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연무장.
슬슬 배꼽시계가 울릴 즈음, 혜원각으로 몇몇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검을 패용하고, 태극문양의 도포를 입은 무당파의 실세들.
‘진짜 남자는 하나도 없네.’
이 세계가 보지밭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된다.
아무튼, 그늘진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누군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수수한 인상의 여자.
우의각주 이설이었다.
“아, 우의각주님.”
“반갑소, 백 소협.”
이번 대결에는 각주급, 그러니까 적어도 장로 정도의 배분을 지닌 인원들이 참관을 위해 올라왔다.
아래쪽의 속가제자나 평제자들에게 보여줄 순 없는 대결이니까.
‘누가 지든 간에 면이 상하지.’
소율의 제자인 내가 져도 별로고.
장로들이 떼거리로 지면 그건 더 답이 없다.
그렇기에 입막음이 확실하고, 무당에 뼈를 묻은 인간들만 데려온 거지.
사실 안 불러도 상관없지만, 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다들 불러냈다.
“가져오셨습니까?”
“네. 며칠간 정말 숙고해서 시안을 짜보았소만... 마음에 드실지.”
그녀가 행낭에서 커다란 도포를 꺼냈다.
척봐도 여리여리한 제자들이 아닌, 나를 위해 준비된 듯한 무지막지한 사이즈.
이어서 우의각주가 도포를 넓게 펼쳐냈다.
“흠흠, 보이시오?”
“네, 잘 보입니다.”
그중에서도 등의 정중앙, 무당의 상징이 박힐 자리에.
태극과 스페이드가 오묘하게 결합된 문양이 보였다.
“오... 괜찮네요.”
“그렇소? 그렇다면 다행이오만...”
“아주 마음에 듭니다. 역시 우의각주님다운 실력이에요.”
“후훗... 감사하오.”
특출나진 않았다. 그냥 Q자 가운데에 태극문양을 박아넣은 모양.
그래도 이 정도면 불평불만을 감수하고 이거 입으라고 밀어붙일만 했다.
“제가 패배하면 영영 못 쓸 수도 있으니 일단은 잘 간수하고 계시죠.”
“어허, 벌써부터 약한 소리더냐. 이놈아.”
혜원각에서 세령과 함께 걸어오는 소율.
새벽부터 정액을 듬뿍 싸질러줘서 그런가, 피부가 반들반들한 것이 보였다.
“아, 태사부.”
“오셨습니까, 장문인.”
“이건 뭐... 하, 기어코 만든 게냐?”
“크흠...”
우의각주가 들고 있던 도포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는 그녀.
세령이 쪼르르 달려와 옷을 건네받았다.
“왜요, 스승님. 무진한테 참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저놈이 너고 본녀고, 무당의 인원들을 죄다 저 옷으로 입힌다는 거 아니더냐.”
“음... 그래도, 여기. 태극이 그려져 있네요.”
Q자 한가운데 박힌 자그만 태극 문양에 소율이 짜게 식은 표정을 했다.
은근 꼰대끼가 있는 소율로서는 영 탐탁치가 않은 모양이었다.
“...넌 무당의 제자가 맞느냐?”
“그럼 스승님은 입지 마세요. 저랑 무진만 입을 테니까요.”
“응...?”
순식간에 도태된 소율.
세령의 허리를 꼬옥 끌어당기며 부드럽게 입술을 맞췄다.
“우리 둘만 입을까요 세령?”
“네. 하양이 것도 만들어요.”
“그거 좋네요. 우의각주님?”
“아...”
사타구니를 툭툭 두드리는 내 손짓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얼마 안 있어 소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 본녀가 언제 안 입는다고 했느냐!!”
성큼성큼 다가와 도포를 홱 낚아채는 소율.
멀뚱히 서있는 내게 이리저리 맞춰보더니, 이내 헛기침을 해댄다.
“...큼, 잘 어울리는구나.”
“입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흥, 밤에 하는 것 보고 생각해보마.”
아침에 좀 져줬더니 그새를 못 참고 기어오르는 그녀.
슬쩍 손을 뻗어 말랑한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쥐어짰다.
“아읏... 보, 보는 눈이 많지 않느냐...”
“저는 더한 것도 할 수 있는데. 밤까지 기다리실 필요 있습니까.”
짧은 치맛자락 안으로 보드라운 비부를 간질이자 입술을 깨무는 소율.
필사적으로 내 손을 밀어내려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알았다. 입으면 될 것 아니더냐...”
“잘 생각하셨습니다.”
“흐으... 못된 놈. 자, 장소를 좀 가리면서 하거라...”
“그럼 이건 뭡니까?”
소율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붙였다 떼며 끈적하게 늘어지는 실타래를 보여줬다.
달콤하면서도 살짝 비릿한, 발정난 암캐의 맛.
역시 가장 오랫동안 따먹은 만큼, 소율은 거의 만지면 만지는 데로 애액을 흘리는 음란한 몸뚱아리가 됐다.
“본녀는 모, 모르느니라.”
“흠, 알겠습니다.”
부끄러운지 시선을 홱하고 돌리는 그녀.
슬슬 골리는 건 됐다 싶어 시선을 돌렸다.
연무장 반대편엔 장로들을 위시한 각주들이 있었다.
오늘 싸우게 될 상대는 차례대로 삼장로 혜민, 이장로 운휘, 일장로 운연.
‘별명이 야차였다라...’
어제 그 성깔을 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장로직에 나이가 쌓이니 자연히 성질이 죽은 거려나.
그러다 곧, 장로 하나가 다가와 소율에게 고개를 숙였다.
“장문인, 슬슬 시작할까 합니다.”
“알겠네. 곧 올라가지.”
“예.”
심판은 소율이 맡기로 했다.
외인에게 맡길 일도 아니고, 강기를 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중재와 심판이 가능한 건 그녀뿐이니까.
도포 자락을 매만지며 최대한 맨살을 가리던 소율이 내게로 다가왔다.
내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며 말을 거는 소율.
“기어코 여기까지 왔구나.”
“다 태사부 덕입니다. 그날 밤부터 말이죠.”
소율 또한 그날밤을 떠올렸다.
소중한 것을 줘버린 그날. 한 명의 여인이 되었던 날.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마음속 깊이 그의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크흠. 본녀가 어쩌다 네놈같은 상변태에게 코가 꿰여서는...”
“그날 절 덮친 건 태사부셨습니다.”
“...흥! 네놈 탓이니라.”
그대로 휙 몸을 돌리는 소율.
연무장으로 올라가기 전, 그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꼭 이기거라. 본녀의 사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면 안되니까 말이다.”
소율을 보내고, 가볍게 몸을 푸는 사이 다가온 세령.
그녀가 내 목덜미에 난 생채기를 부드럽게 쓸어냈다.
“준비는 다 했어요?”
“네. 만전이에요.”
“흐응... 정말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녀.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다시 물어온다.
“정말로 만전이에요, 무진?”
소율이 의도적으로 낸 생채기로 확실히 경각심도 올라갔고.
몸은 그 어느 때보다 최상이었다.
대체 뭐가 부족하다는...
“아하.”
“그쵸? 뭐가 빠졌죠?”
“이리 와요.”
“헤헤, 네에~.”
내 품에 쏙 안겨드는 세령.
이어 목덜미를 쭈욱 잡아당기더니, 진하게 입을 맞춰왔다.
꾸욱 도장을 찍듯 입술을 부비고는 발게진 얼굴로 속삭여주는 그녀.
“승리를 기원하는 서, 선녀의 입맞춤이에요.”
“무조건 이겨야겠네요.”
“그, 그리고 하양이도... 아빠가 꼭 이길 거래요.”
세령이 그 말과 함께 이번엔 배를 살짝 내밀었다.
완만하게 휘어진 곡선과 앙증맞게 들어간 배꼽,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빠 이기고 올게.”
“네~.”
하양이 목소리까지 흉내 내는 세령.
괜스레 부끄러워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갔다올게요.”
“네, 다녀와요 무진.”
*
해가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의 정오.
무당의 연무장에 세 명의 사람이 서있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시원한 복장을 입은 푸른 머리칼의 여인.
담소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긴말은 하지 않겠네. 살초는 불가. 항복 선언 시 패배로 간주하겠네. 둘 다 동의하는가.”
“예.”
“예, 장문인.”
짧막한 대답에 나를 노려보는 삼장로, 혜민.
아마 운자배를 제외하고는 상위권에 드는 실력자일 테지.
‘장로를 꼭 무력으로 뽑는 건 아니지만, 아예 떨어져도 안되니까.’
그런 고로, 그녀는 빠르게 퇴장해줘야 했다.
적어도 내 실력이 운자배와 동급 이상이란 걸 보여줘야 하니까.
“또한 어느 한쪽이 진정 위험하다 싶으면 본녀가 개입할 걸세. 그럼, 준비들 하게나.”
평소와는 달리 엄숙하게 무게를 잡는 소율의 목소리.
밤마다 헐떡이던 야릇한 교성과는 너무나 달라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웃음이 나오시나 보오, 백 소협.”
그때 들려오는 삼장로의 착 가라앉은 불퉁한 어투.
양옆으로 뚝뚝 목을 풀어주며 답했다.
“예. 곧 무당이 제 아래에 들어오게 될 테니까요.”
“건방진... 천년 무당의 정수를 얕보다간 큰 코 다칠 것이오.”
차분하게 태청검법의 기수식을 잡는 삼장로의 모습.
나 또한 주먹을 그러쥐며 진각을 밟았다.
“제 생각에 삼장로께선 반나절이면 충분할 듯 싶습니다.”
“...그게 무슨?”
“아니, 그것도 길려나.”
의문을 표하면서도 집중을 잃지 않는 삼장로.
곧 소율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럼... 대결, 시작.”
서로에게서 올올이 풀려나오는 기세로 팽팽하게 휘몰아치는 연무장의 공기.
“백 소협, 이상한 헛소리로 미혹을 불러일으킬 생각이라면...”
삼장로가 서서히 내기를 끌어올리며 첫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로, 가볍게 한 발 내딛었다.
콰득!
일순, 연무장의 판석이 움푹 패이며 삼장로의 바로 앞에 도달했다.
“후웁.”
지금 필요한 건 한 방의 파괴력.
흐름이고 나발이고 전부 깨부술 묵직한 정타.
파륜의 고리들을 사방팔방으로 회전시키고, 응축되는 힘을 하나의 방향으로 모았다.
심즉동. 내가 마음먹은 순간 그 뜻대로 움직이는 묵혈강기.
‘죽이지만 않을 수준으로...’
아직 나를 바라보지조차 못하고 있는 삼장로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의 검에 푸른 내기가 다 덧씌워지지도 않은 이 찰나의 순간.
“큭...?”
본능적으로 앞을 막아서는 삼장로의 검에.
칠흑으로 감싸진 주먹을 그대로 내질렀다.
콰아앙!!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거칠게 밖으로 튕겨져나간 삼장로.
나 혼자만이 남은 연무장이 정적으로 뒤덮였다.
“흠.”
가볍게 손을 털며 소율을 바라봤다.
그녀조차도 이렇게 한순간에 결착을 낼지는 몰랐는지 조금 당황한 얼굴.
잠시 뒤 연무장의 끝자락, 부서진 벽에서 누군가 빠져나와 바닥을 굴렀다.
쪼르르 달려나간 운연 쪽의 일행 하나.
“...기절했습니다.”
역시, 반나절은 고사하고 30분이면 자지로 굴복시킬 수 있는 수준.
나는 살짝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하며 무심하게 내뱉었다.
“다음, 이장로님 나와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