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129화 (129/230)

주서현의 시야가 순간 백무진을 놓쳤다.

초절정에 다다른 그녀의 안력으로도 잡아채지 못하는 수준의 속도.

‘거의 끝자락...’

사내는 힘과 속도, 내공의 양마저도 출중했다.

자신이 고생하며 잡아냈던 늙은 노괴를 밀어붙이고 있었으니까.

“크하악!! 어린 놈의 내공이, 무슨!!”

“그때 살아서 돌아갔으면 얌전히 구석탱이에 찌그러져 있었어야지, 늙은이.”

“닥치거라!!”

양광의 혈수(血手)가 사내의 요혈 곳곳을 노리며 쇄도했다.

하지만 백무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볍게 그 공격을 흘려냈다.

유(流)의 묘리가 그에 손에서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역시 강하네. 하지만... 양광도 확실히 이상한 상태야.’

왜일까, 양광이 당황한 상태고 지금 싸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백무진도 그것을 느끼고 있기에 여유롭게 양광을 몰아붙일 수 있는 거고.

그리고 그 모습에, 아까 가졌던 확신이 점점 무게를 더해가는 것을 느꼈다.

저 늙은 노괴의 정신이 흔들릴 만한 요소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

‘...확실해.’

자신이 생각하는 게 맞다면, 섣불리 기감으로 건드리는 것조차 위험했다.

그녀를 자극해서 좋을 게 없었다.

“끄악...!! 다음에, 다음에 반드시 죽여주마!!”

생각에 빠져있던 사이 실컷 두드려 맞은 양광이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전대의 노괴인 그의 실력이라면, 저렇게까지 당할 이유가 없었다.

절대에 오른 운휘가 가세해도 거뜬하게 버텨내겠지.

하지만 겁먹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은 양광은 무인으로서의 자존심도 벗어던지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다.

‘혈교의 우호법이 말이지.’

교주말고는 아무 것도 섬기지 않는다는 극악무도한 살인마가.

어이없어 하는 백무진을 보며, 새빨간 머리의 여인에게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주 소저, 얼른 와요. 서문 소저를 부축해야죠!”

“아... 네.”

천화령, 이라고 했던가.

그녀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서문비연을 부축하는 것이 보였다.

가기 싫다.

저 여자의 옆으로 가기 싫다.

지금의 알량한 힘으론 그녀의 손가락 하나도 버텨내지 못하고 처죽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겨우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네. 흐윽, 흡...”

“이제 괜찮답니다, 서문 소저.”

곧 스승... 아니, 담소율이 나타나 주변을 정리했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혼절한 서문비연을 팽가인이 업었다.

“돌아가지. 모두에겐 본녀가 넉넉히 사례를 함세.”

“아핫, 감사합니다 장문인!”

팽가인의 호탕한 목소리를 들어도 불안함은 가시질 않았다.

그렇게 무당으로 돌아오고, 스승인 운휘의 숙소에 들어가서야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떨리는 가슴이 쿵쾅대며 두방망이질을 쳤다.

꿈속에서의 자신은, 어떻게 그 괴물을 이겨낸 걸까.

‘다른 이들은 속여도, 나는 못 속여.’

백무진도 그녀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으리라.

그야 그녀의 분장은 완벽했으니까.

하지만 무공과 얼굴, 몸을 뒤바꾸더라도 딱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곳이 있다.

‘눈.’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가식적인 쾌활함과 발랄함으로 감춰도, 그 요사스러운 붉은 눈동자는 그녀의 것이 확실했다.

혈교주, 혈옥신마(血獄神魔) 앙천화.

천화령의 정체는 그녀가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인거야?’

봉룡지회를 앞두고 무당에 몰래 들어온 이유가 무엇인가.

양광을 이용해 같잖은 연극까지 해대면서.

주저앉아 한참을 고민해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혼자서 쓰러트리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강적이었다.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앙천화가 좋은 마음으로 이곳에 온 건 아닐 것이다.

담소율이라던지, 백무진이라던지.

무림의 주축이 될 누군가를 암살할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모습을 드러내 학살을 해도, 아무도 막을 수 없겠지.’

각 문파들의 후기지수가 모인 봉룡지회에서, 끔찍한 살육이 벌어질 것이다.

앙천화는 그럴만한 힘과 잔혹성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무르익지 못한 자신의 힘으론 택도 없었다.

담소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도 믿어줄지 의문이었고, 그녀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라면 말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넌지시 물어보기라도 할 수 있다면.

적어도 귀를 기울여 들어줄 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딱 한 사람.’

자신의 기억에는 없던 존재.

당황했다고는 하지만 분명 양광을 밀어붙였고, 그의 강함은 자신의 수준으론 측정이 되지 않았다.

또한 혈동자로 보이는 소년을 이용해 자신을 감시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내가 가진 의문을 해결하려면... 그 사내밖에 없어.’

모든 변화의 중심에 존재하는 자가 당연히 변화의 이유를 알고 있겠지.

어쩌면 앙천화도 백무진이라는 사내 때문에 온 것일 수 있다.

권태와 무료에 빠진 그녀에게 저 사내의 등장은 흥미로웠을 테니까.

그러니 자신의 꿈이 진실이든 아니든, 비밀을 공유할 자는 그뿐이 없었다.

‘어서 움직이자.’

주서현은 서둘러 혜원각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장 만나기 싫었던 여자를 만났다.

“앗, 주 소저! 어디를 가시는 거에요?”

“아... 천 소저. 장문인을 뵈러가는 길입니다.”

감정을 감추고, 숨을 골랐다.

그럼에도 본능적인 두려움에 표정이 굳어갔다.

“방금 저도 뵈러가는 길이었는데. 바빠보이시던 걸요?”

“...바쁘시다구요?”

“아하하, 그거 있잖아요, 그거.”

툭하고 팔꿈치로 자신을 미는 천화령.

그거라니 무슨...

“아.”

“조금 이따 가길 추천한답니다.”

...정사를 치루고 있는 건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천화령은 딱딱하게 굳은 자신의 얼굴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 했고.

곧 숙소로 돌아간다며 사라졌다.

‘당당하게 장문인까지 뵈러간다라...’

어렴풋이 앙천화의 의도가 느껴졌다.

그냥 어딘가의 무맥을 전승한 후인으로 나타나서야 신뢰를 얻고 안쪽으로 파고들기는 어려울테니.

빙 돌아가더라도 확실히 신뢰를 얻는 길을 택한 걸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보아서는 천화령은 그저 사람을 구하고 싶어하는 젊은 무인 정도로 보이겠지.

‘위험해...’

스승과 그 사내의 정사라니 듣기도 보기도 싫었지만.

더 늦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천화령이 돌아간 지금이 적기.

“주 소저. 죄송하지만 지금은... 앗.”

앞을 가로막는 시비의 수혈을 가볍게 짚어 잠재우고.

달뜬 신음성이 울려퍼지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제발, 알아듣고 잠깐만 멈춰주시길...’

일부러 기척을 잔뜩 내며 그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통한 건지 점점 잦아드는 헐떡임.

무례의 극치인 건 알고있지만, 그럼에도 꼭 이야기를 해야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풍겨오는 야릇하고 끈적이는 향기.

차분히 정신을 다잡으며 포권했다.

“무례한 방식으로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장문인.”

커다란 침대에 사내와 담소율이 연인처럼 붙어서 누워있었다.

나신인 듯 담소율은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올렸고, 사내는 당당히 상체를 드러낸 모습이었다.

‘...스승님.’

꿈의 기억에서 스승이 저리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음탕한 옷가지도, 천박한 말투와 표정도 본 적 없었다.

“흐음... 네가 알아서 하거라. 보아하니 본녀가 아니라 널 찾아온 듯 하구나.”

심지어 그녀는, 이 무례한 상황의 해결을 사내에게 맡겼다.

무당의 지존이자 절대지경의 고수인 본인이 아니라.

“무슨 일로 예까지 찾아온 것이오, 주 소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은공.”

“시비까지 잠재우고, 남보기 부끄러운 일을 하는 것도 무시할 만큼?”

“...네.”

“말하시오.”

“...은공에게만, 전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말에 스승의 눈이 희번득이는 것이 보였다.

어딘가를 꼬집혔는지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사내.

“아, 아야, 왜, 왜!”

“못된 놈, 또 뭔 짓을 한 게야!”

“아니, 그게... 모른다니까앗!!”

왠지 모르게 뻘줌해져서 눈을 감고 가만히 서있었다.

둘의 친근한 모습을 보기도 힘들뿐더러, 생각을 정리해야 했으니.

곧 대충 무복을 걸친 백무진이 자신을 불렀다.

“따라오시오.”

“...네.”

“얼른 다녀오거라.”

닫히는 방문 사이로 언뜻 비친 스승의 눈동자.

그 안에는 자신을 향한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

“이제 말해보시오. 주변의 사람은 전부 물렸으니.”

사내는 바깥으로 나와 조사들을 모셔놓은 신당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물론 신당에도 호위무사가 있기는 했지만, 그의 명령에 사라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신당의 권한은 오로지 장문인의 것.’

이 사내의 위치가 무당에서 장문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 뜻했다.

도대체 이 사내는 누굴까.

의심과 호기심이 무럭무럭 자라났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꿈은 꿈일 뿐, 거기서의 기억이 도움이 되었지만.

자신이 숨쉬고 살아가는 곳은 지금 이곳이었다.

“...이 이야기는, 반드시 은공께서만 아셔야합니다.”

“알겠소.”

“믿기 힘든 이야기일 수도 있고, 더러는... 제가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흠.”

그냥 천화령이 앙천화다.

이리 말해서는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거다.

지금은 이 사내의 선택을 믿고 전부 이야기를 해보아야 하는 순간.

사내가 우묵한 눈으로 답했다.

“말해보시오. 어떠한 이야기든 끝까지 들어는 보겠소.”

중저음의 무거운 목소리에, 차분히 이야기를 풀어냈다.

“...저는, 꿈을 가끔씩 꿉니다. 그것이 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생생하게만 느껴지는 꿈을요.”

그렇게 꽤 오랜 시간 동안 그에게 이야기했다.

꿈에 대한 이야기와, 천화령이 앙천화일 거라는 확신까지.

이야기를 다 들은 사내는 각진 턱을 매만지며 고심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 무심하게 던져지는 한 마디.

“그럼 주 소저는 내가 싫겠구려.”

“...네? 아뇨, 갑자기 왜...”

“따지고보면 주 소저가 꿈속에서 가진 모든 걸 내가 빼앗은 것 아니오?”

인연, 연인, 친구.

그의 말대로... 사내는 자신이 꿈속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걸 앗아갔다.

하지만 이미 다짐했다.

꿈속의 일은 꿈일뿐.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보다도, 앙천화의 등장이 더더욱 위험했다.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보이오만.”

“읏... 아닙니다. 괜찮아요, 정말로.”

감정을 들킨건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사내의 거친 손이 턱끝을 살며시 밀어올렸다.

마주친 강렬한 안광이 마음속을 꿰뚫는 듯 했다.

“그럼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 거겠군. 나라면 나를 죽여버리고 싶을 것 같소만?”

“...은공을 해쳐서 무엇하나요. 도리어 많은 사람들이 슬퍼할텐데요.”

“흠...”

꿈과 현실이 뒤바뀌지 않는 이상.

스승이나 세령, 소유에게 자신은... 결국 부외자일 뿐이다.

그녀들이 사랑하는 건 이 사내일 테니까.

“그런 이야기를 누가 들으면 미친 년이라며 들은 체도 안 할 것이오.”

“그러니 은공을 찾아온 것이죠. 제가 본 꿈에 등장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니.”

“믿기 힘든 이야기긴 하오.”

“...믿어주세요. 다른 건 몰라도, 천화령이 앙천화인 것은 분명합니다.”

사내가 자신의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믿어주겠소. 다만...”

“...다만?”

“주 소저도 내게 믿음을 보여줘야겠지.”

왜일까.

사내의 말에 흠칫, 하고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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