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무진 승, 혜민 패.”
소율의 선언에 운연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벌어진 눈앞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갔다.
‘빠르다.’
방금의 그 일격을 제대로 본 이가 얼마나 있을까.
‘잘해봐야 장문인과 나, 그리고 운휘 정도려나.’
사내의 공격은 그 어떤 것보다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를 자랑했다.
그리고, 담긴 힘마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저 빠르고, 강하다.’
장문인의 시작 선언과 동시에 혜민의 앞에 도달.
뒤쪽의 연무장 벽까지 날아갈 정도로 강력한 내력이 담긴 주먹에.
무당의 장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심지어 혜민의 검은, 깔끔하게 두쪽이 나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몸집과 근육으로 보아 외가기공을 주로 익힌 듯 했는데...’
내력의 발산과 이동이 거진 동시에 가까울 정도였다.
하긴, 아까 아침의 가벼운 떠보기에서도 기민하게 반응한 사내다.
오히려 이정도도 해주지 않는다면 실망할 뻔했다.
그때, 우르르 몰려오는 다른 각주들.
“이, 일장로님. 저 망할 사내가 무언가 수를 쓴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어찌, 삼장로께서 단숨에...”
태연하게 이장로를 부르는 사내의 모습에, 다른 각주들이 당황한 얼굴로 물어왔다.
그저 세월과 배분이 쌓여 직함을 단 자들.
그들의 수고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럴 때에는 나서지 않는 것이 좋았다.
“보지 못했다 하여 사실을 부정하지는 마시오들.”
“하, 하지만...”
“착석들 하시게. 아직 대결이 끝나지 않았으니.”
좋게 타이르려 했으나, 그들의 자존심이 아직 용납지 않는 듯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 멈추어야 합니다. 무언가 보지 못하도록 사술을 썼겠지요!”
“맞습니다. 이런 헛짓거리는 당장 중단시켜야 합니다!”
“감히 사내 따위가 저리 나대다니요. 분명 장문인께 아양을 떨어...”
그저 부정하기 위해서라면 하지 말아야할 말마저 입에 담는 모습.
운연이 가볍게 살기를 피워냈다.
“닥치게.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죄, 죄송합니다.”
“그, 그것이... 제, 제가 망언을...”
단숨에 머리를 숙이고 비굴하게 조아리는 이들.
문득, 그들의 모습과 당당하게 연무장에 서있는 사내의 모습이 대비되었다.
‘분명, 곤륜노로 왔었지...?’
과정이 어떠했든 간에, 그는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하찮은 노예에서, 장문인의 제자까지.
심지어 사내가 노리는 것은 더욱 더 위인 듯 했다.
‘실로 탐욕스러운 자.’
그래서 아래만 보고 있는 이들이 더욱 더 무가치하게만 느껴졌다.
“한 번만 더 방정맞게 입을 놀리면... 그때는 집법각에서 볼 것이오.”
“아, 알겠습니다...”
도(道)를 닦는 도사들은 항상 무욕(無慾)하라 하지만.
무(武)를 수행하는 무인들은 탐욕스러워야 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사내는 남달랐다.
장문인, 아니 천극혜검 담소율이 저자의 재능을 허투루 보았을 리도 없고.
만령곡에서의 일도, 소문의 반만 진실이라도 사내는 ‘진짜’였다.
무릇 죽음을 목전에 두면 흔히들 대오각성을 한다고 하지만.
그역시 재능과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역대 남고수들 중에 절대에 오른 자가 있던가?’
자신이 알기로 혈교의 우호법 양광.
그자말고는 중원무림에 절대지경의 남성이 나타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저 사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아... 참자꾸나. 아직 내 차례가 아니니.”
파르르 떨리는 손을 살며시 쥐어냈다.
오랜만에 맛보는 투지와 호승심.
운연의 열띤 시선이, 연무장을 향했다.
*
‘뭐지 시발?’
아까부터 강렬한 시선이 느껴지더니, 그 원인은 바로 운연이었다.
입맛까지 다시며 나를 노려보는 운연.
‘그렇게 내가 마음에 안 드나? 아니면 다른 의미?’
원활한 장악을 위해 장로들도 전부 따먹어 주기는 하겠지만.
저런 부담스러운 눈빛은 사양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는가?”
“아, 이장로님.”
그때 연무장에 올라온 운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쩍 밝아진 얼굴의 그녀.
집법각주 일도 후임을 알아보고 있다고 하던데.
그녀가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불렀다.
“백 소협. 그대에게 많이 빚진 몸이지만, 그래도 대결은 대결. 후회 없이 싸워보세나.”
“저 역시 환영하는 바입니다.”
확실히 만령곡에서의 사건 이후 내게 부드러워진 그녀.
운휘에겐 대딸을 한 손으로 밖에 받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아직 좌수가 익숙치 않아 소협에게 부족할 수도 있겠으나, 최선을 다해보겠네.”
“한 수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포권을 올리고, 서로 자세를 잡았다.
조용해진 우리를 보고 슬쩍 손을 들어올리는 소율.
“이차전, 시작.”
이번에도 무심하게 떨어지는 그녀의 시작 선언.
역시나 단숨에, 운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콰드득...!!
“정말, 빠르구려...!”
한쪽 팔이 없더라도 절대는 절대.
삼장로와는 다르게 할만하다는 얼굴로 막아내는 운휘의 검이 보였다.
“후웁!”
카앙! 카가가각...!!
허나 이어지는 연격을 어렵사리 막아내는 운휘.
파륜으로 인해 미친 듯한 반탄력을 지닌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흘려낸다.
동시에 그와 맞붙을 때마다 지잉하고 울리는 그녀의 검.
운휘의 눈동자가 검에 미세하게 난 실금을 알아챘다.
‘강기를 뚫어내는 충격이라니...!’
어째서 삼장로의 검이 그리 허무하게도 부서졌는지 알 수 있었다.
평범하게 받아내서는 안되는 류의 공격.
운휘가 깊숙이 들어온 그의 주먹과 힘겨루기를 하며 물었다.
“만령곡에서, 대체 뭘 배운 것이오?”
“나중에 침소에서 알려드리지요.”
“뭣...?!”
당황한 얼굴의 운휘.
나는 그녀의 검을 부서트리겠다는 일념으로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하늘이 내린 축복받은 몸뚱아리.
내가 원하는 데로 움직이는 극상의 신체.
파둔으로 공간을 점거하고.
순간순간 느릿해지는 검속을 따라잡으며 강철을 부숴냈다.
“크흑...!!”
“겨우 이것 뿐입니까, 이장로!!!”
캉!! 카아앙!!
운휘의 검 중앙 부분을, 쇠로 담금질하듯 미친 듯이 두들겼다.
그녀가 일부러 다른 쪽으로 검을 피해내도, 상처를 감수하면서까지 검에 주먹을 꽂았다.
“너무 뻔히 보이는 수작 아니오!!”
“알면 막아보시죠!!”
“큭...!”
검을 타고 올라오는 강렬한 진동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그녀.
우수라면 몰라도, 아직 어색한 좌수로는 힘을 털어내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역시 제 실력을 못내는군.'
운휘의 검마저 부러트리고.
다음에 올 운연의 검 또한 부러트린다.
‘그냥 이기면 멋이 없지.’
도전과제가 있어야 좀 더 있어보이지 않겠는가.
거의 키스할 듯 가까워진 거리를 벌리고, 살짝 몸에 힘을 풀었다.
“하압!”
뒤로 물러난 내게 먼저 들어오는 운휘.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타점을 조절하기로 한 건가?
‘소용없어.’
이미 눈에 보일 정도로 퍼진 거미줄.
사선으로 쾌속하게 내려오는 운휘의 검을, 슬쩍 피해내며 발끝으로 찍어눌렀다.
“읏?”
주먹만 쓰던 새끼가 느닷없이 발재간을 보이니 커다래진 그녀의 눈동자.
바닥에 박힌 검의 중앙을 강하게 걷어찼다.
파삭...!
“하아, 하아... 가차 없으시오.”
반으로 뚝 부러진 것도 아닌, 문자 그대로 가루가 되어버린 그녀의 검.
다급히 뒤로 물러난 운휘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좀 공평해졌군요. 주먹 대 주먹으로.”
“하핫, 그대답소 백 소협.”
차분히 숨을 고르며 내기를 끌어모으는 그녀.
직감적으로, 대결의 끝이 다가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피차, 지지부진하게 끌고 싶진 않잖소.”
“보여주시죠. 받아내겠습니다.”
“역시 양광을 물어뜯은 용답소이다!”
곧, 그녀의 앞으로 막대한 양의 내기가 응축되는 것이 보였다.
나 또한 양광을 반병신으로 만들었던 광룡을 손에 담기 시작했다.
“공허탈백참.”
이내 하나의 검이 되어가는 운휘의 내력.
시퍼런 검 한 자루가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강기를 응축하고 또 응축해서 벼려낸, 올곧은 살의가 담긴 검.
‘잘못하면 내가 당하겠구만.’
하지만 오히려 희열이 들끓었다.
마땅히 부술만한 가치가 있고, 내가 취할만한 여자라는 만족스러움이 들었다.
“크흐...!”
연무장은 서로가 뿜어낸 기파로 살벌한 폭풍이 일어났고.
소율마저 조금 물러서 바깥으로 최대한 기막을 펼쳐냈다.
“모두 단단히 내력을 끌어올리거라!”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시선을 거둬, 오직 운휘가 만들어낸 검을 보았다.
“양광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낸 검이오.”
“광룡만천. 저 또한 양광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냈습니다.”
“아하핫!! 좋구려!!”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일순, 둘 사이의 거리가 눈동자에 비친 서로를 알아볼 정도로 가까워졌다.
“흐읍!”
“흐아아!!”
짧은 기합성과 함께 충돌하는 검 한 자루와, 사납게 휘몰아치는 용.
연무장 가운데가 움푹 패이며,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콰아아아앙!!!
“...무진!”
지아비를 부르는 애타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뿌옇게 일어난 먼지구름 사이로, 검게 물든 용 한 마리가 승천하듯 날아올랐다.
일순 정적에 빠진 연무장.
“아...”
결과를 직감한 운연의 탄식과 함께, 먼지가 한 곳으로 빨려들어갔다.
그 가운데엔 소율이 있었고.
당당히 서있는 검은 피부의 사내가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하아, 하아... 내, 패배요.”
한쪽 무릎을 꿇고 쓰러진 운휘.
그녀가 울컥 죽은 피를 토해냈다.
"쿨럭... 크..."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소... 그보다 아까 한 말. 그게 무, 무슨 소리요?”
“백무진 승, 운휘 패!!”
내가 뭐라고 답을 주려는 순간, 소율이 희번득 눈을 부라리며 나와 운휘를 떼어냈다.
한 마디만 더하면 아주 혼쭐을 내주겠다는 얼굴.
짐짓 화났다는 표정을 보자 웃음이 터져나왔다.
“질투하십니까?”
“대체 어, 어디까지 손을 댈 셈이더냐!”
결국 장로들 쪽에서 누군가 나와 운휘를 부축하고.
내게 찰싹 달라붙어 앙탈을 부리는 소율.
믿고있던 운휘가 패배한 충격인지 우왕좌왕하는 장로들을 보며 속삭였다.
“가능하면 전부 다, 제 좆맛을 보여줄 겁니다.”
“이, 이... 못돼먹은 놈!!”
“사랑한다는 말을 뭘 그리 돌려하시는지.”
“자, 잠깐... 갑자기... 으웁, 움...!”
쉽사리 가시지 않는 희열에, 참지 못하고 소율과 진하게 입을 맞췄다.
다른 새끼들의 시선이고 뭐고.
지금은 입술이라도 소율을 탐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어, 엄맴매..!!! 저, 저게 무슨!!”
“미친 것 아니오!!!”
“이, 일장로님, 당장 말리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아주 그냥 게걸스럽게 입을 맞추는 둘을 보며.
운연이 나지막이 뇌까렸다.
“...청춘이구려, 장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