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는?”
“팽 소저는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하나... 워낙에 강골이라 멀쩡한 듯 싶고, 천화령이라는 붉은 머리의 소저는 부상이 크지 않았습니다.”
“알겠네. 서두르지.”
소율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나 또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잠시 뒤 도착한 의각.
이마에 얼음뭉치를 얹은 여자와 붉은 머리의 여자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흉터가 팽가인일 거고, 붉은 머리가 천화령이겠구만.’
얼음을 내려놓고 정중한 자세로 포권을 하는 팽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문인.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군요.”
“아닐세, 본녀의 부덕이지. 몸은 괜찮은가.”
“하핫, 아시잖습니까. 이정도야 제겐 부상도 아닙니다.”
호탕하게 웃는 그녀.
붕대로 감싼 몸 곳곳에 크고 작은 흉터들이 가득한 것이 보였다.
‘무공을 제대로 익히고 나서부턴 집에 붙어있던 적이 없다고 하던가.’
그리고 꽤 큰 키의 팽가인 옆에 서서 어색한 미소를 짓는 여자.
그녀 또한 소율을 보며 포권을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문인. 천화령이라고 한답니다.”
“반갑네. 그대도 몸은 괜찮은가.”
“네, 다행히도...”
손짓으로 둘을 앉힌 소율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만 있는 걸 보면 알겠지만... 서문 소저가 납치를 당한 듯 하네. 그때의 상황을 설명해주게나.”
“...네,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문인.”
입술을 짓씹은 팽가인이 한숨을 한 번 내쉬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찌된 일이냐 하면은...”
그녀는 마차를 타고 호북성으로 가던 도중 비명을 듣고 사람들을 구한 뒤.
천화령과 만나 남은 혈교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 산골짝의 마을로 갔다.
‘거기엔 또 서문비연이 있었고...’
혈교의 잔당을 처리한 뒤 등장한 양광과 싸우고 패배했다.
“그리고... 서문비연은 제 눈앞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납치가, 아니라?”
“...예. 분명, 숨이 멎었었습니다.”
굳은 얼굴로 이야기를 끝내는 팽가인.
납치가 아니라 사망이라면, 훨씬 더 문제가 커졌다.
“...좋지 않구나.”
뭐가 되었든 사파련주의 딸인 혈화봉 서문비연이 무당의 권역에서 죽었다는 것은.
정사대전이 벌어질만큼이나 커다란 사건이었다.
“저... 장문인.”
그때, 천화령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소율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때, 기절하지 않았답니다.”
“뭐라?”
“간신히 버티다 조금 뒤에 기절하긴 했지만요.”
“계속 말해보게.”
소율의 재촉에 천화령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저희 셋이 쓰러진 뒤, 양광이라는 자가 허공섭물로 서문 소저의 시신을 가져간 듯 했어요. 저는 최대한 죽은 척을 했구요. 그러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천 소저?”
“뭔가... 꼬물꼬물거리는 듯한 소리가 났어요.”
“꼬물... 꼬물?”
“네.”
천화령의 말을 듣자마자 생각나는 게 있었다.
소율도 짐작한 듯 나를 슬쩍 쳐다봤다.
‘생사혈고.’
운휘를 지배하려고 양광놈이 썼던 술수.
생사혈고라 이름 붙은 만큼, 꽤나 엄청난 벌레긴 한데...
“그러더니 갑자기 쿨럭, 쿨럭 기침소리가 났어요. 분명히 그 양광이란 자의 목소리는 아니었답니다.”
“그럼, 서문비연이 살아있다는 건가?”
“음... 그건 저도 모르죠, 팽 소저. 그 뒤에 내상이 깊어져서 저도 기절했답니다.”
“아니, 목소리가...”
“그만.”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 엉덩이를 움찔대는 팽가인을 소율이 제지했다.
열혈기가 다분한 우리 팽 소저가 단숨에 바짝 굳은 것이 보였다.
“천 소저도 경황이 없었을 테니 자꾸 몰아붙이지 말게.”
“...죄송합니다.”
“저도 죄송해요, 제가 더 깨어있어야 했었는데.”
“아닐세. 충분히 도움이 됐네. 살아있을 가능성이라도 알아냈으니.”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내뱉는 소율.
팽가인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장문인. 반드시 양광의 대가리를 따고 서문 소저를 구해오겠습니다.”
“아서게. 정말로 양광이라면, 자네 둘이 협공해도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해.”
“그렇지만...”
도저히 포기할 면상이 아니라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팽 소저, 이미 당해내지 못해서 여기 누워계시는 것 아닙니까. 자중하시죠.”
“방심했던 거요. 헌데... 그쪽이 흑룡 백무진 소협, 맞소?”
“흑룡은 몰라도, 이름은 맞군요.”
“앗... 소협께서 요새 명성이 자자한 백무진 소협이시군요!”
팽가인을 툭 밀치며 내 손을 덥썩 잡아채는 천화령.
순박한 느낌의 처진 눈동자가 반짝였다.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답니다. 전 천화령이라고 해요.”
“아... 네, 백무진입니다.”
“핫... 죄송해요, 제가 너무 달라붙었죠.”
이번엔 또 금세 시무룩해진 눈망울로 물러나는 그녀.
감정 변화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여잔가 싶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네, 에헤헤...”
그런 천화령을 노려보던 팽가인이 다시금 내 앞을 가로막았다.
팔짱을 낀 채로 내게 패도적인 기운을 흘려내는 그녀.
“백 소협. 그대가... 세령이와 소유, 둘의 지아비라던데, 맞소?”
“그쪽한테 굳이 제 사생활을 말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만.”
“흥, 당당히 이야기도 하지 못하는 찌질한 사내군.”
툭툭 내 심기를 건드리는 말투.
저 불타오르는 눈동자만 봐도 확실했다.
나랑 한번 붙어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리는 눈빛이다.
일부러 살살 긁어보려는 거겠지.
나는 소율이 입을 열려하는 것을 막고, 차분히 답했다.
“똥개가 짖어대는데 일일이 반응해야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똥개라는 말에 잠깐 고개를 갸웃 했다가.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지며 소리치는 팽가인.
“...뭣, 지금, 지금 무슨 망발을...!!!”
“양광한테 쳐발리고 돌아온 주제에 나불거리지 말라, 이말입니다.”
“이익... 감히!!”
열혈기가 다혈질로 승화됐는지 도의 손잡이를 움켜쥐는 그녀.
두 치 정도 뽑혀나온 도의 밑동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짓눌렀다.
철컥!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도집으로 빨려들어간 그녀의 도.
“...큭?”
“감히는 무슨.”
이내 팽가인이 내기까지 끌어올리며 나와 힘싸움을 시작했다.
그녀도 오대세가의 여식으로 영약도 처먹고 좋은 장소에서 수련을 했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떡친 횟수가 얼만데.’
흑천묵지신공으로 쉼없이 내공을 쌓아온 내게는 새발의 피였다.
“크윽...”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어떻게든 내 손가락에서 벗어나려 하는 그녀.
그때마다 흐름을 읽어 더더욱 팽가인을 옥죄어갔다.
“어찌, 이런...”
“함부로 내 여자들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마십쇼, 아시겠습니까?”
“내, 여자라니...”
“더 하실 겁니까?”
그녀의 도신이며 몸 내부에 내가 흘려넣은 기가 가득했고.
이걸 발경의 수법으로 터트리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졌소.”
“다행히 여기선 찡찡대진 않으시는군요.”
“큿...”
“깝칠 상대를 잘 파악하시라, 이말입니다.”
사지에 흘려넣은 내 기운을 회수하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팽가인.
수치심으로 벌게진 얼굴이 보였다.
“서문 소저의 일은 무당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맡을테니, 두 분 소저께서는 편히 쉬시죠.”
“네, 백 소협. 감사해요.”
“...알겠소.”
그렇게 둘을 병실에 두고 소율과 함께 빠져나왔다.
주변을 슥슥 둘러보더니 내게 폭 안기는 그녀.
“아핫, 잘해주었다. 기특한 녀석.”
“잘한 것 까지야.”
“으구, 내 새끼.”
가슴팍에 얼굴을 잔뜩 비벼대며 애정을 갈구하는 소율.
나 또한 그녀를 꼭 안아주며 잠깐 체온을 나눴다.
*
‘음양은 합일하며 언제나 순환할지니, 굳이 나눌 필요 없음이라.’
장로각 인근의 구석진 연무장.
한 여인의 머리 위로 검은색과 하얀색의 동그란 구가 빙빙 돌며 순환하는 것이 보였다.
합쳐지고 나눠지길 반복하며 점점 커다래지는 원.
이내 두 구가 합쳐져 여인의 등쪽으로 파고들었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는 여인.
음양옥(陰陽玉)이 발현됨은 자신이 절정의 수준을 뛰어넘어 초절정에 달했다는 뜻이었다.
산적단의 본거지에서 정신을 차린 이후로.
도무지 뚫릴 기미가 안 보였던 초절정의 경지.
‘엄청난 양기구나...’
그것이 한 사내를 만나자마자 부족했던 양기가 단숨에 채워지며 경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백무진.”
갑작스레 나타난 의문의 사내.
산적단의 이목을 속이고 바깥을 나가는 일은 쉬운 일이었고.
개방과 하오문을 통해 무림의 정보를 수집했었다.
‘내 꿈에서, 그런 자는 존재하지 않았어.’
언제부터였을까.
항상 같은 꿈을 꾸었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스승을 만나 강해지고.
여러 여인들을 만나고.
마침내 혈교의 간악한 교주마저 패퇴시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꿈.
하지만 꿈에서 깨면, 여전히 자신은 산적단의 식모살이였다.
‘대체, 무슨 일일까.’
자신을 구해주어야할 스승과 세령은 나타나지 않았고.
인연을 나누었어야할 존재들은 자신을 까맣게 잊은 듯 했다.
그리고 어느순간부터 들려오던 ‘흑룡’이라는 의문의 사내의 소식.
‘처음 듣는 이였다.’
몽롱하게 펼쳐진 꿈속에서, 그런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허나 현실에선 버젓이 존재하는 자의 이름.
무턱대고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끙끙 앓고 있었는데, 어찌저찌 기회가 되어 무당으로까지 돌아왔다.
‘스승님, 세령...’
그러나, 자신이 알던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옷인지 천쪼가린지 모를 천박한 옷을 입은 스승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부른 배를 쓰다듬고 있는 세령.
거기에 맹주님의 손녀인 소유마저도...
무심코 그들에게 친근히 대할 뻔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부... 그자가, 백무진이 가로채간 거야.’
홀연히 등장한, 그 시커먼 피부의 사내가...
자신의 인연들을 아귀처럼 먹어치운 것이다.
‘죽여없애고 싶다.’
허나 그는 강했다.
지금 자신의 수준으론 택도 없겠지.
그리고...
‘행복해, 보였어...’
백무진이라는 사내와 함께 있으면, 그녀들의 입가에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띄우고, 그의 커다란 몸에 안기며 야릇한 신음성을 흘려냈다.
들리지 않을거라 생각하는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골백번이라도 죽이고 싶었지만...’
존경하는 스승이, 사랑하는 세령이 슬퍼할지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그들은 자신이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도 모르겠지.
“하아...”
눈물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사실 다 헛된 망상이라, 자신이 미친 걸지도 모른다.
‘나는... 어떡해야 할까. 스승님, 세령...’
인연의 고리를 전부 빼앗긴 주서현의 눈가에서.
결국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연무장의 구석.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