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123화 (123/230)

마치 황제와도 같은 옥좌에, 여인이 누워있었다.

치렁하면서도 불길한 색의 적발.

요사스러운 기운을 띠는 적안의 여인.

반쯤 헐거벗은 그녀의 자태에도 대전 안의 그 누구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암... 그래서, 변명은 끝났나요.”

맑으면서도 탁한, 사람을 홀리는 듯한 미성이 대전을 가득 채웠다.

허나 그 지루한 듯한 옥음(玉音)에, 안쪽에 있던 모두가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떨어댔다.

“죄송, 하옵니다... 하지만, 그자는 분명 만령곡으로 떨어졌으니...”

그에 맞서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낸 자는 늙은 노인이었다.

넓은 대전의 한가운데에 오체투지한 노인.

그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작은 체구였으나, 얼굴은 노인의 그것처럼 주름져 있었다.

또한 평소에 즐거이 입었을 붉은 장포는 다 해져 걸레짝이나 다름이 없었다.

“우호법이 개처럼 기어서 교로 오는 동안, 그 두 사람이 멀쩡히 살아돌아왔다네요. 더더욱 강해진 상태라더군요.”

“...”

할말을 잃어버린 노인은 그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주인된 자의 명을 따르지도 못하고, 정보조차 틀렸으니 남은 건 벌뿐이었다.

“우호법.”

“예, 교주님...”

“전대 교주께서 천명을 다하신 후, 분명 은인자중하라 하지 않았나요. 중원의 그 두 노마녀(老魔女)가 더 약해질 때까지.”

“제, 불찰이옵니다. 자비를...”

“자비라... 아하하하.”

명백한 비웃음이 옥구슬처럼 또르르 굴러가 대전에 울려퍼졌다.

그와 함께 주변을 에워싸는 진득한 살기.

“패배한 개 주제에 자비를 논하다니요, 우호법.”

부복한 노인은 죽음을 직감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곧 다가오리라 예상했던 죽음은 오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약간의 흥미가 돋힌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우호법을 죽이는 건 여반장이지만, 그 사내가 궁금하네요.”

“백무진, 이라는 곤륜인을 말씀하시는 것이온지...”

“우호법이 그리 강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호법을 이겼잖아요?”

노인은 여인의 목소리에 아무런 답을 주지 못했다.

자신 또한 절대에 올라 세상을 오시하는 고수지만, 눈앞의 여인에게는 단 몇 초도 버티지 못하리라.

“거기다 세상에, 진즉에 늙어죽었을 우호법과는 달리... 파릇파릇한 사내더군요.”

“...예. 약관은 넘었다 보고 있습니다...”

“흐응... 그와 비교하면, 나는 어떻죠?”

“비교가 불가(不可)하옵니다. 어찌 미천한 벌레와 혈세의 주인을 비교하겠습니까. 교주님의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할 자이옵니다.”

“마지막 신위(神位)는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는데요?”

그랬다. 흑색의 사내가 행한 마지막 공격은 가히 신위(神位)에 가까웠지만.

자신이 섬기는 여인에게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죽음을 앞둬, 전신의 잠력을 쥐어짜낸 것일 겁니다. 그런 미천한 자에겐 신경 쓰지마옵소서.”

“우호법.”

“예, 교ㅈ... 크하악...”

“짜증나게 자꾸 토 달지 마요.”

“죄송, 죄송하옵니다...”

형편없이 떨어진 오른팔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녀가 손을 뻗는 것도, 팔이 잘린 것도 고통을 느끼고 나서야 알아챘다.

“어머, 미안해요. 우호법.”

“아니옵니다... 제 불찰이옵니다...”

“이 욱하는 성격 좀 고쳐야하는데. 하아... 맞아, 봉룡지회가 두달 남았다 했나요?”

“예, 맞사옵니다.”

톡톡톡, 하고 옥좌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오던 교주의 습관.

그리고 이어지는 교주의 행동은, 언제나 교의 모두를 놀라게 했었다.

“재밌겠네요. 우후후후... 분명, 재밌을 거에요.”

*

“깼느냐.”

“...네.”

온몸이 찌뿌둥했다.

목도 타고, 배도 고프고.

조금 기다리자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장문인, 당하린입니다.”

“...흠, 그래. 들어오거라.”

당하린?

방문이 벌컥 열리고, 밥상을 들고 들어오는 당하린이 보였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살풋 붉어지는 뺨.

“기침 하셨나요, 주인님?”

“...”

“도대체 뭔 짓을 한 거냐, 이놈아.”

당하린이 내가 선물해준 옷을 입고선, 총총총 다가와 내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소율의 시선은 신경도 안 쓰는 듯 밝게 말했다.

“진지와 세숫물을 준비해왔어요, 주인님.”

“어... 음, 그래.”

이내 밥을 한술 크게 떠서는 고기 반찬을 올려 호호 불어주는 그녀.

“아, 해주세요, 주인님. 제가 먹여드릴게요.”

“...?”

“독은 없답니다.”

“무슨 꿍꿍이더냐, 정절단주.”

소율의 기세가 당하린을 옭아매는 것이 보였다.

현격한 차이에 딱딱하게 굳은 그녀.

힘겹게 답하는 것이 보였다.

“주인님께서 저를 일깨워주셨어요, 장문인. 미천하고 어리숙하던 당하린을 다시 태어나게 해주신 거에요.”

볼에 홍조를 띠며 답하는 당하린.

나는 소율에게 괜찮다하며 수저와 밥상을 받았다.

“아앗... 제가 먹여드리고 싶었는데...”

“괜찮아. 그보다, 세령이랑 소유는...”

“네놈이 하도 안 깨서 둘이서 산보를 좀 갔다. 본녀는 일을 하다가 이년이 너를 본다고 하길래 찾아온 거고.”

당하린에 이어 셋까지 상대하려니 나도 벅찼나 보다.

요샌 거의 쉬지도 않고 떡치고 수련하고 했으니까.

당하린이 가져온 밥상을 해치우며 소율에게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부탁드린 건...”

“아침에 잠깐 봐주었다. 썩 괜찮은 재능이더구나.”

바로 주서현에 관한 일.

대충 장로급이 맡으려나 싶었는데, 직접 지도해 본 건가.

“근데... 썩 괜찮은 재능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오성도 지능도 범재보다는 훨씬 뛰어났느니라. 세령이에 비하면 조금 부족하긴 해도.”

나는 소율의 대답에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림일통의 주인공 주서진, 아니 주서현의 재능은 천고의 기재라 해도 부족하다.

스스로 무학의 종사마냥 무공을 창안하고, 결국은 그걸로 중원을 제패하니까.

‘나 때문에 원작이 뒤틀리면서 뭐가 바뀌었나?’

아니면 산적들과 있었던 날 동안 무언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어차피 지금 고민해서 바뀔 것도 없고, 우선 밥이나 먹을까 했다.

“...뭘 하느냐?”

“주인님께 봉사를...”

“이따하자, 당하린.”

“주, 주인님...”

내 바지를 벗기려는 것을 막자 대번에 울상이 되는 그녀.

굴복시킨 건 좋은데, 예상외로 강적이 등장했다.

“제, 제 수발에 부족한 점이라도...”

“아니야. 그냥 지금은 괜찮으니까, 가서 가령이랑 놀아.”

“...네에.”

잔뜩 시무룩해진 얼굴로 돌아서는 당하린.

아쉽지만 지금은 자지에 애액 좀 마르게 하고 싶었다.

“잘도 저 독한 년을 노예나 다름이 없게 만들었구나.”

“뭐... 원래 저랬던 거 같으니까요.”

“...그게 무슨...?”

“아닙니다. 그보다 봉룡지회는 어떻게 되갑니까?”

“착실하게 준비중이니라.”

소율과 이야기를 나누며 원작을 떠올렸다.

드디어 코앞으로 다가온 봉룡지회.

‘주인공 띄워주기와 동시에...’

수많은 좆집들이 몰려오는 일대 사건.

영웅은 삼처사첩이란 말처럼, 주인공이었던 주서진도 여자를 많이 거느리고 다녔다.

무(武)에 미쳐서 주인공을 따라다니던 년도 있고.

얼빠라 그냥 같이 다니던 년도 있고.

주인공과 얽혀서 사랑에 빠지게 된 년도 있고.

정작 떡은 안쳐서 내가 욕을 박았긴 하지만.

아무튼 봉룡이 모두 모이는 자리이니만큼 많은 일들이 벌어질 거다.

‘내가 할 건 봉룡의 자리를 얻고...’

덤으로 여자들도 챙기고.

“아, 근데... 세령이랑 소유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크흠... 본녀도 고민이니라. 이런 일은 유래가 없어서...”

찌릿하며 나를 째려보는 소율.

한순간에 봉황 둘이 애를 배고 지상에 내려왔으니.

“아마... 새로 뽑아야겠지.”

“그렇군요. 뭐, 한 자리는 제가 먹겠습니다.”

“못하면 바로 내칠 것이야, 욘석아.”

“하면, 포상이라도 주십니까?”

야릇한 미소와 함께 내 가슴팍을 쓸어내리는 그녀.

어제 그녀에게 물리고 할퀴어졌던 상처가 따끔거렸다.

“네 원하는 데로 하룻밤 본녀를 주겠느니라.”

“에이, 약한데.”

“흥, 오르기나 하거라.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터이니.”

더더욱 이겨야겠고만.

“주 소저는 계속 태사부께서 가르치실 겁니까?”

“싹수가 보이긴 하나... 굳이 본녀가 나서서 가르칠 정도는 아니지. 운휘에게 맡길까 하느니라.”

“그렇군요.”

마침 운휘도 제자가 없는 상태니까.

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기왕 마음 정하신 거 후딱 해치우죠.”

“...응? 본녀랑 좀 더 있으려는 것 아니었느냐?”

“어제 그렇게 하고 또 하고 싶으십니까?”

“이잇... 그런게 아니라, 그냥... 둘만 있고싶다는... 되었다! 이 망할 녀석.”

심통이 난 그녀의 입술을 맞춰 달래주고, 혜원각 뒤편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곧 연락을 받았는지 찾아온 이장로 운휘와, 주서현.

“장문인을 뵙습니다.”

“아, 음... 장문인을 뵙습니다.”

주서현이 어색한 얼굴로 포권을 했다.

이어 내게도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둘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서로를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 불렀네.”

“소개라 하심은?”

“전 제자의 일도 있고, 적적할테니 이장로가 이 아이를 거두는 게 어떤가 싶어서.”

소율의 말에 놀란 얼굴을 하는 둘.

잠깐 고심하는 듯하던 운휘가 물었다.

“저야 괜찮습니다만, 연원도 모르는 아이를...”

“무진이가 중원에 와서 처음 도움을 받았던 아이라 하더군. 산적들에게 잡혀있던 것을 구해내서 한 번 가르쳐보았는데, 생각보다 무재가 있어.”

“흠... 너는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운휘의 물음을 받은 주서현이 살짝 움츠려들며 답했다.

“주, 주서현이라 합니다.”

“너는 무당의 가르침을 받으면 무얼하고 싶더냐?”

이어진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더니 답하는 그녀.

“저처럼 납치당하거나, 나쁜 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자들을 돕고 싶습니다.”

“진실로 그러하느냐.”

“...예. 제게 힘이 있다면, 약자를 구하고 악한 자들을 벌할 것입니다.”

원작의 주인공다운 의와 협이 깃든 대답.

주서현의 눈빛은 맑고 올곧았고, 한 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장문인과 무진이가 추천하는 인재이니 너를 받아들이마.”

“아... 가, 감사합니다.”

“그럼 장문인, 사제의 연을 맺으려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운휘의 표정은 꽤나 밝았다.

장두식을 잃고 난 후 내가 보듬어줄 때도 가끔씩은 슬픈 얼굴을 하던데.

마음 한 켠에 생긴 빈 자리를 채울 사람을 만난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되었느냐.”

“네. 이장로님의 밑이면 잘 배우고 잘 지내겠죠.”

“흐음... 또 무슨 꿍꿍이더냐, 욘석.”

말캉한 젖가슴을 내게 부비며 다가오는 소율.

나도 그에 응해 엉덩이와 비부를 살살 문지르며 답했다.

“조금 걸리는 게 있어서요.”

“무어가? 딱히 비밀이 있는 아이로는 보이지 않던데.”

“그냥... 감입니다.”

“또또 헛소리를 하는구나.”

뭐라 설명하기도 뭐해서 고개를 돌리려하자, 내 볼따구를 쥐고선 시선을 맞추는 그녀.

“무슨 일이 터져도 너는 본녀가 지켜줄 것이다.”

“...크흠.”

“아직 너와 할 게 많이도 남았거늘.”

“그렇습니까.”

“그래. 혼례도 치루고, 아, 아이도 가지고... 아무튼.”

복숭아처럼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얼굴.

아랫도리가 딱딱해져옴을 느끼며 그녀를 번쩍 들어서 안았다.

“아핫, 언제는 쉬고 싶다면서?”

“따먹어 달라고 이리 유혹을 하시면서 무슨.”

딱히 부정할 생각도 없는 듯 요염하게 웃는 소율.

그녀가 말랑말랑한 젖가슴으로 내 얼굴을 덮으며 속삭였다.

“엉망진창으로 소율을 범해주시어요, 상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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