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꺄아악!!”
“서문비연!!”
팽가인이 사자후를 내지르며 전장으로 난입했다.
화전민의 마을로 보이는 조그마한 촌락.
십수명의 흑의인이 몰려들어 서문비연을 농락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아흑, 팽가인? 네년이 여기엔 왜...”
“우선 몸을 추슬러라! 천 소저!”
“네!!”
우렁찬 대답과 함께 흑의인 몇몇이 고개를 위로 꺾었다.
청명한 하늘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화기(火氣).
번쩍거리는 장도에 한껏 불을 머금은 천화령이 그대로 흑의인들을 향해 낙하했다.
콰아앙!!!
“아아악!!”
“왠 미친년들이!!”
단박에 대여섯의 흑의인이 불길에 휩싸여 타올랐고.
당황한 그들에게 팽가인이 짓쳐들어갔다.
“혈교의 쓰레기들!!”
다시 한 번 그녀의 손에서 펼쳐지는 호참만륙.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촌락 이곳저곳에 거대한 상흔이 새겨졌다.
“크하악!”
“제기랄, 일이 어쩌다 이렇게...”
이제 남은 흑의인은 여덟명.
촌락의 대로를 두고 앞뒤로 둘러쌓인 상황이었다.
“하아, 하아... 나 혼자서도 살아나갈 수 있었어.”
“시끄럽다. 저쪽의 실력은?”
“칫... 적어도 초절정이 셋 이상, 나머진 신경 안 써도 돼.”
하긴, 그정도의 인원이니 봉룡 중 한 명인 서문비연이 농락당하고 있었으리라.
팽가인이 차분히 기를 끌어올리며 천화령과 눈을 마주했다.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라면.
혈교의 무인들은 전부 단숨에 목숨을 끊어야한다.
언제든 자신들의 피륙을 이용해 가공할만한 인간폭탄이 되는 자들이었으니까.
-천 소저, 단숨에 갈 거야.
-네!
천화령의 붉은 눈동자가 의지를 다지는 것이 보였다.
뒤쪽의 서문비연 또한 자신의 독문병기인 만화참륙편(萬花斬戮鞭)을 드는 것이 느껴졌다.
“좆같은 혈교 새끼들. 곱게는 못 뒤질 줄 알아라.”
사나운 뱀처럼 바닥을 쓸어내리는 그녀의 채찍.
그 끝에 달린 철가시가 미세하게 흔들림과 동시에, 세 여인이 동시에 흑의인들에게 돌진했다.
“전부 죽여!!!”
“끄아아아!!!”
“죽어어어어!!!”
동시에 잠력을 폭발시키는 흑의인들.
그들 모두가 마치 짐승처럼 침을 흘리고, 온몸의 혈관이 우락부락하게 솟아났다.
“모두 조심해! 광혈(狂血)이다!”
직접 겪어본 적은 없지만, 그녀들 모두 혈교의 비술 정도는 배웠었다.
스승과 스승의 동문들이 목숨을 바치며 알아낸 혈교의 비밀들.
“늦었다, 개년들아!!”
소름끼치는 사자후가 터져나오고.
각자의 절기가 펼쳐지며 흑의인들을 쓸어냈다.
호참만륙(虎斬萬戮)
혈혈낙화(血血落花)
섬염(嬐炎)
서문비연의 만화참륙편이 흑의인들의 사지를 터트리고.
팽가인의 도가 그들의 몸뚱아리를 산산조각냈다.
그리고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게 소각했다.
“아악!!”
“혈세!!”
마지막 외침과 함께 터져나가는 흑의인.
그들이 죽은 자리엔 부글부글 끓는 피가 쏟아졌고, 그마저도 곧 증기로 변해 사라졌다.
고기 탄내와 함께 찾아온 잠깐의 정적.
세 여인 모두 숨을 고르며 전장을 살폈다.
“하아, 하아...”
“...아직.”
“그래.”
셋 모두 등골을 타고 흐르는 오싹한 살기를 느꼈다.
진득하고도 숨을 옥죄는 듯 끈적이는 살기.
서문비연이 몸을 옭아매는 살기에서 벗어나려 토해내듯 소리쳤다.
“어떤 새끼야!!”
그리고 찰나의 순간, 천화령의 도가 서문비연의 왼쪽을 꿰뚫었다.
“컥...”
“제기랄...!”
“안돼... 꺄악!!”
흡사 벌레를 털 듯 가벼운 손짓에 천화령이 날아가 집 한 채를 부수며 바닥을 굴렀다.
뒤이어 자신의 옆으로 도를 휘두른 팽가인마저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재롱은 잘 보았느니라.”
“카흑, 하악...”
무언가에 꽂힌 듯 서문비연의 신형이 공중으로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미, 미친...”
“서문 소저...”
“아악, 큭...”
서문비연의 입가로 선혈이 한움큼 터져나왔다.
하지만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듯 몸을 비트는 그녀.
“워워, 가만히 있거라.”
푸푹, 푸푸푸푹!!
“꺄아아악!!”
서문비연이 흘려낸 피가 그대로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그녀의 전신을 꿰뚫었다.
피거품을 물며 거칠게 몸을 떠는 서문비연.
“쯧, 나약한 년이로고.”
툭, 철푸덕.
허망한 소리와 함께 서문비연의 신형이 팽가인의 앞에 내던져졌다.
그녀는 벌레가 꿈틀대듯 전신을 떨어대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뱉었다.
“도망, 쳐...”
“...서문, 비연?”
흙바닥을 진득한 피로 적시며 숨을 멈춘 서문비연.
팽가인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향했다.
“아...”
얼마 가지 못해 멈춘 그녀의 눈동자.
두려움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눈앞에 있는 자는 자그마한 어린 아이의 체구였으니까.
“본좌는 팔이 날아가고, 다리가 날아가고, 심장과 단전에 칼이 꽂혀도 멈추지 않았건만. 쯧쯧.”
“이, 이... 개, 커헉...!”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만 같았던 팽가인의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흡사 절을 하듯 굴욕적인 자세.
손가락 하나로 팽가인을 굴복시킨 아이에게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호의 선배에게 예의를 보이진 못할망정. 천박한 주둥아리나 나불거리는구나.”
“흐으, 흐으... 죽어!!”
“흠.”
잠깐의 틈을 쫓아 달려드는 천화령.
그녀의 도에 한계까지 응축된 화기가 맺혔다.
염옥(炎玉)
어설프게 따라해낸 강환(罡丸)의 경지.
아까 전 흑의인들을 잿더미로 만들어낸 화염의 구슬이 상대를 향해 휘둘러졌다.
“이렇게 허접하면 응축시키지 않느니만 못하지.”
“읏?”
찰나, 아이의 손가락이 천화령의 염옥을 꿰뚫었다.
제대로 응축되지도 못해 피식,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증발하는 염옥.
“아... 커흑!!”
콰드득!
완전히 드러난 그녀의 빈틈에 조그만 손바닥이 깊게 박혀들어갔다.
거칠게 흙바닥을 굴러 팽가인의 옆에 널부러진 천화령.
그녀는 정신을 잃은 듯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양, 광!!”
“허허, 예의가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의 손가락이 위로 향했다가, 다시 아래로 내리꽂혔다.
퍼억.
“아윽...”
두개골을 타고 아찔하게 흘러들어오는 고통.
팽가인의 이마가 깨지며 흙바닥이 다시금 피를 머금었다.
“다 늙은 노괴, 주제에...!!”
퍼억.
“커윽... 이미, 한 번 패배한 쓰레기가...!!”
퍼억.
“끄으윽...”
“음?”
양광의 눈에 얼굴 전체가 피로 물든 팽가인의 눈동자가 이미 빛을 잃은 것이 보였다.
이대로 내려치면 목숨을 빼앗는 것은 여반장이지만...
“그래서야... 하아.”
털썩.
그것은 교주께서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양광이 힘을 거두자 팽가인이 실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이어 손가락을 까딱하자, 죽은 서문비연의 몸뚱이가 그에게 날아갔다.
“죽으면 곤란하지, 곤란해.”
양광의 품에서 꿈틀거리는 벌레 하나가 빠져나왔다.
이전의 혈사에서 톡톡히 재미를 본 생사혈고.
녀석이 꼬물대며 서문비연의 심장으로 파고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웁, 쿨럭, 커흑...”
그러자 놀랍게도 서문비연이 죽은 피를 토해내며 숨을 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릴 기력은 없는 듯 그대로 축 늘어지는 그녀.
곧 양광의 신형이 서문비연과 함께 사라졌다.
*
“...그래서, 이 둘이... 혈교 습격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라 이거군요.”
“그래. 한쪽은 하북 팽가의 맹후봉 팽가인. 다른 쪽은... 모르겠구나. 느껴지는 기운으론 화기(火氣)를 다루는 듯 싶은데.”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긴가민가하긴 한데...
‘설마.’
이미 나의 등장으로 원작의 진행은 망가졌다.
애초에 패퇴할 일이 없었을 양광이 내게 당해서 패퇴했고.
섬서의 혈교 세력들도 일거에 쓸려나갔다.
‘복수...인가?’
양광이 반병신이 되고, 섬서의 간자들이 쓸려나간 것에 대한 복수일까.
그렇다기엔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 싶은 복수였다.
‘셋 다 죽인 것도 아니고, 애매하게 서문비연만... 납치해갔다라.’
남은 흔적들로 알아낸 정보.
정체불명의 혈교 고수가 그 셋을 박살냈고, 서문비연은 납치당했다는 정황.
자세한 건 둘 중 하나라도 깨어나야 알 수 있을 듯 했다.
“바로 추적대를 꾸려야겠다. 이장로.”
“예, 장문인.”
“바로 제자들을 데리고 수색을 시작하게.”
“존명.”
운휘가 황급히 의각을 뛰쳐나갔고, 장로들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눈 후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모르겠습니다. 복수나 경고, 둘 다 아닌 것 같구요.”
“그래, 본녀도 그리 생각한다.”
연륜인지 고수의 직관력인지, 소율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고작해야 순찰을 늘리고, 운휘가 무언가 소식을 가져다주기를 바랄뿐.
둘이 깨어나면 바로 연락을 하라 이르고 소율과 함께 혜원각으로 돌아왔다.
‘의도가 뭘까.’
이 사건은 내가 모르는 사건이다.
몇 년 후까지 얌전히 힘만 비축했을 혈교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두 번째 사건.
‘현재 교주는 앙천화. 전대는 그녀에게 힘을 전부 물려주고 죽었고...’
앙천화는 다시 초대 교주부터 쌓아온 그 힘을 갈무리하는데 몇 년을 보낸다.
그게 혈교가 숨을 죽이고 기다렸던 이유고, 그녀의 강함의 이유였다.
‘하지만...’
주서진이 주서현이라는 여자로 바뀐 것처럼.
앙천화에게도 무언가 변화가 있다면?
‘...힘의 갈무리를 벌써 끝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억측이다.’
전대 교주들의 힘을 전부 갈무리한 앙천화의 무력은 인세 최강이라 해도 부족하다.
담소율과 소서화의 협공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겨내고.
수많은 무림인들을 개미처럼 밟아죽이니까.
그리고 반쯤 미친년이긴 하지만, 절대로 멍청하진 않다.
‘그렇다면 그냥 떠보기 정도의 의미인가?’
이정도쯤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으니, 알아서 기어라.
그런 뜻일까.
“하아...”
답답함에 길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안 자고 있었느냐.”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아니다. 본녀도... 한숨도 못 잤느니라.”
어느새 동이 터오는 새벽녘.
내 품으로 파고드는 따스한 살결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조심스레 나를 쓰다듬는 소율.
잠깐 투닥거리며 장난을 치다가, 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장문인, 두 소저께서 깨어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