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사내는 쉬지 않고 찾아왔다.
사내에게 잡혀갈 때마다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동생.
그때마다 괜찮다며, 되려 자신을 위로해주는 착한 아이.
며칠 동안 당하린의 죄책감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
“이, 이 시간엔 무슨 일이죠?”
“일주일 동안이지, 제가 아침에만 온다는 소리는 없었습니다.”
“언니...”
“안돼, 잠깐...”
늦은 저녁, 가령은 미묘한 얼굴로 사내의 손에 이끌려 옆방으로 사라졌다.
-아하악!! 아읏, 하앙!!
-가앗... 무진, 무진 공자앗...!!!
쉴 새 없이 뱉어지는 천박한 울음소리.
백 소협이라며 거리를 두던 호칭은 어느 샌가 무진 공자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바뀌었고.
동생의 신음소리에는 애틋하고 달콤한 기운이 한가득 섞여들어 있었다.
‘옷도, 표정도...’
항상 맹의 단정한 복식에 맞춰 깔끔하던 옷도.
자신을 보며 해맑게 웃던 그 얼굴도.
전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어디서 구해온 옷인지 치맛자락은 짧고 하늘하늘하게 변했고.
언뜻 비치는 안쪽엔 비부를 가리는 속곳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내를 바라보는 눈빛.
그 눈빛이 명백히 달라져 있었다.
이미 사내의 여인이 된 소소유나 백세령처럼.
그 남자에게 굴복한 패배자의 눈빛이었다.
“...하루만, 하루만 더 참으면 돼...”
그러면 분명, 다시 옛날의 그녀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의동생이자, 자랑스런 당가의 무인인 이가령을.
달칵.
“아, 가령.”
“언니... 흑...”
“가령?”
사내와의 정사를 끝내고 돌아온 가령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약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언제나, 힘들어도 씩씩하고 당찬 모습이었...
‘...아니, 내가... 모른 척한 거야.’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씩씩하고 당차고, 굳센 아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언니, 언니... 흐끅, 너무 힘들어요...”
가령이 털썩 쓰러지며 자신의 품으로 안겨왔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옷섶을 적시는 가령의 눈물에 가만히 송곳같은 죄책감을 곱씹을 뿐.
한참을 울고난 뒤, 진정한 듯한 그녀가 다 쉬어간 목소리로 말해왔다.
“언니... 부탁이, 있어요...”
“...말해봐요. 뭐든, 뭐든 내가 들어줄게요.”
“하루... 남았어요, 이제. 하루만...”
“응응... 하루만 더 버티면, 아...”
가령의 입술이 떨어지기 전에, 그녀가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버티고 버티다, 지쳐 망가지기 전에.
도와달라는 부탁.
가령이 잘게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울먹였다.
“언니가... 단 하루만, 도와주세요...”
“...”
“미안해요, 언니. 언니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는데, 저... 더 이상은...”
“아니에요, 가령.”
애초에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자신이 책임졌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량한 자존심으로 남에게 미뤘던 것이고.
“사과할 필요 없어요... 내일은, 내가 그자를 상대할게요.”
고작 감정 따위에, 평생 함께할 아끼는 자매같은 이를 내던진 것은 자신이었다.
한참이나 늦었지만, 이제라도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쓰레기 같은 놈에 대한 역겨움보다.
눈을 돌리고 귀를 막은 자신에 대한 역겨움이 훨씬 컸다.
그러니, 이젠 자신이 가령의 아픔을 덜어주어야 할 때.
“헤헤... 고마워요, 언니...”
“...미안해요, 가령...”
자신은 저런 눈물 젖은 사과 따위 받을 자격도 없는 년인데.
“내가... 꼭, 대가를 치루게 만들게요.”
으득, 가령이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지난 엿새간 하도 씹어댄 탓에 다 헐어버린 입술.
비릿한 피맛과 아찔한 고통을 곱씹으며 다짐했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몸으로 만들어주마, 백무진.’
독으로 죽이는 것쯤이야, 암혈독을 사용하면 쉬웠다.
내공 그 자체가 독인 암혈마라신공은 증거도, 시체도 남기지 않고 사내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허나 그래서야... 나도, 가령도... 스승님도. 전부 위험해지겠죠.’
자신 하나 희생해서 일을 끝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내의 뒤에는 천극혜검이라는 무림의 거인이 버티고 서있었다.
쓰레기의 암캐가 되어버린 여자지만, 무림은 그런 진실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어떻게 깎아내려도, 정파에 단 둘 뿐인 절대지경의 고수.’
심지어 혈교의 위협마저 다시 수면으로 드러난 시기에.
고작 당가의 소가주 신분인 자신은 그녀가 찌그러지라면 찌그러져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차분히 공을 들여 복수를 완성해 나가야 했다.
자신의 짓인줄은 생각지도 못하게.
천천히 혈맥을 끊고, 근육을 녹이고, 머릿속을 뭉그러트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로 만들어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는 것이다.
“...가령을 위해서라면, 내 몸 하나쯤. 포기할 수 있어요.”
그토록 싫어하고 혐오하는 사내지만.
백무진이라는 자는 그중에서도 최악으로 혐오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닳고 스러질 몸뚱아리 따위에 집착해 복수를 미루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깟 천박한 짓거리. 몇 번이고 받아주도록 하죠.’
그 쓰레기가 자신의 몸을 탐하면 탐할수록.
점점 더 깊고 끔찍한 수렁으로 빠져들게 될 테니까.
*
“계십니까.”
오늘도 당당하게 당하린의 숙소로 찾아왔다.
이가령이 과연 맡겨준 임무를 잘 완수했을지.
‘알아듣긴 했겠지?’
폭력적인 쾌락으로 눈은 풀리고, 입에선 침을 질질 흘리는 그녀에게 내렸던 명령.
딱 하루만, 이라며 당하린을 내게 보내라.
다행히 그녀가 잘 전달한 것인지, 여느때처럼 연녹빛 궁장을 차려입은 당하린이 등장했다.
“가령은요?”
“...안 올 거에요. 가령인.”
“흠.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씀드렸었는데. 이래서야...”
“대신.”
성큼 내게 다가와 표독스런 얼굴로 올려다보는 당하린.
저 실눈 밑에 숨어있을 녹색 눈동자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내가... 대가를 치룰테니, 가령은 놔두시죠.”
“흠...”
덥석 받아먹으면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괜시리 고민하는 척을 했다.
애초에 당하린이 벌을 받는 게 맞는 거긴 하지만.
‘어디까지 각오하고 왔나 볼까.’
그냥 나한테 박히는 거만 생각하고 왔으면 살짝 미안한데.
물론 이가령처럼 하루도 안 쉬고, 머릿속에 자지밖에 모를 정도로 처박아주면 당하린도 내게 굴복할지 모른다.
‘그걸로 꺾을 수 있으면 이렇게 빙빙 돌아가지도 않았지.’
그 무엇보다... 이 여자는 상당히 위험하니까.
나와 내 여자들에게 독 같은 건 쓰지도 못하게 철저히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몸과 정신 모두.
“옆방에 계셨으니 대가가 뭔지는 아실 텐데요?”
“...네.”
“그리고 갑자기 존대라니... 슬슬 자기 잘못이 뭔지 이제야 파악하신 겁니까? 마지막 날이나 돼서야 나오시고, 염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일부러 살살 긁어주며 그녀를 건드렸다.
싫어하는 인간 얼굴을 보면 있는 욕 없는 욕 다 나올텐데, 여기서 조금 부추겨 주면.
“큿... 고작, 말실수 하나로 너무...”
“하.”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쏘아붙였다.
“고작 말실수요? 당 소저는 과거의 혈사를 막아내고 수많은 무림인들을 구한 영웅이자, 무당의 지존이신 분을 한낱 창녀로 비하하신 겁니다. 그런데도 뭐가 그리 당당한지 모르겠군요.”
“...”
“그리고 정작... 장문인께서는 소저에게 제대로 된 사과 한 마디 못 들으셨는데, 그건 아십니까?”
이어진 마지막 말에 당하린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갔다.
이가령의 일에 시선이 쏠려 정작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한, 중대한 실수.
여기서 올가미를 한층 더 조이며 그녀를 압박했다.
“제가 왜 일주일간 뺀질나게 찾아왔겠습니까. 스스로 장문인께 찾아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겠다. 이 한 마디를 먼저 하셨더라면, 가령 소저가 이리 길게 벌을 받지도 않았을 텐데요.”
“그, 그건... 그때, 죄송... 하다고...”
“그럼 저도 독선님을 욕하고 죄송하다, 한 마디하면 되겠군요.”
“큭...”
잔뜩 일그러지는 얼굴.
즐거운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물론 덕분에 참한 여인을 실컷 안았으니, 그건 감사드립니다.”
“이, 이...!”
차분함과 냉정을 잃은 당하린은 요리하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대놓고 따먹게 해줘서 고맙다 놀려도 그저 주먹만 움켜쥘 뿐이니까.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흠칫하고 숨을 들이키는 당하린.
“당장이라도 용서를 빌러 가시죠. 장문인께서 받아주시겠냐...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사문에 더 이상 욕을 보이고 싶지 않으시다면, 지금이라도 가셔야죠.”
내 말에 이가령을 생각하는 듯 흘깃 숙소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답하는 그녀.
“...장문인께, 용서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좋습니다. 가시죠.”
미련없이 등을 돌려 혜원각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아침 먹고 사라진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멍하니 각 뒤편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소율.
‘역시 우리 소율이.’
군청빛 머리칼이 살랑살랑 휘날리고.
도포자락 너머로 언뜻언뜻 하얀 살결이 비치는 게 참 보기 좋았다.
“큼큼.”
그렇게 잠깐 그녀의 검무를 감상하다 입을 열었다.
“태사부, 데리고 왔습니다.”
“왔느냐? 뭘... 아.”
“...장문인.”
“우리 고고하신 정절단주께서 오셨구려.”
내기를 쓰지 않았던 듯 살짝 땀을 흘리고 있는 소율.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며 말했다.
“용서를 구하고 싶답니다.”
“정말... 계집을 취하겠다는 네 의지에는 혀를 내두르겠구나.”
“그러니 색마 아니겠습니까.”
“미친놈.”
소곤거리며 욕을 하곤 가볍게 입을 맞춰주는 그녀.
땀과 타액이 섞여 짭쪼롬한 맛이 나는 입술을 게걸스럽게 핥아줬다.
"츄웁, 음... 쪼오옵..."
당하린은 일말의 관심조차 안 주고 이어진 입맞춤.
번들번들해진 입술을 내게 부비며 소율이 입을 열었다.
“푸흐...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예. 진즉 찾아뵈어 용서를 빌었어야 했는데, 이 또한 늦어진 점 또한... 사과드립니다.”
“안으로 들지.”
고개를 푹 숙이는 당하린의 포권은 받아주지도 않고 안으로 향하는 그녀.
동네 똥강아지 마냥 쫄래쫄래 소율의 뒤를 따라갔다.
“당예인이 알면 경을 치겠구나.”
“괜찮습니다. 그때쯤이면 제 자지를 더 좋아하게 될 테니까요.”
슬쩍 발걸음을 늦추며 바지 위로 자지를 쓰다듬는 소율.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본녀의 것이니, 조심하거라.”
아니, 자지는 내 건데...
아무튼, 응접실로 사용하는 방에 나와 소율, 당하린이 도착했다.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앉기는커녕 곧바로 무릎부터 꿇는 당하린.
“흠.”
내 허벅지에 엉덩이를 가져다 댄 소율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암캐처럼 자지에 엉덩이 비비고 있는 주제에, 살벌한 기세를 내뿜는 소율.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응접실 안을 싸늘하게 가라앉혔다.
“용서를 구하고 싶다. 왜? 한낱 사내한테 굴복한 창년한테 당가의 소가주가 뭣하러 사과하느냐?”
오... 우리 소율이, 뒤끝이 장난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