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너도 느꼈느냐?”
만령곡 바깥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한데로 모였다.
천극혜검 담소율과 무림맹주 소서화를 필두로 송문고검이 박혀있는 곳으로 향한 이들.
“맹주님, 안개가...”
어제 검을 꽂아둘 때까지만 해도 잔잔했던 안개가.
폭풍이라도 몰아치는 듯 어지러이 일렁이고 있었다.
“오셨소.”
“군사, 무슨 일이지?”
그리고 이미 도착해있던 무림맹의 군사, 제갈여령.
무당의 이장로가 안개에 구멍을 낸지 만 하루도 안되어, 이상을 감지하고 미리 와있던 그녀.
“잘은 모르겠지만, 안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소.”
제갈여령은 구멍에서부터 뿜어지는 끔찍할 정도의 사기(死氣)를 막아내고 있었다.
송문고검에서 뿜어지는 정기(正氣)를 이용한 제갈가의 진법.
뭉클거리는 검은 사기가 안개 근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싸움이라...?”
“그렇소. 분명, 누군가가 안쪽의 혼령들과 싸우고 있소이다.”
이어 제갈여령이 진을 통해 넘어오는 기운을 읽어냈다.
바로 뒤에 서있는 송문고검의 주인과 유사한 힘.
허나 그와는 또달리,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느껴지는 패기(覇氣).
“무당, 태극의 기운. 점점 안개의 구멍과, 가까워지고 있소.”
만령곡에서 느껴질 태극의 기운이라면 단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담소율의 제자, 백무진.
“...못된 놈. 역시 살아있었구나.”
그녀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어서 녀석이 이 망할 안개를 뚫고 나와 자신을 꼭 끌어안아주기를.
소율의 가슴이 콩닥콩닥 두근거렸다.
“다른, 다른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가, 군사?”
“...기운이 너무 강렬하여, 다른 것은 느껴지지 않소.”
“...소유야.”
참담한 목소리로 입술을 짓씹는 소서화.
그런 그녀를 담소율이 달랬다.
“그놈이 혼자 오겠느냐. 계집은 끔찍이도 챙기는 놈인데.”
“...큭, 제기랄.”
“믿거라. 본녀 또한 믿고 있으니.”
소서화는 놈이 손녀를 구했으면 하면서도.
제발 둘 사이에 별다른 일은 없기를 바랬다.
‘내가 바랬던 건 훈육이지, 네녀석이 내 손녀까지 가져가는 건...’
안 될 말이다. 얼마나 애지중지해서 키운 손녀인데!
더군다나 그놈은 세령이까지 임신시키지 않았나.
“크윽...”
“군사?”
태평한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진법을 넘어오려는 사기와 기싸움을 하던 제갈여령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맹주. 크윽, 당장 사람을 물리시오...!!”
“이건...!”
“무림맹 전원! 절벽을 벗어나라!!!”
그와 동시에 두 절대 고수가 같은 것을 느꼈다.
저 안개의 구멍으로 새어나오는, 그 기운의 여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못 막으면, 죽는다!’
스릉.
소서화의 검이 뽑아졌다.
일반적인 장검과는 조금 다른, 꽤나 폭이 두꺼운 장검.
파천(派川)이라 이름 붙인 무림맹주 소서화의 애검.
“소율.”
“서화.”
담소율의 손이 곧게 뻗어졌다.
투콰앙!
진법의 축이었던 송문고검이 땅에서 뽑혀나와 주인에게로 돌아가고.
가부좌를 틀고 있던 제갈여령 또한 뒤로 날아오듯 빨려들어왔다.
“여령, 자네도 최대한 멀리 피신하게나.”
“...알겠소.”
곧 그녀들의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의 기척이 사라지고.
극에 다다른 무인의 내기가 올올이 풀어져 나왔다.
“기운이 두 개다.”
“본녀가 좌측을 맡으마.”
콰직, 콰지지직.
그저 진심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대기가 일렁이고.
바닥에 셀 수 없을 정도의 거미줄이 새겨졌다.
이어 진법이 파괴된 영향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사기.
-끼아아아아악!!!
-살려줘어어어!!!
하지만 저번과는 달리, 악귀들의 귀곡성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담겨있었다.
무언가에서 도망치려는 듯 허겁지겁 빠져나오는 악귀들.
그 모습을 본 소서화가 나지막이 실소를 흘렸다.
“어디서 저런 괴물 녀석을 주워와서는.”
소서화의 주변 공기가 마치 늪처럼 가라앉았다.
그저 눈을 깜빡이려는 것만으로도, 전심전력을 다해야하는 거대한 압력.
악귀들조차 그 압박에 땅바닥을 기며 필사적으로 꿈틀댔다.
“본녀가 예전에 말하지 않았더냐.”
담소율의 검이 흐릿하게 빛났다.
소서화의 둔(鈍)과는 정반대되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자유로움.
“본녀보다 강한 사내와 혼인할 거라고.”
곧 전신을 섬찟하게 만드는 기운이 악귀의 파도를 찢어내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희고 검은, 두 갈래 용(龍).
흑색의 용이 먼저 담소율의 검에 빨려들어가듯 휘감겼다.
“크흡...!!”
아득한 시간 동안 단련해온 육체가 한톨의 낭비도 없이 흐름을 제어하고.
무당의 신검이 하늘을 찔러냈다.
“드디어 찾은 것, 같구나.”
태극혜검(太極慧劍).
오의 무량만박(無量萬駁).
헤아릴 수 없는 것조차도 전부 되받아치는 태극의 정수.
절벽을 전부 부술 듯 내달리던 흑룡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 늙어서 주책이다, 소율아.”
이어 영기로 이루어진 백색의 용이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압착되어 뭉그러져가는 백룡.
“그래도... 혼자 지지리 궁상떠는 것보단 좋아보이는구나.”
단천파둔검법(斷天波鈍劍法)
제 팔초식(第 八招式)
응천(應天)
하늘조차 뭉개버리는 둔(鈍)이 백룡을 감싸안고.
끝끝내 그 잔흔조차 남기지 못하고 응축해 소멸시켰다.
잔뜩 긴장했던 것 치고는 싱거운 결말.
허나 그 싱거운 여파로, 주변의 절벽이 전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득, 콰르르릉...!!
“허억, 허억...”
“큭... 도대체, 이 기운은...”
익숙한 내공을 받아쳐 그나마 멀쩡한 담소율과.
영기라는 생소한 기운에 조금 부상을 입은 소서화.
“괜찮느냐?”
다만 담소율 또한 오른팔의 소매가 터져나가고.
팔 곳곳에 맹수가 물어뜯은 것처럼 깊은 상처가 남았다.
“그보다, 절벽이...”
“어서 녀석들을 찾자꾸나.”
그녀들의 눈동자가, 저 안쪽 어딘가에 있을 사람의 모습을 뒤쫓았다.
*
“쿨럭...”
“오라버니, 괜찮냐는 것이에요.”
“...괜찮아.”
광룡만천과 함께 터져나간 만령곡의 안개.
뿌연 시야가 점점 뚜렷해지며, 바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크으...”
“수고했다는 것이에요, 무진 오라버니.”
“후우, 후...”
전신에 힘이 풀려 쓰러지는 나를 껴안는 소유.
예전보다 한층 더 풍만해진 젖가슴이 뒤통수를 안락하게 감싸안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야스지.’
그리고 꺼져갈 듯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칭찬.
“...잘해주었다.”
“...노야.”
간신히 고개를 돌리자, 터져나간 안개처럼 희끄무레하게 변한 홍 노야가 보였다.
“홍 노야...”
“슬퍼하지들 말거라. 이미 이리 될 줄 알고 있지 않았더냐.”
“...미련은 없으십니까.”
홀가분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그녀.
오히려 행복한 표정이었다.
“없다. 오히려... 족쇄와도 같았던 삶을 끝내준 것이 고맙구나.”
“...그렇습니까.”
홍 노야의 눈동자가 머나먼 과거를 되짚었다.
영안을 깨우치고, 영기를 배워가며.
죽어갔던 몸이 다시 활력을 되찾았었다.
그것이 다시 삶을 얻은 것이 아니란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후련하구나.’
죽을 때 죽지 못한 것은.
족쇄이고, 형벌이고, 끝없는 절망이었다.
스스로 벗어나기엔, 이곳에 갇힌 무수한 악귀들이 마음에 걸렸고.
악귀들을 다 죽이기엔, 가진바 힘이 부족했다.
“너희들이 이곳에 와서, 정말로 즐거웠다.”
“흡, 흐윽...”
짧은 만남이 아쉬웠는지 눈물을 흘리는 계집 아이.
새 생명을 품었으니, 앞으로 울고 싶은 날이 더 많을 것을.
“그러니 웃거라, 너희들도.”
스러져가는 몸으로, 홍 노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진, 너는 다른 세계의 인간이더구나.
“...!”
놀라는 사내. 영안을 깨우친 자신에게는, 그가 가진 알 수 없는 것들이 보였다.
이 중원무림이, 진실된 세상이 아니라는 것도.
허나 개의치 않았다.
그동안 사내를 봐온 결과, 그는 이곳을 더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모쪼록, 이곳을 잘 부탁한다.
흐릿해진 시야를 들어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오라버니? 환청이라도 듣는 것이에요?”
수백 년 만에 올려다본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
이내 눈앞에서 사라진 홍 노야.
콰득, 쿠르르릉...!!
뒤이어, 불길한 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끄응... 소, 소녀에게 업히는 것이에요...!”
“됐어. 아직 움직일 수 있... 큭!”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 아직 창백한 소유의 안색.
훤히 드러난 시야엔, 무너지고 있는 절벽이 보였다.
“오, 오라버니...”
그나마 멀쩡한 팔로 소유라도 바깥으로 던져야하나 싶었을때쯤.
“...찾았다.”
정말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하늘하늘한 백색의 도복과 부드럽게 살랑이는 군청색 머리카락.
“소율.”
눈가에 자그만 눈물방울이 맺힌 그녀가 나를 포근하게 감싸안았다.
“소율, 먼저 소유를...”
“할머니이임!!!”
“그래 우리 손녀!!”
슬쩍 돌아본 소유쪽에는 이미 소서화가 가있는 것이 보였다.
이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는 소율.
‘공주님 안기로 들려본 건 또 처음이네.’
자세가 자세인지라 약간의 쪽팔림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속삭였다.
“다녀왔어.”
짜악!
“끄악!”
“다녀왔기는 개뿔을!! 이 못된 놈!!”
내 시선도 피한 채 입술을 꾸욱 깨물고 있는 그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사랑한다고 백번이고 천번이고 속삭여주고 싶은데.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이겨내지 못하고.
짧게 한 마디만을 남겼다.
“...미안해.”
이내 푹하고 고꾸라지는 무진의 고개.
살짝 놀란 담소율이 그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는, 본녀가 아니라 세령이에게 해야지... 이 녀석아.”
이내 도착한 막사에서.
소율은 잔뜩 울고 있는 모습으로 뛰어나온 제자와 함께 무진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