 들어가서 먹거라.”
“우물우물, 꿀꺽... 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왠지 모르게 뿔이 난 소율과 세령의 대면이 이어졌다.
“언제인 것 같더냐?”
“...그게, 처음... 했던 날이요.”
“허어... 역시 그 놈 보통 놈이 아니로구나.”
나이가 들면 밤잠도 없고.
절대지경에 들면 귀가 십 리 밖도 바로 옆에서 듣는 듯 훤해진다.
‘그날이구나.’
'분명 그날이로다.'
담소율도 소서화도 이미 알고있었다.
믿고있었기에 뒤처리는 알아서 잘했으리라 믿었거늘.
“감히 세령이 네가 스승을 두고 먼저...!”
“축하부터 해줘야지 그게 무슨 막돼먹은 심보더냐, 소율아.”
질투에 뿔이 난 스승과, 경사스런 일이라며 담소율을 박박 긁어대는 소서화.
더 이상 산모를 귀찮게 하지 말자며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느긋이 걷던 둘의 발걸음이 어느새 송문고검 박혀있는 고랑에 닿았다.
여름날인데도 서늘한 기온.
안개 너머에 있을 무진을 생각하며 소율이 읊조렸다.
“잘 있으려나 모르겠구나.”
“이 절벽에서 떨어졌는데도 살아있다는 건, 누군가 조력자가 있다던가... 소유가 어떻게든 해내었겠지.”
“그래, 둘이 서로 어떻게든... 잠깐만.”
“왜 그러느냐?”
갑작스레 말문이 막힌 담소율.
하나를 의심하면, 둘이 보인다고 했던가.
‘...아니겠지, 설마.’
이미 그 짐승놈에게 몸을 허락한 소유와.
하루라도 여자를 안지 않으면 몸이 달아오르는 짐승놈.
“갑자기 왜 그러는... 아?”
“...아닐 게다.”
담소율 못지 않게 영민한 소서화 또한.
어떤 가능성 하나를 알아챘다.
“...안된다. 감히, 감히 내 손녀를...”
“그놈도 생각이 있겠지. 일단... 기다려보자꾸나.”
이 자욱한 안개를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그녀들로서는, 그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