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147화 (147/230)

‘검?’

아니다.

칼손잡이를 살짝 밀어내던 왼손가락에 힘을 풀었다.

그저 손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소매 아래로 슬쩍 떨쳐낸 손에 흑과 백의 상반된 기운이 맴돌았다.

목표는 아까전 자신과 사문, 그리고 사형을 욕한 버러지들.

“야, 아까 그 창년부터...”

“앞에, 앞에!!”

“뭣...?!”

가볍게 몇 번 내딛은 것만으로도, 어느새 함부로 입을 놀리던 못돼먹은 년들의 앞에 도착했다.

‘몸이 가벼워.’

무당 신법의 극치라는 제운종도 아니고, 그저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었을 뿐인데.

평소엔 음기의 통제에 항상 힘쓰느라 족쇄를 찬 듯한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마치 족쇄를 벗어난 듯한 해방감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 씹... 변태년 주제에 무슨 경공이...!”

“조져!!”

무술은 배웠지만, 예의를 배우지 못한 자들.

문답무용(問答無用). 징벌을 내릴 시간이었다.

“당신들한테 신경 쓸 시간도 아까워요.”

“닥쳐!!”

의식하지 않아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저 위에서 바라보고 있을 사형과, 비무대의 단상에 앉아 차분히 관조하듯 바라보고 있는 스승님.

그 시선 사이로 난잡하게 휘둘러지는 검이 뚜렷하게 보였다.

환검(幻劍)의 묘리를 따르는 무공인지 날렵하게 변화하는 상대의 검.

“이익...!!”

“쥐새끼 같은 년!!”

하지만 그저 조잡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두 명이 함께 휘두름에도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

오히려 서로의 검로가 서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일격에.’

음양신공의 내기를 덧씌운 수도로 가볍게 검격을 흘려내고.

두 년들의 배때지에 깊숙이 일장(一掌)을 박아넣었다.

콰드득...!!

“커헉...!!”

“끄악...!!”

“앗...?”

사람의 몸에서 나서는 안될 소리가 울렸다.

허리가 접힌 채 저멀리 비무장 판석 밖으로 거칠게 튕겨나가는 둘의 모습.

그녀들의 입에서 새빨간 선혈이 뿜어지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 이게 무슨...”

분명 한참 낮춰둔 내력인데 평소의 위력에 배는 되는 듯 했다.

당황에 멀뚱히 서있을 무렵, 귓가로 날카로운 파공성이 스쳤다.

“어딜 한눈을 팔고 있나!!”

“읏...!”

다급히 목을 꺾어내 피하고, 기습을 가한 상대에게도 일장을 먹여줬다.

콰직!!

“끄아악!!”

이번엔 부러진 검과 함께 날아가는 상대.

황급히 내력을 회수하며 주위를 살폈다.

‘포위됐어...’

어느새 비무장 위에 남은 무인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언뜻 시야에 들어온 연화란도 자신과 마찬가지인 상황.

‘...맞아. 어떻게든 비무장에 서있기만 하면 되는 거였지...’

협력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렇다면 약자가 힘을 합쳐 강자를 패퇴시킨다면, 어쨌든 1차 예선은 통과할 수 있는 셈.

비무라는 성격상 살초도 허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색녀 주제에 제법이군요.”

“저정도는 되니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나온 거겠죠.”

“혹시 모르죠. 색룡이랑 뒹구는 대가로 출전한 걸지도.”

으득.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까내리기 바쁜 자들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그땐... 즐겼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사형은 자신을 위해 평판이고 체면이고 다 포기하며 도와준 것이다.

그렇다면 응당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할 터.

‘소원... 꼭 얻어낼거야.’

스릉.

검을 뽑았다.

더 이상 쓸데없는 자신감에 차있을 필요가 없었다.

종이 울리기 전에, 비무장 위에 있는 모든 이들을 치워낼 것이다.

“하, 검을 뽑으면 이 숫자를 이겨낼 것 같나요!!”

“하아압!!”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한꺼번에 덤벼드는 참가자들.

쏟아지는 장병기를 물 흐르듯 피해내고, 이어지는 공격에 슬며시 검끝을 가져갔다.

‘지금이라면 가능하겠지.’

원래는 넘치는 음기 덕에 시도도 못해본 기술이지만, 꿈속의 자신은 분명 사용했던 기술.

‘검폭(劍爆)...!’

음기와 양기, 두 가지의 기운을 강제로 부딪혀 강한 반탄력을 만들어내는 기술.

많은 양의 내기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상반된 기운은 그만큼 강렬한 반작용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니까.

휘두른 검과 검끝이 맞닿는 순간, 음양의 기운을 충돌시켰다.

콰아아앙!!!

“끄아아!!”

“아악!!”

“읏...”

병장기가 깨어지며 무수한 파편이 튀었다.

자신은 중심에서 터져나온 반탄력으로 멀쩡하지만.

나머지는 아마 몸 곳곳에 칼조각이 박혀서 꽤나 고생 좀 하겠지.

‘쌤통이다, 나쁜 년들.’

폭발의 여파로 자신에게 달라붙어 공격을 하던 참가자들이 전부 장외로 날아갔다.

각자 어느 한 부위씩 잡은 채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

불쌍하다기보단 속이 시원했다.

“아윽...”

“큭... 망할...”

차분히 금방이라도 또 터질 것같은 기운을 회수하고 시선을 돌렸다.

독문병기인 연검을 길게 늘어트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연화란.

그녀의 주변엔 손목과 팔뚝이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참가자들이 보였다.

“연 소저.”

“꽤나 화끈하시네요, 주 소저.”

“망할 것들이 사형을 욕하잖아요. 그리고 연 소저도 만만치 않은 걸요.”

“피부만 가볍게 긁힌 거에요.”

피부만 가볍게 긁혔다라.

원한다면 더 깊게 파고들어 아예 잘라버릴 수도 있단 말이겠지.

역시 봉황의 위를 가진 실력자.

아까전 대기실에서와는 전혀 다른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떻게, 더 붙어볼까요?”

“원하신다면요.”

긴장한 채로 기운을 끌어올리는데,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종전(終戰)!!”

그와 동시에 빙긋 미소지으며 검을 수납하는 연화란.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손을 마주쳤다.

“아쉽게 됐네요. 더 위에서 봐요, 주 소저.”

“...네.”

식은땀이 난 손바닥을 몰래 옷에 슥슥 문질렀다.

잠시 뒤 비무가 끝나고 살짝 기대하며 올려다본 봉룡각.

역시나 그가 또다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잘했어, 서현. 소원 뭐할지 생각해놔.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

‘역시 우리 서현이, 잘 하는구만.’

아마 참가자들을 한번에 날려보낸 기술은 검폭(劍爆)일 거다.

음양의 기운을 충돌시켜 강한 파괴력을 내는 무지막지한 기술.

‘원래는 음기랑 양기의 균형이 안맞아서 나중에 쓰는 건데...’

내가 음기를 전부 빨아먹어서 그런지 꽤나 일찍 사용하게 된 듯 했다.

‘그건 그렇고...’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너무 따가웠다.

아마 소서화겠지.

‘흠... 너무 대놓고 했나.’

솔직히 스릴 넘쳐서 나도 생각했던 것보다 과하게 하긴 했다.

소율도 중간부터는 소서화가 있는 것도 까먹은 듯 짐승처럼 달라붙었으니까.

지금도 보지에서 정액을 질질 흘리며 여운에 잠겨있을 거다.

‘좋았지, 오늘.’

앙앙대며 달라붙던 소율이 생각나 또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아무튼 목적은 착실하게 달성했다.

당하린 특제 공화춘 MK.2 버전을 소서화가 잔뜩 먹어줬으니까.

‘시험은 딱 한 번 해봤지만...’

어젯밤에 써본 바 효과는 확실했다.

자지를 쑤셔줄 때마다 당하린이 몸을 벌벌 떨며 짐승처럼 교성을 내질렀으니까.

몇 번 쑤시지도 않았는데 실금까지 하며 흐느끼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분명 소서화도 나락으로 떨어트릴만한 강렬한 효과.

‘때를 잡아서 내 기운을 흘려넣으면, 약기운이 한번에 돌겠지.’

그러면 몸 곳곳에 퍼진 공화춘의 약효가 단숨에 터져나올 거다.

그 뒤는 미색령을 쓰든, 그냥 내가 박아주든 하면 될 것이고.

‘슬슬 가볼까.’

서현의 인사를 받아주고 돌아가려는 찰나, 소서화의 냉랭한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어왔다.

“그래, 경기는 잘 보았느냐?”

“네, 수준들이 괜찮더군요.”

“후우... 뻔뻔한 놈. 똑똑히 말해두마. 오늘이 본인의 인내심의 한계다. 알겠느냐?”

뒤를 돌아보니 그녀와 나 이외엔 텅 비어있는 귀빈실.

아마 한 마디하려고 소서화가 전부 내보낸 듯 했다.

‘이러면 그냥 가기는 아쉬운데...’

비무장은 장로들과 각주들이 정리중이고.

이 위쪽을 바라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짝 자극만 해볼까.’

하린이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차를 배터지도록 먹여준 덕분에.

지금 소서화의 몸 안에는 잠든 공화춘이 사지백해를 돌고 있을 거다.

가만히 놔두기는 아쉬우니, 음부와 자궁쪽만 살짝 자극해두면 내일 볼만하겠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맹주님.”

“몰라? 네놈이 정녕 본인과 말장난을 하자는 게야?”

“아니 거, 연인끼리 붙어있다보면 좀 야한 장난 좀 칠 수도 있지. 뭘 그리 뻣뻣하게 대하십니까?”

“이, 이... 그, 그 외설스러운 짓거리를 고작 장난 따위로... 후우...”

뻔뻔한 내 대답에 울그락불그락해지는 소서화의 얼굴.

하지만 심호흡 한 번에 원래대로 돌아와서는, 싸늘한 표정으로 답한다.

“때와 장소를 좀 가리란 말이다. 소율이가 네 장난감이더냐.”

“부인 될 사람이 한몸 다 바쳐서 남편을 위해주는데, 그게 왜 장난감입니까.”

“네놈이 정녕...”

“그렇게 생각하시는 맹주님이 잘못된 겁니다.”

“...아무튼, 봐주는 건 마지막이다.”

소서화의 분노가 이해가 가긴했다.

오랫동안 보아왔던 친우가 음탕한 창부마냥 변해버렸으니.

‘부러울만도 하지.’

암암, 누구는 밤마다 외로워서 홀로 잠들텐데.

누구는 안쪽이 푹 젖어버리도록 자궁까지 쑤셔주는 훌륭한 남편이 있으니까.

무림에 이토록 외로운 여고수들이 많다는 생각에 책임감을 느꼈다.

“맹주님.”

“또 뭔 헛소리를 하려고...”

“소율도, 소유도 제가 잘 챙길테니 걱정하지 마십쇼.”

“...되었다. 경고나 잊지 말거라.”

뻔뻔한 내 대답에 질렸는지 그대로 나가려하는 소서화.

돌아선 그녀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무슨 짓이더냐.”

“혹시... 외로우신 겁니까?”

“...뭐?”

소서화 정도의 고수가 내가 몰래 기를 넣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차에 탄 미약이야 당하린을 믿고, 또 본신의 내력을 믿었기에 의심없이 마셨겠지만.

직접 몸으로 내기를 흘려넣는 건 모든 무림인이 경계하는 짓 중 하나.

‘최대한 당황시킨다.’

붙잡은 손을 잡아끌며, 성큼 앞으로 나섰다.

소율과 비슷한 키의 소서화.

그녀의 싸늘한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짓이냐고, 묻지 않느냐.”

“제가 상대가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다음 한 마디,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 여기서 목을 쳐주마.”

귀빈실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공간을 제압하는 파둔(波鈍)의 기운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지금.’

하지만 이정도야, 소율과 대련하면 언제든 느끼는 압박감.

천천히 그녀의 손에서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소율이 먼저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

“잠깐 외로움을 달래줄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쇼. 저희만의 비밀로 놔둘테니까요.”

콰드득.

그녀가 살짝 힘을 주자 그대로 팔이 반쯤 꺾이며 고통이 밀려왔다.

“큭...”

“본인이 그딴 육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두거라. 한 번만 더 이딴 식으로 날 대하면, 그 머리를 몸뚱아리에서 친히 떼어내주마.”

차갑게 나를 밀어낸 뒤 성큼 방을 나가버리는 소서화.

그녀의 내기로 시뻘겋게 자국이 남은 팔을 쓸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튕기긴.”

아슬아슬하게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과실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서현이 무슨 소원을 빌까 궁금해하며 혜원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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