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어...”
“자, 장문인...?”
“옆에는 백 사저잖아요...?”
장로각으로 향하는 내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새하얀 여인 둘을 옆에 끼고 당당히 걸어가는 깜둥이 하나.
“아으...”
장문인이라 불린 여인은 살결을 다 드러내는 시원한 옷을 입은 채였고.
“무진, 스승님이 덜 부끄러우시게 저도 입을 걸 그랬나요?”
“아뇨, 하양이가 추울 거에요.”
“그런가요.”
“네.”
차기 장문인으로 낙점된 여인은 살짝 부른 배를 감싸며 맑게 웃고 있었다.
세령과 소율, 둘 모두 부끄러워하면서도 나와 함께 걸어갔다.
이제 멀리 장로각이 보이는 지점, 소율이 내 팔뚝을 꼬옥 감싸왔다.
“읏, 하아... 그, 그만 좀 주무르거라...”
“살짝 젖으셨는데, 남들에게 보이니 발정나신 겁니까?”
“시, 시끄럽다...!”
내려오는 내내 엉덩이를 괴롭혔더니 이젠 질척하게 젖어든 소율의 아랫속곳.
도포 자락 아래로 슬쩍 들춰진 하얀 엉덩이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읏... 오, 옷 좀 잡아당기지 말거라...”
“조신하게 걸으십쇼. 빨리 가려고 휘적휘적 남정네처럼 걸으니 옷이 말려올라가는 겁니다.”
가뜩이나 짧은 옷에 자꾸만 내가 만지니 자연스레 비부를 드러내는 여름용 무복.
소율이 양손으로 끊임없이 말려올라가는 옷을 잡아당겼다.
“이, 이놈이 정말 뚫린 입이라고...”
“그리고 옆에 임산부도 있는데, 천천히 가시죠.”
“마, 망할 노옴...”
결국 큰 거 마려운 사람마냥 잰걸음으로 걸어가는 소율.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으로 속곳은 입혀놨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데리고 나오기 쉽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장로각으로 가는 내내, 마주치는 무당의 제자들과 식객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드, 드디어...”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장로각.
아무래도 꼰대들이 가득한 곳이라 그런지, 주변이 한산했다.
“흠... 산보 좀 더 하다 올까요, 세령?”
“아, 전 괜찮은데...”
“자, 작작 하거라...”
이젠 거의 울 것 같은 소율의 눈동자.
살짝 눈물이 맺힌 눈꼬리를 가볍게 찍어냈다.
“알겠습니다. 올라가시죠.”
“흐으... 본녀가 어쩌다...”
입구에 서자 찬찬히 열리는 장로각의 문.
안쪽에서 경계를 서고있던 무사들의 시선이 단박에 소율에게 꽂혔다.
“위에서 다들 기다리고 계십... 자, 자... 장문인?”
“이건, 그, 그러니까... 여름용... 무복일세. 올라가지.”
“아... 예.”
“어서.”
남아있는 체면이라도 챙기려는지 최대한 분위기를 잡는 그녀.
세령이 부드럽게 안기며 속삭였다.
“스승님 정말 귀여우셔요. 안 그런가요?”
“밤에는 얼마나 음탕한데요. 봤죠?”
“앗... 잘 알... 모, 몰라요, 그건.”
뒤를 돌아보는 살벌한 시선에 말을 바꾸는 세령.
잘록한 허리를 힘껏 끌어안고 소율의 뒤를 따랐다.
오늘은 공식적으로 장로들에게 내가 담소율의 제자이자 연인임을 ‘통보’하는 날.
‘딱히 무당파 장문인 같은 건 할 생각이 없지만...’
내가 무당에서 어떤 위치인지는 이제 각인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겸사겸사 따먹을 장로들도 알아보고.
“하아아...”
회의실로 들어가기 전, 슬쩍 몸을 돌리는 소율.
성큼 다가와 군청빛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올려다본다.
“본녀가... 이제 무진이 네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장로들의 반발이 심할 게다. 심지어... 차기 장문인인 세령이까지 네가 회임을 시켜버렸으니...”
“상관 없습니다.”
“특히나 운연은... 분명 너와 아주 끝장을 보려 할 것이야.”
“이기면 됩니다.”
간단했다. 여기는 무림.
어떤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이든, 결국 강한 놈이 장땡인 세상.
‘물론 운휘가 조금 걸리긴 하지만...’
그녀는 만령곡에서의 사건도 있고, 이젠 거진 내 편에 가까워진 여자다.
‘그렇다면 운연인데...’
어차피 초절정 수준.
그중에서도 끝자락에 다다른 실력자일테지만.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만은 인정할만 하구나, 정말.”
“근거가 없다니요. 지금까지 이 제자가 다 이기고 돌아왔는데.”
“...그래, 그렇지.”
잠깐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 숨을 들이키는 소율.
다정히 머릿결을 쓰다듬고 있으려니, 곧 결심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잘해보거라. 본녀와 세령인... 언제까지나 네 편이다.”
“맞아요, 무진.”
“고마워요, 둘 다.”
차마 당당히 입에 올릴 수 없는 방식으로 이어진 인연이지만.
이제 와서 딱히 개의친 않았다.
천박하고 음탕한 관계더라도, 그녀들은 이제 내 여자들이니까.
‘소유 보고 싶네.’
달칵.
“후...”
심호흡을 한 소율이 앞에 섬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가운데 비워진 상석을 필두로 일장로 운연부터 이장로 운휘, 그 옆으로 쭉 앉아있는 장로들.
우리가 안쪽으로 들어서자, 그녀들의 반응은 전부 똑같았다.
“장문인...?!”
“그, 그게 무슨 파렴치한 복장입니까...!!!”
“어쩐지 바깥이 소란스럽다 했더니만은... 도대체 무슨...”
소율의 복장에 한 차례 경악성이 지나가고는.
나를 씹어대는 장로들.
“잠깐... 옆에 저 곤륜인은 뭡니까?”
“장문인, 세령이야 그렇다쳐도... 외인을 장로회의에 들이시다니요.”
“아무리 장문인이 무당의 지존이시라 하더라도, 자꾸만 규칙을...”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상석에 앉아 조용히 입을 여는 소율.
“장로들은 듣게나.”
그녀가 가진 무당에서의 힘을 보여주듯, 회의실이 한순간 침묵으로 가득 찼다.
잠깐 의문과 놀라움을 접고 소율의 말을 기다리는 장로들.
소율이 그들을 향해 살짝 볼을 붉히며 말했다.
“우선... 여기, 이 사내부터 소개를 하지. 몇몇은 알고 있을 테지만, 정식으로 소개하려하네.”
“...장문인, 기어코.”
운연의 입에서 나오는 탄식에 찬 한 마디.
소율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내 손을 꼬옥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쪽은... 백무진. 세령이처럼 본녀의 진전을 이은 제자이자, 연인일세.”
오랫동안 문파를 잘 이끌던 장문인의 폭탄선언.
그렇게 한 대 얻어맞아 어안이 벙벙해진 장로들이 뭐라 입을 열기 전, 세령이 먼저 나섰다.
“그리고... 제 연인이기도 해요. 무진의 아이를 가졌으니까요.”
“아...”
“허어...”
“원시천존이시여...”
이어서 세령이 던진 넉다운 펀치.
배를 쓰다듬는 그녀의 모습에, 장로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지는 것이 보였다.
심지어 일장로인 운연은 비틀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 나 또한, 당당히 앞으로 나서며 포권했다.
“반갑습니다, 장로님들. 백무진이라 합니다.”
*
“정녕 미치셨습니까!!”
“아니, 안 미쳤다.”
“장문인!!!”
평소의 단아하고 정숙한 모습이 흐트러진 일장로.
장로들 중 유일하게 담소율에게 소리칠 수 있는 배분인 그녀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녀에겐 아쉽게도 같은 운자 돌림의 운휘는 그저 침묵을 지켰다.
“내 장문인이, 어디서 온 지도 모를 이국의 남자와 사귀는 것은... 그래요, 내 백 번 이해하겠습니다.”
간신히 화를 가라앉히며 말을 잇는 그녀.
“헌데... 태극혜검을 전수해요? 태극신공을? 이 무당의 모든 것을!!”
“...안될 것 없다. 무진이의 재능이 실로 출중하니, 제자를 새로 들였다 치면 되지 않겠는가.”
“무진이? 무진...? 이, 이... 담 사저!!”
“회의중일세.”
생각보다 편안해보이는 소율.
어차피 내가 해결할 거라 믿는 건지, 다리를 꼬고는 뻔뻔하게 답하는 것이 보였다.
새하얀 허벅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젖은 속곳.
‘개꼴리네...’
이따 올라가서 또 개처럼 박아줘야지.
“그리고, 도대체 그... 창녀 같은 복장은 뭡니까!!”
“...저, 저 녀석이... 선물해준 것일세. 여름이라... 시원해.”
시원하기야 하지.
보지부터 치맛자락까지 손가락 한 마디도 안되는데.
“으으... 대체, 대체 왜!! 은퇴할 나이가 되니 횃까닥 도신게요!!”
“쓰읍... 말이 심하구나.”
“지금 장문인이 하는 짓거리가 심한 겁니다!”
결국 말이 안 통하는 소율에게서 고개를 돌려 세령을 바라보는 일장로.
무서운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걸 내가 가로막았다.
“비키거라. 이 잡것.”
“세령은 지금 홀몸이 아닙니다. 줄기줄기 뻗어대시는 내기가 혹여 안 좋을 영향을 미칠까 봐요.”
“정녕... 뒈지고 싶으냐?”
“...”
어차피 다 내 수족이 될 여자들.
제대로 위아래를 인정하기 위한 대결이 아니라면 힘 뺄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감히 세령한테 함부로 대하게 둘 수야 없지.
“여기서 말씀하시죠.”
“그래, 뒈지면 네놈 책임이니라.”
순식간에 뻗어지는 운연의 손바닥.
걸쭉하게 피 한 사발 토할만한 내력이 담긴 것이 느껴졌다.
‘근데...’
이다지도 느리게 보이는 건 왜일까.
운연의 손바닥에 맞추어 나도 느릿하게 손을 뻗어냈다.
“큭, 뭣...!?”
회(回)의 묘리가 가득 담긴 운연의 장(掌).
마주한 손에 그와 반대되는 회전을 걸어 한순간에 무마시키고.
그대로 팔을 타고 올라가 목덜미에 수도를 겨누었다.
“...”
“뒤에 임산부가 있습니다. 자중하시죠.”
눈 깜짝할 새에 제압당한 일장로의 모습에, 회의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절대에 들어선 운휘를 제외하면 장로들 중 가장 강한 일장로 운연.
그녀가 단 한 수에 당한 것이다.
"크으..."
당황한 얼굴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운연이, 세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세령아.”
“네, 일장로님.”
“...후회, 하지 않느냐? 이, 이 망할 놈이 너를 겁박해 그런 것은...”
“아니요.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요.”
천천히 일어나 다가오는 세령.
그녀가 운연의 목덜미에 겨눠진 내 손을 부드럽게 치워냈다.
“무진이 만령곡에 떨어졌었다는 거, 아시죠?”
“...그래.”
운연, 그녀는 만령곡에서부터 넘어온 모든 소식을 알고 있었다.
담소율이 없는 이상 그녀가 무당의 대소사를 맡아야했기에.
“그 뒤에, 아직 무진이 살아돌아오기 전에. 회임을 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
“그때 제가 가장 먼저 들었던 감정은. 안도였어요. 왜인 줄 아세요?”
지금의 이야기는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때 피폐해진 이야기를 굳이 듣고 싶지도 않았고, 세령도 말하기 싫어하는 눈치였으니까.
“...왜, 그랬느냐?”
“무진과의 결실이 제게 남았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그가 없더라도, 그를 추억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줄 생명이 제 품에 있어서. 그래서 안도했어요.”
차분히 운연의 손을 마주잡는 세령.
씩씩대던 운연의 숨결이 차츰 가라앉아갔다.
“무진이 조금... 본능적인 남자긴 하지만. 좋은 사람이에요. 보세요, 오랫동안... 흠흠. 남자를 모르고 살아오신 스승님도 무진에게 푹 빠지셨는 걸요.”
운연의 시선이 뒤쪽에 팔짱을 낀 소율에게 닿았다.
부끄러운지 고개를 홱 돌리는 그녀.
‘...담 사저.’
운연도 알고 있었다. 담소율이라는 무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래서 더더욱 이해가 안 갔지만, 그렇기에 또 가슴으로는 알 수 있었다.
“...나를, 우리를 이리 놀래킬 만큼 정이 깊으셨소, 벌써?”
“...그래. 혈교놈들만 아니었으면, 첫째를 낳는 건 본녀였을 게다.”
“허어...”
힘이 쭉 빠진 듯 터덜터덜 걸어가 의자에 앉는 운연.
그녀가 방금 무진의 손에 잡혔던 손을 바라보았다.
‘깨끗하군...’
한 치의 힘의 낭비도 없이 정확한 배분으로 자신의 초식을 무마한 것이다.
저 육중해보이는 시커먼 몸뚱아리로.
‘적어도 나와 동급...’
새파랗게 어린 사내 주제에, 감히.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살짝 열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내 다 인정하지요. 하지만, 백무진이라 했나요.”
“예.”
“그대는 아직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래서 운연은, 그리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나를 이기세요. 무인 대 무인으로. 지면 깔끔하게 승복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