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네요, 여기도.”
“오라버니랑 언제 왔던 것이에요, 세령 언니?”
왁자지껄한 바깥과는 달리 그 소음이 그저 인기척 정도로만 느껴지는 귀빈실.
윤기가 흐르는 오리구이를 뜯으며 둘의 대화를 들었다.
“사실... 무진을 처음 만난 것도 여기야.”
“아앗... 정말인 것이에요!?”
“응. 아주... 화끈했던 만남이었지.”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건가.
뭐, 화끈하긴 했었다.
대놓고 바지를 벗어서 어그로를 끌고.
세령에게도 연신 자지를 비벼댔으니까.
그때를 떠올리는 듯 살풋 볼을 붉히는 세령.
옆에서 소유가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치잇, 소녀도 오라버니랑 화끈한 거 하고 싶다는 것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일부러, 그랬던 것 같은데...”
노골적이긴 했지.
그때는 진짜 백세령을 따먹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지랄을 했었으니까.
세령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나를 흘겼다.
“크흠...”
그리고 야릇하게만 보이는 그 시선 사이로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여자.
“지금은 주인님이 처음 강호에 출두한 곳이라고 엄청 유명해졌어요, 부인.”
부족한 오리고기를 더 갖고온 당하린이 방으로 들어왔다.
우아한 걸음걸이로 들어와 내 곁에 무릎을 꿇어앉는 그녀.
“...하린 언니, 그 호칭은 대체 언제까지...”
“맞아. 나말고는 편하게 불러도 돼, 하린.”
“그럴 순 없어요, 주인님. 어찌 주인님의 성은을 받은 부인께...”
이래서 데려오기 좀 그랬는데, 곧 죽어도 내 수발을 들겠다며 당하린이 따라왔다.
바깥이라 원래 입던 연녹빛 궁장으로 몸을 가리긴 했지만, 그마저도 끈 하나만 잡아당기면 순식간에 헐거벗은 몸이 될 거다.
아마 밖에서 대놓고 떡치자 그래도 웃으면서 받아주겠지.
지난 한 달간 당하린이 내게 보여준 충성심은 그정도였다.
“하린 언니가 이상해진 것이에요...”
“아니에요, 소 부인. 제 역할을 깨달은 거죠.”
“앗, 부, 부인... 헤헤...”
“하아... 무진.”
“커흠... 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자기가 뭐 이상하냐는 얼굴로 갸우뚱하는 당하린.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황홀한 얼굴로 신음성을 내댄다.
“흐으응... 하아...”
“아참, 바깥은 어때?”
“호북성으로 계속해서 각지의 무인들이 몰려들고 있어요. 덕분에 인근의 객잔은 전례없는 호황을 누리는 중이죠.”
봉룡지회까지 한 달.
며칠 전에 와서야 당연히 자리가 없기에, 이미 몇 달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는 이들도 파다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목향객잔.
예전엔 3층이 끝이었지만, 지금은 5층까지 올리고 옆건물도 인수한 잘나가는 객잔이다.
‘그 호북 멧돼지년들은 내 자지 그림을 그려서 판다던데...’
예전에 이곳에서 세령과 만날 때 미끼로 쓴 돼지년 둘.
나랑 떡쳤다느니 그런 소문만 안 나면 그냥 놔둘 생각이다.
일일이 찾아가기도 귀찮고, ‘흑룡’이라는 별호에 먹칠을 하면 안되니까.
‘맹주가 퍼트린 건가.’
남의 이야기로 들으니 상당히 쪽팔리긴 했지만, 목향객잔이 잘나가는 만큼 내 이름이 무림에 꽤나 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봉룡지회를 앞두고 날 물먹이려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혈교가 잠깐 모습을 감춘 사이 사기진작용으로 그랬을 수도 있고.
-이것이 그 만령곡의 영혼들을 성불시켰다는 흑룡께서 온 곳이구려.
-그렇소. 그의 웅대한 협의가 느껴지는구려...!
-오라버니들, 빨리 들어가서 자리나 잡아욧!!
입구에서 이딴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귀가 확 붉어졌다.
나만 있으면 괜찮겠는데, 옆에 앉은 세 여자가 전부 저런 잡설을 들을 청력은 되니까...
“아하핫, 또 오라버니를 찾아온 모양인 것이에요.”
“역시 주인님이세요. 늠름하셔라.”
“푸흡... 풉...”
세령까지 입가를 가리고 웃을 정도니, 나는 묵묵히 오리고기만 뜯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성불 시킨게 맞긴 한데, 왜 이렇게 쪽팔릴까.
‘흑룡이 문제야.’
처음엔 간지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서 떠올려보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긴, 주인님께 어울리는 별호는 흑룡밖에 없을 거에요.”
“다른 용은 없을까.”
“묵룡인 것이에요.”
“...흑룡하자.”
그게 그건 거 같지만.
아무튼 별호보다야, 슬슬 이곳 호북의 무당파로 찾아오고 있을 봉룡들이 중요하다.
“하린, 말해둔 건?”
“네, 일호가 다 취합했고, 제가 전부 정리해서 곧 가져다 드릴 거랍니다.”
“그래. 수고했어.”
당하린과 이가령에게는 혈동자들을 맡겨뒀다.
보고한답시고 일일이 내가 가기도 귀찮고, 원래도 단주와 부단주직을 맡던 둘이니 생각보다 잘했던 것이다.
‘맹주가 알면 기겁하겠지만...’
어차피 봉룡지회가 끝날 때까진 여기 있을 테니까.
손녀와 비무를 보러올 맹주와 이야기를 나누면 될 거다.
“앗...!”
“...소유?”
채소를 집어먹다 말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소유.
놀래서 다가가니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보였다.
“까망이가 소녀를 발로 찬 것이에요...!”
“...망할 놈이 지 엄마를 차!”
“년일 수도 있는 것이에요.”
당당하게 답하는 얼굴을 보니 더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아무튼, 까망이나 하양이나 다들 건강한 건 확실했다.
세령도 몇 번이고 차대는 걸 느꼈다고 하니까.
“도련님일지, 아가씨일지 너무 기대되네요.”
“그러게.”
하양이는 아직이지만, 사실 까망이는 이름을 예비해뒀다.
-홍으로 하자는 것이에요.
-...홍?
-네, 홍 노야로 인해 바깥으로 살아나올 수 있었던 아이니까요.
소유가 먼저 내게 그렇게 말해왔었다.
나도 나쁠 건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기왕이면 딸이 좋을 것 같네.”
“흐흥, 소녀는 사내 아이면 좋겠다는 것이에요.”
“왜?”
“오라버니를 똑 닮으면 좋겠다는 것이에요!”
나 닮으면 안되는데...
변태 새끼 닮아서 뭐할라고...
“무진, 저는 여아가 좋을 것 같아요.”
“세령을 닮으면 좋겠네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배를 쓰다듬는 세령.
나도 마주 쓰다듬자, 소유도 엉금엉금 기어와 내게 배를 들이밀었다.
“자, 아빠손인 것이에요, 까망이.”
살짝 기를 퍼트리자, 소유의 뱃속에서 태동하고 있는 생명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알아보기라도 하는 건지 꼬물꼬물대는 아기.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무진은 손이 커서 아기도 쉽게 안을 수 있겠네요, 후훗.”
“잘 안을 수 있을라나.”
“잘하실 거에요, 주인님.”
왠지 모르게 부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던 당하린이 옆에서 거들었다.
패배자니, 암퇘지니 하더니 이렇게 변한 모습에 감개가 무량했다.
“슬슬 올라갈까.”
“제가 채비를 해둘게요, 주인님.”
세령과 소유의 짐을 챙기고 먼저 일어난 당하린.
아마 봉룡지회가 시작되면 이렇게 다같이 나올 기회가 없을 거다.
둘도 무당산에만 있기는 갑갑해서 일부러 오늘 마음 먹고 나온 거고.
‘바쁘기도 하고, 배도 많이 불렀으니...’
수백수천의 칼잽이들이 애기들 있는 곳에 올라온다는 게 조금 부담이긴 했다.
그렇다고 봉룡이었던 둘이 숨어있을 수도 없으니.
‘결국은 내가 지켜줘야지.’
그게 가장의 역할아니겠는가.
그렇게 자리를 파하고 혜원각으로 돌아온 뒤.
일찍 잠이든 소유와 세령을 두고 몸 좀 풀어볼 겸 뒤편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음?”
“후우, 후우!”
한달 전 무당으로 오게 된 주인공, 주서현이 보였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고혹적인 모습으로 검을 휘두르는 그녀.
‘으음...’
짧게 친 단발이 목덜미와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더운지 옷도 얇은 무복이 다였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다가오는 주서현.
“오셨으면 말을 하시지 그랬어요, 은공.”
“부르기도 딱히 그래서...”
“그래서 이 야밤에 아녀자를 그리 뚫어지게 쳐다보신 건가요?”
“아니, 그게...”
“후후, 괜찮습니다.”
다른 의미로 상대하기가 어렵다.
여지껏 여자들은 전부 따먹을 대상으로 봐왔는데, 우리의 주인공은 어떻게 대해야 될지 모르겠단 말이지.
‘뭔가 의심스럽기도 하고.’
한달. 그녀는 운휘에게 태청검법을 전수받고 있었고.
지금은 대충 이류 정도의 실력으로 보였다.
본작에서는 순식간에 기를 깨우치고, 얼마 안 가 일류 수준까지 돌파했던 걸 보면 분명 뒤떨어지는 수준.
이왕 만난 거 이야기나 나눠볼까 싶어 입을 열었다.
“무당산에서의 생활은 어떠시오?”
“좋습니다. 공기도 좋고, 스승님도 좋은 분이시고, 밥도... 밥은 그럭저럭이구요.”
야채 풀떼기들을 떠올리는지 살짝 찡그린 얼굴.
달빛에 흰 살결이 반짝이는 듯 했다.
“고기가 없긴 하오, 아무래도. 도사님들이시니.”
“그런 것치곤, 은공께선 몸이 참 좋으신데요.”
“원래 좋았소. 유지하는 거지.”
“뭐, 속은 더부룩하지 않으니 좋습니다.”
사실 주기적으로 소율과 함께 고기를 먹긴 하지만.
장문인이 먹자는데 어쩔 거야.
아무리 도사라도 하루종일 전신운동을 하려면 고기를 먹어야하는 것이다.
“무공 수련은 할만 하시오? 장문인께서 주 소저도 재능이 있다고 하시던데.”
“은공만 할까요. 그래도 배움에는 막힘이 없습니다.”
대련이라도 한 번 해볼까.
손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아내며 생각했다.
주서현, 그러니까 원작의 주서진은 음양신공을 스스로 창조해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건 아니고, 대충 무당의 태극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그리고... 양기와 음기를 사용했지.’
원래가 떡협지이니 야한 쪽으로 생각해도 되지만.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강한 양기를 이용해, 많은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그녀들의 음기로 무공의 조화를 이뤘던 거다.
그렇게 자기 혼자서 무공을 창안하고, 강해질 방법까지 마련한 녀석이.
한달 동안 아직도 이류 무사 수준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운휘가 스승으로서 부족한가?’
그러기엔 그녀도 깨달음을 얻어 절대에 올랐고.
초반의 주서현을 가르치기엔 부족함이 없을 거다.
‘그렇다면... 일부러, 실력상승을 조절하는 건가.’
의심하면 의심할수록 내 머리만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주서진과 주서현은 다른 인물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도 되지만...
‘자꾸 머릿속이 간질간질하다는 거지.’
그렇다해도 그녀의 수준으로는 아직 내게 비비지 못한다.
그러니, 그전에 어떻게든 방안을 마련해야겠지.
“늦지 않게 돌아가시오. 산이라 밤바람이 차니.”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은공. 먼저 들어가세요.”
“알겠소.”
한줄기의 의심을 뒤로 하고, 혜원각으로 돌아와 소율의 곁에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