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전 1차 예선 이틀 째는 평이하게 진행됐다.
첫째 날을 교훈삼아 강자들을 쓰러트리려 연합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강자들 또한 둘, 셋이서 힘을 합쳐 나머지를 떨어트리기도 했다.
아무튼 반나절 간 이어진 이틀째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둘.
‘혈화봉 서문비연과... 소림사의 청하(淸河).’
서문비연이야 뭐, 어차피 올라올 줄 알았고.
이번에 새로 모습을 드러낸 청하는 원작에선 이름만 나왔던 인물이었다.
‘소림사 방장사태인 명정(明正)의 제자. 하린이 알려준 바로는 역시나 초절정에 이른 무인이고... 특이하게 검을 사용하는구만.’
예선에선 일부러 검을 들고 나오지 않은 듯 했다.
하긴 그럼에도 종이 울렸을 땐 상처 하나 없이 홀로 서있었으니까 실력은 확실하겠지.
‘심지어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였고.’
그녀의 무공은 소림의 검술 중에서도 최고로 꼽힌다는 부동명왕검(不動明王劍).
소서화의 단천파둔과 비슷하게 공간을 지배하는 검법이자.
또한 먼저 움직이지 않기에 후발선제(後發先制)의 극치를 달리는 무공이다.
귀빈실에서 함께 보던 소유가 꽤나 놀란 얼굴을 했었지.
‘흠...’
우리 만두를 떠올리니 커다란 젖탱이가 그리워졌다.
이전보다 상당히 부푼 폭력적인 젖탱이.
세령과 소유 둘다 슬슬 만삭이 가까워져 요샌 무서워서 만지지도 못한다.
‘두어달 쯤 남았으려나.’
출산 선물로 우승을 안겨주면 딱일 듯 싶었다.
슬슬 약속시간이라 주변을 정리하던 중, 시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 소협,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아, 들어오라 하세요.”
들어온 이는 저번에 이야기를 다 못 마쳤던 연화란...
“...이 아니라 무양?”
“반갑소, 형님.”
“그리고 옆에는... 청하사태시군요.”
“아미타불. 처음 뵙겠습니다, 백무진 시주. 소림의 청하라고 합니다. 사태란 말은 빼주시지요. 부끄럽습니다.”
미리 약속을 잡아뒀던 연화란 대신에 나타난 건 두 스님이었다.
전(前) 색마였던 스님과 방장사태의 수제자인 비구니의 조합이라니.
미리 끓여뒀던 차를 둘에게 내어줬다.
“오늘 예선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과찬의 말씀. 부처께서 도우심입니다.”
잘그락, 잘그락 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염주알.
반질거리는 게 오랫동안 손때가 탄 듯한 물건인 듯 보였다.
“불법 공부를 할 때 몇 번 보았던 사이오, 형님. 급하게 형님을 만나보고 싶다하길래.”
“그렇습니다, 백 시주.”
언뜻 무감정해 보이는 고요한 검은색 눈동자.
왠지 모를 은은한 향냄새를 느끼며 물었다.
“원래 선약이 있어서 말입니다. 빙빙 돌리지 말고 바로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청하 스님.”
“차향이 좋군요. 무당산에서 직접 키우신 겁니까?”
“장문인께서 소일거리로 키우시는 겁니다.”
빙빙 돌리지 마라니까.
그래도 굳이 찾아온 이유가 있을까싶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소림 방장사태의 제자가 괜히 오지는 않았겠지.
그렇게 차를 음미하며 바닥까지 비워내고서야 입을 여는 청하.
“제 스승이신 명정사태께서는, 천기(天機)를 조금 보실 줄 아십니다.”
“천기라. 그리 말하실 정도로 무언가 큰 이변이 있는 겁니까?”
“이리 말씀하셨지요. 난데없이 나타난 흑성(黑星)이 다른 별들을 전부 집어삼키고 있다고.”
심유한 눈빛이 나를 꿰뚫어보는 듯 했다.
이미 확신을 가진 듯한 눈빛.
“덧붙여서, 북쪽에 있던 붉은 흉성(凶星)이 빛을 발한다고 하셨습니다.”
“...북쪽의 흉성. 혈교를 뜻하는 말인 것 같군요.”
“예리하시군요. 네. 지난 혈사 이후로, 붉은 흉성은 그저 존재할 뿐 반짝이진 않았습니다. 허나, 몇 달전부터 강렬하게 반짝이며 존재감을 드러냈지요.”
앙천화가 제대로 나서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라는 뜻일 터.
청하의 말이 이어졌다.
“지난 혈사 때도, 그 흉성은 미친 듯이 빛을 발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나온 것입니다. 흑성과 흉성, 둘 모두를 확인하기 위해서요.”
“...그렇군요. 그래서, 확인을 도와달라고 오신 겁니까?”
잘그락.
염주알을 돌리던 청하의 손가락이 살며시 멈춰섰다.
“아뇨. 이미 첫날에 흉성을 확인했고. 지금은, 흑성을 살펴보러 왔습니다.”
청하의 시선을 확인한 무양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형님이 흑성이라는... 이야기오?”
“이미 무수한 별이 그 흑성에 빨려들어갔습니다. 무림에 이름 높던 두 봉황도 지금 누군가의 아이를 배었지요.”
청하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흠...”
나는 다른 말보다 흉성을 확인했다는 말에 집중했다.
그 말인 즉슨, 천화령이 앙천화라는 걸 알아챘다는 말이니까.
‘그리고... 원작이 비틀렸다는 걸 알고 있다는 말이지. 주서현은 꿈으로 보았다면, 여기는 천기라는 수단을 통해서.’
원작에서도 아마 소림사는 천기를 읽었을 거다.
당연히 원작은 애초에 변할 리가 없으니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을 테고.
지금은 멀쩡하던 천기가 나로 인해 뒤틀리니 모습을 드러낸 걸 테지.
‘이젠 원작을 참고하는 게 거진 무의미하구만.’
이미 많이 뒤틀렸으니, 청하처럼 의외의 존재가 튀어나와도 이젠 이상할 게 없었다.
“정황상 제가 흑성인 것 같군요. 세령과 소유를 회임시킨 게 저니까 말입니다.”
뻔뻔한 대답에 역시 형님이라며 자랑스런 눈빛을 보내는 무양.
하지만 청하는 무언가 화가 난 듯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당하시군요, 백 시주. 흉성에 대항해, 반짝이며 빛을 발해야할 별들이 모두 그대에게 집어삼켜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흑성이 흉성까지 집어삼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뇨. 제가 직접 본 흉성은, 그 흉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천기가 뒤틀릴 대로 뒤틀린 지금, 그 흉성을 막을 자는 전 무림을 통틀어 손에 꼽겠지요.”
잘게 떨리던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는 청하.
염주알을 굴리며 숨을 고르더니, 이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니 백 시주. 당신은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뭐, 도망이라도 치라는 겁니까?”
“네. 더 이상 흉성에 대항할 자들을 집어삼키지 말고, 사라져 주세요. 그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입니다.”
자비라...
은근 속을 긁는 재주가 있는 스님이었다.
“...청하 스님, 말이 심하시군요. 자비는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걸 텐데요.”
“소승은 세상에 나와 강자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에게서 묵직한 기운이 올올이 풀려나오는 게 느껴졌다.
명왕(明王)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거대하고 무거운 압박감.
무양마저도 그에 놀라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무당에서, 무당파 장문인의 직전제자를 공격하시려는 겁니까?”
“아미타불. 속세의 칭호가 백 시주를 막지 않아야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검 하나 없는 그녀의 손에 마치 검이 쥐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령이나 소유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
차분히 칠흑색의 내기를 끌어올렸다.
‘원작에서 소림은 조용했지. 그런데 이딴 걸 숨겨뒀었나.’
날뛰는 혈교도들을 제압했다는 글 몇 줄은 실려있었지만.
자세히 적힌 건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행적이니까.
점점 기운을 불려나가는 청하의 옆에서 무양이 외쳤다.
“청하사태! 당장 그만 두시오!!”
“무양대사. 아니, 색마 방원. 그대 또한 요주의 인물입니다.”
“...어, 어떻게.”
“소림의 힘을 얕보지 마세요. 그대는 그저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 얌전히 살아가면 됩니다.”
“크윽...”
청하가 내뿜는 기파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벅찬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무양.
슬쩍 기를 내보내 무양을 도와준 뒤 물었다.
“절 배제하시려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오히려 그만큼이나 흉성이 강대하다면, 저를 그에 대항할 자로서 도와주시면 될텐데요.”
“이미 위험을 알고 있는 흉성보다,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음흉한 흑성이 더욱 위협적이니까요.”
청하의 말에는 물러섬이 없었다.
명확한 적보다, 미지수인 내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듯 했다.
그녀가 선고하듯 내뱉었다.
“백 시주. 그대가 원인입니다. 모든 별을 집어삼키고, 천기를 뒤틀리게 만드는 원흉!”
“...굳이 싸우셔야겠습니까.”
“소승도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물러서 주시지요, 백 시주. 혈교가 사라질 때까지만이라도 은인자중하세요.”
오만한 말이지만, 그녀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다.
이 재능 넘치는 몸뚱이가 그려내는 싸움의 궤적에서, 그녀를 이겨낼만한 수가 쉽게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그녀 또한 비슷한지 쉽사리 내게 들어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어진 대치, 변수는 천천히 서로의 사이를 파고들어온 소율의 검이었다.
콰직.
정확히 서로의 기운을 가르고 들어와 땅에 박히는 장검 한 자루.
“소림의 청하. 오랜만이구나.”
“...천극혜검님.”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은 소율의 손으로 검이 빨려들어갔다.
“명정이 시킨 게냐?”
“제 판단입니다. 스승님께서는 모든 걸 제게 넘기셨습니다.”
“그래, 명정의 염주가 네게 있더구나.”
“역시, 천극혜검의 눈을 속일 수는 없군요.”
오래된 듯 했더니만, 방장사태의 염주였나.
청하가 다시금 기운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혈교는 확실한 위험이지만, 이 사내는 모든 것이 불명확한 변수입니다. 저로선 좌시할 수 없습니다, 천극혜검님.”
“네가 생각한 것을, 본녀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냐.”
“큿...”
청하의 기운을 날카롭게 잘라내며 퍼져나가는 소율의 기운.
하지만 청하 역시 물러서지 않았고.
마치 검으로 된 무언가가 몸에 꽂히는 환상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선혈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뭐지? 분명 내공은 아니었는데...’
소율의 내공이라면 이기어검이 만들어지면 만들어졌지.
방금처럼 환상이 보일 리는 없었다.
“어릴 적보다 조금 강해졌다고 뵈는 게 없나 보구나.”
“쿨럭... 역시, 절대에 맞닿으신 분 답군요... 커흑...”
결국 입을 틀어막으며 무릎을 꿇는 청하.
소율도 꽤나 진심이었는지, 청하의 손가락 틈새로 선혈이 터져나왔다.
“쿨럭, 크하아... 후우, 후...”
간신히 토혈을 멈춘 청하가 소율에게 물었다.
“하아, 하아... 천극혜검께서, 저자의 모든 것을 대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혹여, 저자가 흉성을 도와 무림을 피바다로 만든다 하더라도?”
피에 젖은 그녀가 짓씹듯 내뱉었다.
그런 청하를 보며 담담히 말하는 소율.
“그리한다면, 본녀가 목숨을 걸고 막을 것이다.”
“...그 이름을 걸고, 약조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하아, 하아...”
“...그래, 약조하마. 본녀의 이름을 걸고.”
천천히 청하에게 다가가 목에 검을 겨누는 소율.
내가 말리려는 찰나, 그녀가 손을 들어 나를 막아냈다.
“네가 왜 이리 과민하게 반응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본녀의 제자를 해하려했으니 벌을 받아야겠지.”
“...천극혜검께서 약조하셨으니,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금방이라도 목을 내리칠 것만 같은 살벌한 기운.
하지만 소율이 검을 납도하자 탁, 하고 긴장이 풀려나갔다.
“옆에서 직접 네가 지켜보거라. 무진이가 어떤 아인지. 알겠느냐.”
“...그걸 원하신다면.”
“그럼 이제 솔직히 말해보거라.”
“...”
“이렇게까지 급하게 나서는 이유가 무엇인지.”
청하의 뒤로 돌아가 혈도를 짚어주는 소율.
그녀가 검게 죽은 피를 뱉어내며 울먹이듯 말했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