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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136화 (136/230)

“흐응... 왜 나를 의심하는 걸까요?”

타는 듯 붉은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살랑였다.

근처에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의 물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살짝 어거지긴 했어도, 딱히 이상한 방향은 아니었는데...”

팽가인과 서문비연을 끌어들여 벌인 연극.

적당히 신뢰감을 얻어 무당까지 들어오는 것은 성공했으나, 왠지 모르게 자신이 겉돌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무인의 텃세도 아니고, 애매하단 말이죠.”

흔히들 기싸움이라고 부르는 그런 것들.

교주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기싸움을 비롯해 생사결까지 해보았으니 익숙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받는 견제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무관심을 가장한 의심.

“거기다 상당히 조심스럽고...”

건드릴 듯 말 듯 아주 애매한 경계를 오가며 자신을 감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적진이고, 이정도 수준이니 눈 감고 있었다만.

조금만 깊었어도 아마 한줌 핏물이 되어 자신의 양식이 되었겠지.

“녹옥봉이었나요. 흐으음...”

새끼 독사쯤이야 간단하게 목을 비틀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야 별 같잖은 짓을 하며 이곳에 들어온 이유가 없잖은가.

그녀의 손끝에서 붉은 핏방울이 흘러나와 무언가를 그려냈다.

탄탄한 근육질의 몸과 허리에 닿을 듯 기다랗고 특이한 머리칼.

“나는 우리 흑룡 씨랑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데 말이죠...”

도저히 틈이 안 났다.

그 남자가 자신을 피하는 것도 있지만.

어떻게... 인간이 온종일 여자를 끼고 사는 거지?

“아흐, 완전 변태라니까. 응응.”

몰래 기척을 숨기고 찾아가면 언제 어디서나 교접중이었다.

심지어 노마녀 중 하나인 담소율과, 자신을 감시하는 당하린은 기본이고.

“...무당엔 아마 처녀가 없겠죠.”

장로들과 각주들, 제자들까지 틈만 나면 그 남자와 몸을 섞는 것을 보았다.

그때마다 사내는 여인들을 잡아먹을 듯, 짐승처럼 거칠고 강렬하게 그들을 범했었다.

호기심에 교인들의 정사를 직접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 정사라는 걸 그때 깨달았었다.

“발정난 모습이 내 강아지로 두면 딱일 것 같은데 말이죠... 아하하.”

그럼 분명 자신을 덮치려할 것이 뻔하다.

주인된 자의 자비로 발가락 정도는 핥게 해줘도 되지 않을까.

특히 그 노마녀가 사내를 연모하는 것이 분명하니, 재밌는 짓들을 할 수 있겠지.

“아으으...! 역시 교는 너무 따분했다니까요.”

온종일 자신을 우러러보고, 찬양하고, 눈만 마주쳐도 알아서 오체투지를 하는 인간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기쁨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봉황이니, 용이니 떠들어대는 버러지들을 관찰하는 것도 재밌고.

정체를 숨기고 몰래 돌아다니는 것도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가장 기대되는 즐거움은.

“언제쯤... 내 모습을 보여줄까요? 아하하하!!”

진득한 핏물을 토해내며,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따끈한 심장을 뽑아 한점한점 정성스럽게 베어문다면.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고한 미미(美味)일 것이다.

“하아아...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할까봐요.”

관람은 슬슬 질리니, 이젠 배역을 맡아야할 때.

천화령, 아니 앙천화의 손에 고급진 초대장이 감겨들어왔다.

*

“응... 가, 가가... 읏...”

“...음, 미안해. 조금 세게 빨았네.”

“아, 아니에요... 하아...”

목덜미를 타고 사내의 낮은 목소리가 올라왔다.

입술이 부르트도록 서로를 탐하고 나서, 부족하다는 듯 자신의 목덜미며 쇄골까지 타고 내려간 사내의 입술.

다급히 멈춰세우긴 했지만, 이미 몸은 달아오른지 오래였다.

‘...이상해. 가슴이나 성기도 아니고...’

훤히 드러나있는 목덜미와 조금 아래의 쇄골만 허락했을뿐인데.

그가 여린 살결을 깊고 강하게 핥아낼 때마다, 열꽃이 핀 듯 화끈함이 차올랐다.

“으으... 후우, 후...”

재빨리 음양신공을 운용해 열기를 날려보냈다.

그러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맞추는 사내.

“서현? 괜찮아?”

“네, 네에... 오, 오늘은 이쯤이면...”

“조금만 더 이러고 있고 싶어.”

오늘은 사내가 먼저 애타는 눈길로 요구를 해왔다.

역할이고, 연기일 뿐이지만 그는 언제나 진심이 담긴 눈빛으로 다가왔다.

‘양기는 충분하게 받았어...’

고작 일주일 정도로 다음 오행을 성취할 수는 없었지만.

부족한 내공을 채우고, 힘을 키우는 것은 충분했다.

그러니, 평소라면 이제 밀어내고 돌아가서 갈무리를 해야하지만...

“...알았어요.”

“고마워, 서현.”

“...후우, 후우.”

고개를 돌린 채 한껏 볼을 타고 올라오는 열기를 내뱉었다.

이미 외설스러운 짓까지 해버린 마당에 하나하나 부끄러워하는 게 이상하지만.

그런 짓보다 입술을 맞추고 서로를 빤히 바라보는 이 상황이 더더욱 부끄러웠다.

‘정신차려. 어디까지나 연기고, 필요에 의해서 돕는 거야.’

혈교주 앙천화.

지금은 잠잠히 지내고 있지만, 분명 언제고 행동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은 수많은 불행과 절망을 가져오겠지.

‘...어서 돌아가서 수련해야하는데.’

그녀의 강함을 따라잡으려면 한참 부족한데.

무진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아, 그에게 안겨서 체온을 느끼는 이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다.

“걱정하지마. 서현이 상상하는 일은 언제고 벌어질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야.”

“정말... 그렇겠죠...?”

“응.”

근거없는 헛소리라도, 이렇게 자신을 안심시켜주는 것 자체로 마음이 놓였다.

이 사내는 그런 마력이 있었다.

‘...그래서 자꾸만 여자가 꼬이는 걸지도.’

물론 자신은 어디까지나 ‘역할’일 뿐이다.

살짝 깊이 빠져든 것 같지만, 언제고 대의를 위해서 행동할 수 있었다.

“음, 누가 온 것 같네.”

“...네?”

사내가 가뿐히 자신을 들어 일으켜세웠다.

여름날에도 기분 좋게만 느껴지던 체온이 떼어지니 아쉬움만이 감돌았다.

‘...아니야.’

아쉬움은 무슨.

“오라버니이!! 이제 가는 것이에요!!”

“미안해요. 좀 더 늦게 가도 되는데, 저희들 때문에...”

“아니에요, 세령. 오랜만에 경치 좀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가죠. 그것보다, 둘 너무 예쁘다.”

“우의각주님이 실력 좀 발휘해주셨어요.”

“헤헷, 소녀도 차려입은 것이에요!”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찾아온 이들은 무진의 예비 부인들이었다.

백세령은 선녀봉이라는 말마따나 흰색과 들꽃무늬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궁장이었고.

소소유는 그 발랄함을 나타내듯 화려한 색감의 옷을 입었다.

배가 부른 모습도 그녀들의 아름다움과 고아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세령, 소유.’

이전의 봉황... 그리고 자신과...

‘...잊자.’

고개를 저었다.

꿈의 기억으로 미래의 환란을 막을 순 있지만.

맺어지지 못한 인연을 다시 이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날수록 꿈마저 꾸지 않아 이젠 희미한 기억.

애써 털어내고 있으려니 그들의 애정행각이 눈에 띄었다.

“움, 츄우... 츄르릅...”

“무진, 저도 얼른...”

그의 손짓 하나만으로도 이미 멍하니 풀린 얼굴이 되는 그녀들.

투명하게 늘어지는 실타래 끝에 세상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안겨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전의 아름다움은 어디가고, 파정을 갈구하는 듯 천박한 욕망이 느껴지는 얼굴.

자신도 저런 얼굴이었을까 확 부끄러움이 몰아쳤다.

‘아으...’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커다란 품으로 껴안아주는 무진.

‘혼자 안기면 더 안락한데...’

무심코 든 생각에 재빨리 고개를 휘저었다.

“주 사매?”

“...아, 가ㄱ... 아, 아니. 네, 백 사형. 벌레가 있어서요.”

“아하. 세령, 벌레가 있데요.”

“꺅, 무서워요 무진.”

“앗... 오라버니, 소녀도 벌레가 무서운 것이에요!”

아까도 달라붙어있던 셋이 더 진득하게 달라붙는 것이 보였다.

호칭을 잘못했으면 아마 상당히 무안했겠지.

언제까지고 은공이라 할 순 없기에 저번부터 백 사형으로 바꿔부르기 시작했다.

“슬슬 갑시다. 중턱부턴 마차가 있을 거에요, 세령.”

“고마워요.”

“뭘요, 태사부가 시키신 건데.”

셋의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가슴에 무언가 턱하고 무거운 것이 올려져 있는 것 같아 발이 떼어지질 않았다.

“주 사매, 안 오고 뭐해?”

“...따, 땀이 좀 흘러서요. 씻고 따로 갈게요, 사형.”

“그래, 그럼. 이따보자고.”

“...네.”

사내는, 백무진은 그대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예뻤지, 두 분.”

무당의 직계, 무림맹주의 직계.

길거리를 떠돌던 자신과는 급이 다른 여인들이었다.

회임을 해서 배가 부른 모습이어도, 잘 꾸민 그녀들은 선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어느새 입술을 짓씹고, 눈에 물기가 차오른 것이 느껴졌다.

“...뭐, 뭐야.”

얼른 소매로 물기와 입에 묻은 핏기를 닦아냈다.

씻고 가겠다는 건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말이긴 했지만, 이래서야 그냥 갈 수도 없게 되었다.

“내가 왜 이러지...”

짧은 나날들이었지만, 무진과 바보같은 연기를 하며 깨달았다.

그들은 진짜고, 자신은 가짜였다.

감정도, 현실도.

자신은...

그녀들이 부러웠다.

“하아...”

문득 외로움이 사무쳤다.

과거의 기억은 희미하고, 미래의 기억도 이젠 희미해져간다.

혈교주 타도라는 대의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지만.

정작 알아주는 이는 딱 한 명뿐.

터덜터덜 내려간 발걸음이 어딘가에 도착했다.

‘...우의각?’

여긴 왜 온 걸까.

돌아가려는 마음을 먹은 찰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서현이구나.”

“...우, 우의각주님.”

“무슨 일이니?”

...아까 세령과 소유가 우의각주에게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래서일까, 대뜸 말이 튀어나왔다.

“...저도 꾸며주세요.”

“응?”

“어... 그, 봉룡회를... 참석하는데, 옷도 없고... 그래서...”

“어머, 그러면 아까 같이 오지 그랬어.”

“수... 수련을 하느라...”

“우후후...”

뜻 모를 미소를 지은 우의각주가 자신을 안쪽으로 이끌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의자에 앉아 화장거울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자신.

우의각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봉룡회에서 누구 시선을 끌고 싶을까, 서현이는?”

“그, 그런 이유가 아니라...”

“그럼?”

답하지 못했다.

입밖으로 내는 순간, 더는 걷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흐응, 알 것 같네. 눈빛을 보니까.”

“...”

“걱정마. 세령이나 소 소저 못지않게 꾸며줄테니.”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방안에 은은하게 퍼진 분냄새 사이로 탄성이 들려왔다.

“기대 이상인데?”

“서현이가 노리는 사내도 이정도면 안 넘어올 수가 없을 거야.”

슬며시 눈을 떴다.

거울 앞에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미인이 앉아있었다.

“...우와.”

새삼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정도면, 그의 마음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어차피 연기일 뿐이야. 부, 불륜이랬잖아...?’

불륜 연기를 위해서라면, 좀 더 그 사내의 마음에 드는 모습이 되어도 괜찮을 것이다.

‘흐, 흥분하면 양기가 많이 나오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어떻게든 마음을 가라앉혔다.

“흠, 옷은 어떤 걸로 해줄까...? 뭘 입든 다 어울릴텐데.”

“...그, 그 사람은... 취향이 어떻게 될까요...?”

“어머어머, 아마... 다 벗은 걸 좋아해. 아니면 벗기기 쉬운 옷.”

“...네?”

“아, 아직 그 단계는 아니니?”

어깨에 닿는 우의각주의 손길이 왠지 모르게 야릇했다.

서, 설마 백 사형은 우의각주님마저 건드린 건가...?

“아무튼, 조금만 기다려보렴.”

“네, 네...”

곧 옷가지를 들고온 우의각주.

그녀가 건넨 옷은 여름을 의식했는지 상당히 얇고... 시원했다.

“속곳은 준비 안했어. 태가 안 살거든.”

“아, 아니...”

“얼른 갈아입고오렴!”

결국 등 떠밀려 들어간 탈의실.

찬찬히 무복을 벗고, 생전 처음 입어보는 옷을 간신히 입었다.

흑과 백이 적절히 어우러진,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옆트임 치파오.

여기까지라면 정말 괜찮겠지만.

“왜, 왜 트임이 여기까지...”

치골까지 올라온 트임이 사타구니를 살랑거리며 가리고 있었다.

“우, 우의각주님... 이건 너무...”

“어머! 딱이네. 이걸 보고도 오늘 무진이가 서현이를 안 덮치면 고자인 거야.”

가슴이 철렁함과 동시에 다급히 변명을 뱉어냈다.

“따, 딱히... 백 사형한테 보여주려는 건 아, 아닌데요.”

“맞아, 그랬지.”

이미 다 들통난 것 같지만,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주는 응원에 마음을 다잡았다.

“충분히 아름다워, 서현아.”

“...네, 감사해요. 각주님.”

인사를 마치고, 면사에 도포까지 걸친 후 우의각을 나섰다.

금룡전장으로 가기 전, 슬며시 조언을 건네주는 우의각주.

“잘 들어. 다른 사내들과 다르게... 그 녀석은 욕심이 많거든.”

“...그, 그렇군요.”

“그러니까... 너한테 욕심이 생기도록 해봐. 우리야 이미 한참 늦어서 어쩔 수 없지만, 너라면 그 짐승을 길들일 수 있을 거야.”

무언가의 의지가 느껴졌다.

너는 그 사내를 이겨낼 수 있다는 알쏭달쏭한 느낌의 의지.

저도 모르게 그 마음에 반응해 말이 튀어나왔다.

“반드시... 이겨낼게요.”

“...그래.”

자신이 고작 입맞춤 따위에 마음이 넘어갈 리 없잖은가!

아까의 외로움과 힘듦도 다 수련이 힘들어서 그런 것이다.

‘그래, 부럽기는 무슨!’

백 사형은 양기보관통일 뿐이야!!

단단히 마음 먹은 주서현의 발걸음이 사뿐사뿐 봉룡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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