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느냐.”
“그래, 왔느니라. 내 손녀는?”
“안에서 서방될 놈이랑 뒹굴고 있겠지. 곧 나올게다.”
“후... 헌데, 정말 그렇게 입고 나설 게냐... 수만 무림인들이 너만 볼 텐데...?”
소서화는 친우의 모습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한평생 무복 말고는 모르던 오랜 친우는, 도대체 무엇에 눈을 뜬 건지 차마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야시런 옷을 입고 있었다.
‘이년이 어쩌다...’
인물이 인물인지라 천박하면서도 아름답기는 하다만.
한 문파의 장문인이 입을 만한 복장은 아니었다.
“...아래가, 그... 다 보이지 않겠느냐... 등은 훤하고, 젖가슴은... 뭔 반 이상이... 창기도 아니고...”
“도포 입으면 가려져서 괜찮느니라.”
“아니...”
“그리고 상공께서 이리 입으라 하시는데, 입어야지.”
“...뭐?”
상공이라니, 정녕 이년이 미친 건가 싶었다.
하지만 친우의 눈빛은 맑고 투명했다.
오히려 상공이란 발음엔 부끄러움마저 가득 담겨있음에도, 그리 말하고선 기뻐하는 듯 보였다.
‘천하의 담소율이 자존심까지 접고 저런 극존칭을...’
이래서야 자신으로서도 더는 말릴 재간이 없었다.
이미 세간에서 무당의 두 제자가 미쳐 연회장에서 정을 나눈 일이 널리 퍼졌다.
응당 장문인인 소율이라면 상황을 수습하고, 단정한 복장으로 나서야 할텐데.
그럼에도 저런 음란한 복장을 하고 나가겠다는 것은.
‘...저놈이 소율이를 아예 자기 아래로 둔 것이군.’
누가 생각이나 할까.
혈교를 물리친 정파의 영웅이, 시대를 풍미한 절대 고수가, 한 사내의 것이 되었다고.
사내가 그녀의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사내의 것이 되었다.
이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하아...”
“한숨 쉬지 말거라. 본녀는 행복하니까, 후훗.”
맑은 웃음을 짓는 친우의 등 뒤로 사람 몇몇이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역시나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흑색의 사내, 백무진.
‘...그새 기도가 달라졌군. 원래도 기운은 방대했다만, 조금 날카로워졌는가.’
옆으론 세령이와, 하나뿐인 손녀가 부른 배를 안은 채 서있었다.
“할머님!!”
“사숙,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몸도 불편할 텐데 편히 있거라.”
완연한 곡선을 나타내는 손녀의 몸선.
배 안쪽에선 새로이 태어나는 생명이 꼬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헤헤, 만져보시라는 것이에요, 할머님.”
자신의 품 안에서 꼬물거리며 기어다니던 손녀가.
이제는 자신의 아기를 품어 어미가 되어버리다니.
‘나는 아직도 네가 아이로만 보이거늘...’
손녀의 손에 이끌려 뒷짐 지고 있던 손을 부른 배에 가져갔다.
살결의 따스함과, 천천히 고동치며 들려오는 맥동.
“...이름이 무어더냐.”
“‘홍’이라고 짓기로 했다는 것이에요.”
“홍이라. 안에서 도와주셨던 그분이구나.”
“네, 할머님.”
뒤이어 망할 녀석과, 당하린, 색봉... 아니, 주서현이라는 아이가 다가왔다.
수수하고 단아한 느낌의 여인.
대체 어쩌다... 저 색마놈에게 걸려 그런 고생을.
“오랜만입니다, 맹주님.”
“...그래요. 주작단주도 잘 있었는가.”
“천극혜검께서 신경 써주셨습니다.”
다행히 당 단주는 멀쩡해 보였다.
백무진과도 살짝 거리를 둔 채, 여전히 혐오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적당히 인사를 받아주며 전음을 보냈다.
-잘 지냈나.
-예, 맹주님.
-다행히 ‘적당히’ 해준 듯 하구먼.
-...두 분 소저를 맡기기엔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두 분 소저가 저 사내를 포기하실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 제대로 된 보고와 조사는 따로 받도록 하지.
무당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건 당연히 전부 귀에 들어왔지만.
아무래도 현지에서 가장 깊숙이 파고들어있는 심복이 잘 알지 않겠는가.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맹주님. 주서현이라고 합니다.”
“흠... 네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래, 반갑다.”
“...네?”
“이장로에게도 안부를 전해주렴.”
“아... 네, 맹주님.”
이어 주서현이란 아이와도 인사를 나누고, 손녀를 빼앗은 망할 놈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그래... 마지막으로 백 소협. 오랜만일세.”
“맹주님을 뵙습니다.”
녀석의 단단한 육신에 잠든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애초에 이런 후기지수를 가리는 대회 따위에 참가할만한 실력이 아니었다.
‘거기다 담소율 저년이 이리도 감싸고 도는 걸 보면, 분명 괜찮은 녀석인데.’
...라고 얼마 전까지는 생각했었다.
그래, 사람이 좀... 밝히고, 야한 것 좀 좋아할 수도 있지.
증손주들도 숨풍숨풍 낳고, 강한 녀석이니 손녀의 안위 또한 무사하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며칠 전의 그... 일까지는.
이건 분명 따지고봐야 하는 일이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 새끼를 그런 변태놈에게 보내겠는가!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았던 것, 아는가 ‘색룡’?”
“크흠, 그에 관해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연회장에 참석했던 모든 후기지수들이 증인일 텐데, 변명거리가 남았는가?”
“...”
없겠지.
그러니 입을 꾹 다물고 있겠지.
“본인의 머릿속에서 자네 같은 음탕한 색마를 소유와 짝지어주고 싶은 생각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네. 그래, 사람이 성욕이 좀 강할 수도 있지. 본인 주위에도 있으니까. 허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본녀도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안다.”
상공, 상공거리더니 이젠 이런 것까지 덮어주려하는 건가.
변해버린 친우에게 조금 실망감을 느끼며 말했다.
“담소율. 이런 소문이 난 녀석에게 세령이를 맡기면, 세령이도 무슨 이야기를 들을 것인지는 너도 잘 알텐데?”
“알지. 본녀도 처음 소식을 듣고는 열불이 치솟았지만... 우리 못난 제자의 말대로 이유가 있느니라.”
“그... 제, 제 탓입니다, 맹주님...”
담소율의 뒤로 서둘러 말을 덧붙이는 주서현이라는 아이.
백무진에게 잡혀서 인생 망친 줄로만 알았는데, 자기 탓이라니?
성큼 다가가 주서현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제대로 말해보거라.”
“그러니까,그게... 제, 제 체질이... 우으...”
“것봐라, 지금 변명도 제대로...”
“사숙, 스승님. 우선은 대회장으로 가시지요. 정오가 다되었습니다.”
더 따지고들려는 찰나, 세령이가 나서서 자신을 말렸다.
...그래, 어디 가지는 않을테니 변명을 들을 시간은 있겠지.
가슴속에서 치솟는 열불을 다스리며 몸을 돌렸다.
“후... 담소율 네년까지 나서서 감싸고 돌려는 걸 보면 필시 이유가 있겠지. 백무진, 본인이 납득할만한 변명거리를 생각해두게나.”
“...네.”
“먼저 가있으마.”
“그래.”
소서화가 떠나가고, 세령이 쿡하고 내 옆구리를 찔렀다.
“잘 수습하세요, 무진. 소유가 홀어미가 되지 않게요.”
“소녀는 홍이를 혼자 키우고 싶지 않은 것이에요, 오라버니.”
“...알았어, 다들.”
“되었다. 이제 가자꾸나.”
이젠 시간이 없다는 듯 재촉하는 소율을 따라, 나와 일행은 봉룡각으로 향했다.
-맹주는 어때? 믿는 것 같아?
-네, 주인님. 철썩같이 믿고 계시던데요.
-좋아. 그럼 계획대로 가자고.
-네, 맹주님의 신음소리는 어떨지, 궁금하네요.
미뤄뒀던 일을 해둘 때가 왔다.
*
“올해는 새로운 봉룡이 많겠구먼.”
“그렇지... 그, 두 분이 회임하신 것이 정말이라니...”
“그건 그렇고, 그 흑룡이란 자도 참가하겠지?”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과 높이 솟은 산봉우리.
험준한 무당산의 중턱, 인위적으로 형성된 듯한 분지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당연한 말을! 봉룡전 우승 정도는 해줘야하지 않겠나? 두 봉황을 데려가려면 말이야.”
“맞네, 맞아. 그정도도 못한다면 천극혜검님과 무림맹주님께서 허락하시겠나.”
“그것도 그렇구먼.”
무당에서 열리는 봉룡지회(鳳龍之會).
앞으로의 무림을 이끌어갈 후기지수들의 최강을 가리는 각축전.
그것을 보기 위해 모인 중원의 수많은 사람들.
본격적인 대회가 열리는 거대한 비무장에서 사람들의 이야깃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요새 그 흑룡의 소문이 조금, 별로지 않나.”
“크흠, 색룡이라... 하던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연회장에서 대놓고... 완전 색에 미친놈 아닌가.”
“어허, 말조심하게.”
색룡까지는 어떻게 허용범위여도, 대놓고 욕을 하는 건 자칫 목이 날아갈 만한 일이었다.
그야 그 색룡은 정파의 기둥이자 절대고수, 천극혜검 담소율의 제자니까.
“뭐, 높으신 분들 일은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하시겠지.”
“그래,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네.”
“맞아, 자네 딸아이도 참가한다믄서.”
“그렇네. 본선이라도 올라가주면 좋으련만...”
날고 긴다는 후기지수들을 꺾고 본선에만 올라가도 큰 영광이다.
몇백이나 되는 참가자들 중, 본선에 올라올 수 있는 것은 단 서른두명.
“새로운 봉황은 누가 될 것 같나?”
“이번에 소림에서도 방장대사의 제자를 보냈다고 하지 않았나.”
“오오, 나도 그 소문 들었다네. 꼭꼭 숨겨두던 제자라고 하던데.”
그렇게 각자의 이야기가 널따란 산의 분지를 가득 채우고 있던 찰나.
거대한 기운이 분지 안을 휘감았다.
사람 하나하나의 사이를 지나가면서도, 마치 바람처럼 자유롭게 흘러가는 기운.
좌중에 가득했던 소음이 그 기운을 따라 차츰 줄어들어갔다.
“허어... 어, 엄청난 기운이로구만...”
일반인도 있겠지만, 여기 모인 대부분은 무림에 몸을 담은 자들.
방금의 한 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두들 알고 있었다.
“저길 보게나!”
그리고 저멀리 봉룡각의 꼭대기.
새하얀 도포를 걸친 선인(仙人)이 한 발자국씩 하늘을 오르는 것이 보였다.
“처, 천상제(天上梯)...!!!”
단순히 하늘로 뛰어오르는 것 정돈 칼밥 좀 먹은 무인은 모두 할 줄 안다.
하지만 지금, 저 선인이 펼치는 것은 마치 계단을 오르듯 편안히 공중을 걷는 지고의 경공술.
마치 신선처럼 하늘을 걸어간 그녀의 도포가 산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천극혜검(天極慧劍)...”
하늘의 끝에 닿았다는 지혜로운 검.
혈사에서 중원 무림을 지켜낸 영웅이 하늘에 올랐다.
“허, 헌데... 왜, 왜이리도 살색이 많이...”
무당의 옷이 원래 저러했나?
그러고보니 올라올때 보았던 다른 무당의 도사들도 복장이 다들 홍등가에서나 볼법한 옷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이 해소되기도 전에, 거대한 비무장에 맑고 고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본녀도, 본녀의 친우인 맹주도 사사로운 잡설은 필요없다고 여기는 바. 지금 이 자리에서, 봉룡지회(鳳龍之會)의 시작을 선언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