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헤, 에헤헷...”
“바보처럼 웃지 좀 말거라, 세령아.”
“그래도 좋은 걸요, 스승님.”
“쯧...”
맹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소유와 세령을 옆에 끼고, 앞에 소율을 앉힌 채로 마차에 탔다.
아직 소유에게는 나와 떡친다는 걸 숨기고 있는 줄 아는 소율은.
양옆에 착 달라붙어 내게 비비적대는 둘을 보면서도 눈만 부라릴 뿐이었다.
“본녀는 안아주지도 않고. 썩을 놈... 제자 같은 거 키워봐야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이야...”
아까 일부러 슬쩍슬쩍 몸을 피했더니 자꾸만 궁시렁대는 그녀.
삐죽대는 입술에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었다.
“뭣하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태사부. 원래 둘씩 앉는 자리 아닙니까.”
“어... 그렇지...? 그, 그러면...”
편히 누워있던 걸 은근슬쩍 앉은 자세로 바꾸려는 소율.
하지만 내가 몸을 일으키려하자, 양옆에서 마치 늪처럼 나를 잡아당겼다.
“마차가 덜컹거리면 위험한 것이에요, 오라버니.”
“맞아요, 무진. 무진을 잡고 있어야 안전하죠.”
“아... 그렇다는군요, 태사부.”
“...”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굳어선 아예 울 것 같은 소율의 얼굴.
슬슬 안 달래주면 위험할 것 같아서 슬그머니 전음을 날렸다.
-오늘 밤에 제가 가겠습니다.
-흥.
째릿하면서도 이내 입가엔 살며시 미소가 번지는 그녀.
소율도 세령도 소유도 맘껏 안아주고 싶은데, 자지가 하나라 너무 아쉬웠다.
“태사부께선 편히 누워서 가시지요.”
“...망할 것들.”
한편, 마차에서 편히 가는 일행과는 다르게 소서화는 홀로 말을 타고 있었다.
이제 여름에 들어서 따갑게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로.
“볕이 따갑습니다. 마차 안으로 드시지요, 맹주님.”
“...괜찮네, 갈 부단주.”
그나마 햇빛을 가릴 죽립 하나만 쓴 채.
터덜터덜 힘이 없어 보이는 맹주의 뒷모습.
‘...소 소저께서, 임신했다고 했었나?’
솔직히 듣고싶어서 들은 것은 아니지만.
반쯤 찢어진 막사 내에서 들려오는 고성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백 소저까지도...’
앞날이 창창한 무림의 봉룡들 중 두 마리의 봉황이.
전부 한 남자의 씨앗을 받아 임신해버렸다.
호사가들이라면 눈에 불을 키고 찾아들 만한 사안.
뭐 봉황들 모두가 유명하고 무림에 널리 알려진 여인들이지만...
‘두 분의 신분은 특별하지.’
둘 모두 스승이 절대지경의 고수이고, 심지어 한 분은 무림맹의 맹주.
이쯤되면 저 뒤의 마차에 있을 사내가 일부러 노린 건 아닐까 싶은 수준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음탕한 냄새를 풍기는 이였는데...’
자신이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정절단을 꼭 만나게 될 거라고.
‘당 단주께서 이 사실을 알면...’
아마 그 미친년은 단숨에 달려와 사내를 죽이려 들 것이다.
뜬 듯 안 뜬 듯 희미한 실눈 사이로, 그 녹색 눈동자가 번뜩이면 오금이 저려오는 기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위험할 것 같아 갈단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맹주님.”
“왜 그러나.”
“오늘 아침에... 외람되오나 듣고 말았습니다.”
“...”
한층 더 푹 꺼지는 맹주의 어깨.
저 어깨에 인 짐이 어찌나 무거울지, 그녀로서는 가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또 누가 알 것 같은가?”
“아마... 막사 근처에 있던 이들은 전부...”
“하아...”
깊게 내쉬어지는 한숨. 소서화도 알고 있었다.
중간에 급히 기막을 펼치긴 했지만, 이미 뻗어나간 소리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어찌해야겠는가?”
“지금이야 어찌저찌 입을 막는다 쳐도...”
어차피 소문은 퍼질 것이다.
부단주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하였는가.’
소서화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들어갔다.
“이제와서 아이를 지우라... 명하실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뭐가 됐든, 소중한 손녀가 품에 안은 증손자다.
사내 아이일지, 계집 아이일지는 몰라도.
어찌되었건 자신의 피가 흐르는 핏줄.
지우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조건을 걸어야지. 과연 내 손녀사윗감이 될 만한 놈인지.”
사실 뭘 걸든 싫었다. 저런 놈팡이에게 손녀딸을 내준다니.
마치... 손에 쥐고 있던 애지중지하는 보석을 강제로 빼앗긴 느낌이랄까.
“부단주, 올해 봉룡지회에 누가 나오겠는가?”
“음... 저번에 참가했던 이들은 전부 나이가 되니, 다시 한 번 모두 참가할 것이라 보입니다.”
“...”
20대의 젊은 후기지수들이 대거 참석하는 봉룡지회.
저번엔 거기서 손녀가 자랑스러운 봉황의 자리를 거머쥐었거늘.
‘이번엔 참가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구나.’
그때면 이미 배가 불러 모든 것을 조심해야할 시기일 터.
소서화가 쨍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봉룡들의 수준은 어떠한가?”
“아마... 거의 전부 초절정의 수준에 다다른 듯 합니다. 심지어 용중에서도, 북창룡 남궁악이 저번 달에 초절정에 올랐다더군요.”
“좋은 승부가 되겠구만.”
“네, 전체적으로 수준이 상당히 올라간 듯 합니다.”
저번 대회로 이미 한번 세대가 교체된 봉룡들.
전부 약관의 나이에 가까운 상태로 나왔었으니 올해도 같은 이들이 나올 것이다.
“자네가 보기에, 남궁가의 아이가 저... 파렴치한 놈을 이길 수 있을 거라 보는가?”
결과를 알고 던지는 물음.
저번에 보았던 그, 태극과 파둔을 섞은 일격만 하더라도.
남궁가의 아이가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혹시 모르지요.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무언가 깨달음이 있었을지.”
“...그래, 그런가.”
하지만 맹주의 기분을 위해 혹시, 하는 가능성을 던지는 갈단려.
소서화는 그 가능성에 마음을 살짝 기대었다.
“남궁의 하늘이 꽤나 높기는 하지.”
“예, 충분할 것입니다.”
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 사이로 잠시 이어지는 침묵.
갈단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맹주님. 그... 당 단주에게는 따로 명하실 것이 있으신지?”
“...아, 그래. 당 단주가... 있었구만.”
소서화의 마음속에 꺼림칙함과 동시에 또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무림맹 주작단의 숨겨진 이명, 바로 정절단.
그리고 바로 그 주작단의 수장, 녹옥봉 당하린.
‘솔직히 말해 세령이보다도 소유에게 더 위협적이었지.’
육중한 둔(鈍)을 깨는 것은.
무당의 유(流)보다야 사천의 독(毒)이 훨씬 위험했었다.
허나 결국 그녀 역시 소소유에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명실상부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이다.
심지어 봉룡지회 이후 스스로 주작단에 들어와 몇 년만에 단주의 자리를 따낸 여인.
‘조금 위험한 성격이긴 하다만.’
정절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임무를 완수한 유능한 인재다.
또한 당가의 여식답게 그 수법이 얼마나 독한지.
여존남비(女尊男卑) 그 자체인 여인.
그것이 바로 당하린이었다.
“당 단주가 저녀석을 참 싫어하겠구만.”
“...그럴 겁니다. 소 소저와 백 소저를...”
“검도 못 들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예.”
내심 이번 봉룡지회에서 갚아주리라 칼을 갈고 있을 당하린인데.
그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벌써 그려지는구만. 어찌 사내 따위가 두 여자를 탐하려드냐고... 그 실눈을 초승달처럼 휘겠어.”
“...백 소협은 소 소저의 아기씨의 아비입니다, 맹주님.”
그녀의 손을 거친 남자는 전부 못 쓰게 되었다.
다시는 여인을 탐하지도,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는 꼴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정도도 못 이겨내서야... 내 손녀사위가 될 자격 따위는 없네.”
“...”
갈단려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내심 어여쁜 동생처럼 여겼던 소소유를 임신시킨 것도 괘씸하기도 하거니와.
저 야차같은 얼굴의 맹주에게 더 이상 설득을 할 깜냥도 없었다.
“...전서구를 보낼까요.”
“마침 호북 근처에서 색마를 탐문하고 있다지 않았는가? 그냥 내버려두시게.”
“예.”
저번에 색마의 제자인 삼색동의 흔적을 찾았다고 전서구를 보내온 것이 기억났다.
아직 소식이 없는 걸로 어디서 또 엄한 사내를 붙잡고 화풀이나 하고 있지는 않을지.
‘부디... 잘 이겨내시길 빌겠소, 백 소협.’
봉황을 둘이나 가졌으니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맹으로 가는 내내.
“하아아...”
마차에선 여인네들의 행복한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말 위에선 다 죽어가는 한숨이 끝나질 않았다.
*
“...후룹.”
“음...”
불편했다.
냄새만 맡아도 존나 비싼 차고.
앉은 의자도 하나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값비싼 장인의 작품이 분명했지만.
차는 쓴맛만 났고 허리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딴 게... 상견례?’
보통 부모 자식 합해서 여섯이 함께하는 게 일반적인 상견례일텐데.
이 야밤의 무림맹 꼭대기에는 단 둘뿐이 존재하질 않았다.
그야 소유의 부모님은 진즉 혈교에 죽었고.
애초에 난 고아였고. 소유는 일찍 잔다고 참가하지 못했다.
“...차향이 참 좋습니다.”
“그런가? 본인은 하도 마셔서 그냥 맹물같군.”
시발 그러면 왜 타줬어!
‘지금쯤 신나게 소율이 따먹을 시간인데...’
내 앞에는 지금 금강야차와도 같은 기세를 뿜는 소서화가 앉아있었다.
벌써 들이킨 찻잔만 열잔 째.
그동안 그녀는 그 언짢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은 하질 않았다.
“흠...”
콰직.
그렇게 톡톡 두드린 손가락에 책상이 움푹 패일 쯤에야, 그녀가 물어왔다.
“내일 돌아간다고?”
“...예.”
원래는 맹에서 짐만 챙기고 바로 가려는 것을, 앞에 있는 년이 붙잡은 것이다.
곧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입을 여는 소서화.
“소유가 해준 이야기로 머리는 납득했네만. 이 가슴이 말일세. 열불이 나서 안되겠어.”
“...제가 어찌 하길 바라십니까. 바라시는 것은 뭐든 하겠습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눈앞의 사내가 강제로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살기 위해 노력하다 벌어진 일.
하지만 자식 새끼처럼 키운 손녀를 이렇게 보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쉽사리 놓아줄 수가 없었다.
“당장 소유를 내놓...”
“소유는 제 여잡니다, 제 아이를 밴. 맹주께서 뭐라하시든 제가 평생 책임질 거라고, 이것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깊게 고개를 숙이자 득달같이 날아오는 대답.
어차피 할 말은 뻔했기에 싹둑 자르고 내 의견을 피력했다.
아니, 의견이라기보단 통보.
맹주도 언젠가 결국은 소유가 내 곁에 있는 걸 허락할 수 밖에 없다.
다만 그때까지 소서화가 나를 얼마나 괴롭힐 것인가, 그게 문제지.
“하... 어디 기개만큼 실력도 따라줄지는 의문이네만.”
“...무엇을 바라십니까.”
잠시 차로 입술을 축이곤 말을 잇는 소서화.
“이번 봉룡지회에서 최종 우승을 하게나.”
최종 우승. 이건 봉룡끼리의 대결에서도 이기라는 이야기였다.
여자들 중에서 최강의 봉황을 뽑고, 그리고 남자들 중에서 최강의 용을 뽑고 나서 겨뤄지는.
‘단판 남녀 대결이지.’
참고로 내가 알기에 이제까지의 역사 중에서 남자가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전부 처참하게 패배한 기록만 있을 뿐.
“알겠습니다. 맹주님의 마음에 들려면 그정도는...”
“압도적으로.”
“...예?”
“압도적으로 이기게나. 최종 우승을 할 때까지 단 하나의 상처도 없이.”
소서화의 눈빛엔 어떠한 반박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단호함이 서려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알겠습니다. 최종 우승까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