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88화 (88/230)

“소율아. 세령아.”

“...왜 그러느냐.”

“...네, 사숙.”

내내 막사 안쪽을 걸어다니던 소서화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시야에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앉은 두 여자가 보였다.

“할머님, 아주 따끔하게 말씀해주는 것이에요! 저희가 안 들어왔다면 분명... 기절한 오라버니와 끝까지 했을 것이에요!!”

그리고 옆에서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성을 내는 자신의 손녀, 소소유.

사실 혼내고 말고 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지아비가 살아돌아왔는데 뭐... 그럴 수도 있지.’

말 그대로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이 멀쩡히 살아돌아온 꼴 아니던가.

거기다 상처는 말끔히 나았고, 지금 기절한 이유는 아마도...

‘마지막의 그, 아직도 손이 저릿한 공격때문이겠지.’

검을 쥔 손에 떨림이 여직도 가시질 않았다.

그만큼 엄청난 위력의 초식.

백무진의 경지를 생각해본다면, 아마 가진 바 모든 것을 끌어다 쓰지 않았을까.

소서화가 화난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답했다.

“소유야,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지 않더냐.”

“읏... 그, 그렇지만...”

“녀석은 괜찮다. 그보다...”

아까 무진의 맥을 짚어보니 편안하고 안정적이었다.

필시 하룻밤이면 금방 깨어나겠지.

소서화가 뾰로통한 얼굴의 손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늦바람이 아주 무섭구나, 소율아. 응?”

“시, 시끄럽다 이년아...”

“세령이 너도, 스승이 저러면 네가 말려야할 것 아니더냐?”

“...죄송합니다.”

지금 이건 혼내기보단 그저 부끄러움을 들추는 것에 불과했다.

도사가, 그것도 절대지경의 고수가.

자기 욕정도 제어하지 못하고 멋대로 사내를 범한 것 아니던가.

‘헌데... 그럴만도 했지, 음음...’

솔직히 말해서,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자신도 살짝... 가슴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검붉은... 용...’

그리고 저 둘에게 쏟아진 사내의 정은 또 어떠한지.

진하디 진한 냄새 때문에 자신도 볼이 화악 붉어지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소서화는 그 감정을 잊으려 고개를 살짝 털고 말을 이었다.

“부끄러운 줄 알거라. 누가 들어왔으면 어쩌려고 그랬느냐 정말.”

“...네년이 와서 걸린 거다. 다른 년들은 애초에 그따구로 문을 열지도 않았을게야!”

“...”

맞는 말이었다. 자신이니까 이렇게 무례하게 들어오지.

이곳의 그 누구도 소율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곧 출발할 것이니 그... 묻은 것이나 좀 닦고 오거라. 아니, 출발을 미룰 테니 아예 멱을 감고 오거라.”

어색한 침묵 속에서 수건으로 조금 닦아냈다지만.

워낙 그 양이 많은 터라 그녀들의 머리카락이나 얼굴 곳곳에 아직 녀석의 정액이 남아있었다.

“...그, 덜 닦였느냐?”

“말이라고 하느냐, 그걸?”

“...스승님. 얼른 갔다와요, 저희.”

“...그래.”

도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사라지는 둘.

소서화는 늦바람이 난 친우의 모습에 실소를 흘렸다.

“허허... 발정난 계집년이 다됐구나 아주.”

색에 빠져 천박한 꼴이 된 담소율이라니.

어디 몸에 좋은 보약이라도 하나 지어줄까 고민하던 차.

소서화의 시선이 손녀에게 닿았다.

“...그놈한테는 왜 가느냐?”

“오라버니한테 이불 좀 덮어주려는 것이에요.”

“...아, 그래.”

잠깐.

‘오라버니?’

아까도 아픈 오라버니 어쩌고 하지 않았던가?

소서화가 설마하는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유야.”

“네, 할머님.”

“저번엔 허접이니 뭐니 하면서 부르지 않았더냐? 갑자기 왠 오라버니...?”

“아...”

자신의 물음에 수줍게 볼을 붉히는 손녀.

저 앙큼한 것이 저런 표정을 짓다니.

당황한 소서화의 귓가로 청천벽력같은 말이 들려왔다.

“어찌 지아비 될 사람에게 허접이니 뭐니 상스러운 소리를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에요, 할머님.”

“지, 지아비?”

“네. 소녀가 무진 오라버니의 아이를 배었으니, 지아비인 것이에요.”

“컥...”

소서화의 뒷목을 타고 뜨거운 핏줄기가 용솟음쳤다.

그래, 백번 천번 이해해서 연인이 되는 것 까지는 납득할 수 있었다.

목숨을 구해준 여인과, 다친 사내.

둘 밖에 없을 까마득한 절벽 아래.

한달이 넘는 시간 동안 마음이 피어나지 않는다면 필시 무언가 잘못된 거겠지.

‘그래도, 회임은 아니지 않느냐...!!!’

심지어 이미 회임을 한 또다른 여인까지 있는 마당에!!!

소서화가 간신히 혈압을 낮추고 입술을 달싹였다.

“...이, 이 할미를 우롱하려는 것이라면 당장 그만두거라.”

“소녀, 지금까지 할머님에게 거짓을 고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이에요.”

“아니, 아니... 그래, 그건 그렇지만...”

말투만 조금 모났지 이렇게 참한 아이가.

저 시커먼 놈의 아이를 배었다니?

소서화가 벌떡 일어나 소유에게 다가갔다.

“바른대로 고하거라. 필시 이놈이 너를 덮쳤을게야. 아니 그렇느냐?!”

당장이라도 그 커다란 양물을 쥐어뜯어버리기 위해 손을 뻗자.

자신의 손녀가 황급히 그 앞을 막아서는 것이 보였다.

“할머님!!”

“소유야, 내가 너를 어찌 키웠는데!!”

자신의 호통에도 눈을 질끈 감을 뿐 절대 비키지 않는 손녀.

절벽에서 녀석과 보낸 시간이, 그만큼 귀중했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소유가 누군가의 아내가 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었다.

좋은 가문에, 좋은 남자를 찾아 평생 행복하게 해줄 녀석에게 맞이해야하는데.

“저놈은 이미 사랑하는 정인도 있는 녀석이다.”

“...알고 있는 것이에요.”

저 썩을 것이 감언이설로 손녀를 구워삶았겠지.

이전까지의 계집질에 아주 미친 모습을 보면 확실했다.

“그럼 그게 세령이인 것도 아느냐?”

“...네.”

“그럼 세령이가... 너처럼 회임했다는 것도 아느냐?”

“...네?”

그제야 당황으로 물드는 손녀의 얼굴.

하지만 곧 납득하는 표정을 하더니, 이내 고개까지 끄덕이는 것 아닌가.

“역시 오라버니...”

“역시는 무슨 역시냐!! 이제, 이제 어떡할 것이냐... 아가, 당장 올해 벌어질 봉룡지회는 어쩌고!”

“...괜찮다는 것이에요. 이미 소녀가 한 번 우승한 대회인 것이에요.”

도대체 절벽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애가 이렇게 홀랑 넘어갔단 말인가!!

평소 같으면 당연히 자신이 다시 한 번 우승을 할 것이라 당당히 이야기할 텐데...!

“...그 시간동안, 다른 녀석들이 치고 올라올 것이다. 회임을 한 동안 너는 계속 약해질 것이고.”

“까망이를 위해서라면, 상관없다는 것이에요.”

“까, 까망이는 또 무슨...”

“아가의 태명인 것이에요, 할머님.”

조심스레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해맑게 웃는 손녀.

소서화는 그 행복한 얼굴에 더 화를 내지 못했다.

자신도 딸아이를 배었을 때, 딱 저런 표정을 짓지 않았었나.

허나.

“...허락할 수 없다.”

“할머님.”

“이 여자 저 여자 다 후리고 다니는 걸레같은 놈에게 널 보낼 수는 없느니라!”

“읏... 오라버니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이에요!”

아니, 녀석은 그런 놈이었다.

노예상이고, 자기 스승이고, 동기고 전부 따먹는 걸레놈.

거기에 자기 손녀까지 건드리다니.

‘지금 아예 싹을 잘라버려야...’

보라, 지금도 바지 위로 우뚝 솟아선 잘라달라 소리치고 있지 않나.

머릿속까지 열불이 뻗친 소서화가 살며시 소유를 밀어냈다.

“비키거라. 정절단이 할 일을 내가 대신 해주마.”

“아읏... 절대 안된다는 것이에요!!”

필사적으로 앞을 막는 손녀.

허나 내공도 쓰지 못하는 일반인의 몸이 된 손녀에게 막힐 그녀가 아니었다.

‘미안하다 소율.’

곧게 뻗어나간 손날이 바지춤에 닿는 순간.

막사를 찢고 들어온 검이 그 앞을 막아섰다.

“뭘 하는 게야, 소서화.”

“당장 검 치워라, 담소율. 이 흉측한 걸 내 잘라버릴 테니.”

꾸득, 꾸드득...

무진의 자지를 앞에 두고 벌어지는 두 절대 고수의 내공 싸움.

뒤이어 세령까지 다가와 혼비백산한 얼굴로 소서화를 뜯어 말렸다.

“사, 사숙!!!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거에요!!!!”

하지만 그녀 역시 내공을 쓰지 못하는 몸.

태산같이 버티고 선 소서화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 미친년이 본녀의 사내에게 무슨 짓이야!!!!”

“당장 검 치우래도!!!”

분노한 소서화의 손이 새파랗게 달아오르는 찰나.

만두 머리의 소녀가 무진의 사타구니 위를 자기 몸으로 덮었다.

“할머님께서는 소녀가 과부가 되시길 바라는 것이에요!?”

“응?”

“...과부?”

“이, 이... 제기랄!!!”

결국 손을 거두고 만 소서화.

방금까지라도 이 일대를 날려버릴 것만 같았던 난폭한 기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어 침묵으로 가득 찬 막사.

세령과 소율의 시선이 소유에게 향했다.

“...무슨 말이더냐 소유야. 과부라니?”

“소유...? 그게 무슨 소리야?”

천천히 몸을 세우는 소소유.

그녀가 무진의 허벅지를 살살 쓰다듬으며 그 물음에 답했다.

“소, 소녀도... 무진 오라버니의 아가를 뱄다는 것이에요. 세령 언니처럼...”

“...허어.”

“아...”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를 목소리.

소율은 친우가 어째서 저토록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금쪽같이 여기던 손녀가... 저 변태놈 애를 뱄다니.’

세령이야 어차피 둘이 사귀는 걸 알았기에 언젠가 그러지 않을까 해서 충격이 덜했지만.

소유는 자신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치명상을 입고 절벽에 떠내려간 놈이.

멀쩡히 돌아온 것도 모자라 같이 떨어진 무림맹주의 손녀를 임신시켜?

‘실로 엄청난 성욕이구나, 무진아...’

그녀의 눈에 바지 위로 딱딱해진 무진의 자지가 보였다.

시도 때도 없이 단단해지는 녀석이니 이해는 한다만.

저걸 쳐다보는 친우의 얼굴이 마치 야차와도 같았다.

소율은 세상에서 두 번째... 아니 세 번째로 사랑하는 걸 잃지 않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소유야.”

“어찌된 일인지... 상세히 말해줄 수 있느냐?”

“...네, 사숙.”

“상세히는 무슨!! 저, 저 썩을 놈이 우리 소유를...”

“할머님!!”

소서화의 노호성에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친 소유.

그녀가 단호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무진 오라버니는 소녀의 지아비가 될 사내에요.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이, 이것이 지금 할미에게..."

"그리고 소녀는 오라버니와 강제로 관계를 맺지도 않았고, 서로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에요."

아련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는 소유.

소서화가 허탈한 얼굴로 머리를 짚었다.

“살기 위해라니... 무슨 소리야, 소유?”

이어진 세령의 물음에 소소유가 차분히 숨을 고르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또렷한 눈망울로 소서화를 바라보는 그녀.

“소녀가 전해드릴 이야기가 있으니, 들어달라는 것이에요 할머님.”

“하아...”

“서화야.”

“...알겠다.”

힘없는 목소리로 주저앉은 소서화.

그리고 그 곁에 같이 자리잡은 소율과 세령.

소소유가 무진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절벽에서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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