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저녁의 사건 이후, 청하는 시비의 부축을 받아 의각으로 향했다.
-아미타불. 소승이 너무 성급했습니다, 백 시주. 사죄드리지요.
-스승이자 어버이 같으신 분께서 돌아가셨으니,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 공부가 부족했을 뿐이지요...
착잡한 목소리.
그리고 떠나기 전 청하가 내게 자신의 염주를 건넸다.
-스승님의 염주를 맡길 터이니. 이는 소승의 목숨을 단 한 번, 원할 때 써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목숨값에는 목숨값이라, 사실 제대로 싸운 것도 아닌데 너무 과한 것 아니더냐?
-...소승은 천극혜검님의 혜안을 믿습니다.
-제가 혈교와 붙어먹을 일은 없으니 안심하십쇼.
-아미타불. 폐를 끼쳤습니다. 그럼...
고통이 심한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합장을 하는 그녀.
나도 마주 합장을 하고 청하를 보냈다.
‘어떻게든 나를 이쪽에 잡아두고 싶나보구만.’
대뜸 스승의 유품을 넘기다니.
뭐, 나야 소율 덕에 잘 넘어갔으니 딱히 고까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청하가 건넨 이야기가 조금 마음에 걸릴 뿐.
“...명정이 죽었다니.”
“그냥 천수가 다하신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녀 또한 나만큼이나 정순한 내공의 소유자. 자신의 끝쯤은 짐작하고 있었을 게다.”
“...그럼 말 그대로 급사군요.”
“그렇지.”
청하의 말대로라면, 그녀의 스승인 명정은 ‘흑성(黑星)’을 좀 더 읽어내려다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 한다.
결국 나에 관해 알아보려다 죽었다는 이야기.
그래도 살짝 이해가 안 가긴 했다.
‘뭔 시발 크툴루도 아니고, 알아보려다 죽어.’
괜히 찝찝한 마음에 소율에게 투정을 부렸다.
“천기가 뭐라고 읽다가 죽습니까, 대체?”
“천기누설(天氣漏泄). 너에 관한 무언가가... 그만큼 위험하고, 중요하다는 이야기겠지.”
“...말이 안됩니다.”
“말이 안되긴. 본녀가 검으로 산을 베어내고 하늘을 걷는 건 말이 되고?”
저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엔 저것도 충분히 말이 안되는 일이니까.
‘애초에, 내가 여기에 떨어진 것도 이상한 거지 뭐.’
좋게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와서 내 목표가 달라질 건 없었다.
강해져서 다 따먹고, 행복하게 살다 죽는 거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더 강해져야겠지.’
솔직히 무당을 손에 넣은 이후론 안일하게 지냈다.
가진 것들을 다 써먹어보려고 생각은 했지만, 까놓고 말해 귀찮아서 미뤄뒀다.
원래 세계의 나도 그리 부지런한 놈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이런 세계에 넘어와서 죽을 둥 살 둥 미친 듯이 노력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주인공 감은 아니지.’
엑스트라라면서 벼락 맞은 새끼 마냥 미친 듯이 노력하는 게 이상한 놈이다.
적당히 힘 있고, 원할 때마다 욕구도 풀고.
궤도에 오르면 풀어지는 그런 게 나 같은 평범한 놈이지.
뭐, 원래 주인공인 주서현이라면 조금 달랐을지도.
하지만 저렇게까지 대놓고 나를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쏟아내는 청하를 보니 마음이 뒤숭숭했다.
“인상 피거라. 가뜩이나 시커매서 무서운 인상인데, 하얀 이빨 드러내면서 웃어야지.”
“...소율.”
“본녀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네 편이니라.”
“내가 정말로... 위험한 놈이어도?”
“푸흐흣, 이미 함께 위험할 짓은 전부 해놓고선, 왜 그러느냐.”
내 볼을 잡고 이리저리 장난을 치는 소율을 보니 조금 나아졌다.
그래, 맹주 앞에서 질내사정 몇 번씩하는 미친놈이 바로 나 아닌가.
어느 쪽으로 본다면 나도 미친놈 반열에 들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더 강해져야겠어, 소율.”
“이미 강하지 않더냐. 봉룡지회 우승도 그리 어렵진 않을 터.”
“애들 소꿉장난이야. 나는 소율, 내 스승마저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해.”
“흐흥, 건방진 녀석.”
사랑스럽게 미소 지은 소율이 내게 입술을 포갰다.
잠시 이어진 진득한 입맞춤.
투명한 실타래를 타고 달뜬 숨이 입가를 간질였다.
“내일 있을 태룡전 예선부터 이기고 오너라. 본선부터는 중간중간 쉬는 시간이 꽤 기니, 진득하게 가르쳐주마.”
“...알겠어.”
“그러면 우선... 여기부터 좀 더 알아보겠느냐.”
슬쩍 치맛자락을 올려 사타구니를 부비적거리는 그녀.
말랑한 엉덩이를 꽉 쥐어짜며 속삭였다.
“이미 다 잘 아는 곳인데?”
“아니다. 모르는 곳이 분명 있을 게야.”
“그럼 뭐. 오늘 알아보도록 하자고.”
“아핫, 어디 마음껏 알아보거라.”
앙하고 내 귓불을 깨무는 소율을 번쩍 들어올려, 침실로 향했다.
*
“태룡전 1차 예선 제3조! 제4조! 비무장으로!!”
저벅저벅.
부산스러운 발걸음들이 비무장 위로 향했다.
총원 19명. 각자의 병장기들을 패용한 무인들이 꿈을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비무장을 올랐다.
적수공권(赤手空拳).
아니, 이 경우엔 흑수(黑手)라 해야할까.
그는 무기가 없었다.
흔한 일이었다.
권(拳)을 사용하는 무림인 또한 넓은 중원에는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으니까.
허나 사내는 이질적이었다.
모든 것이 혼자 툭 튀어나온 듯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백색의 무복 아래로 장대한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꽉 쥔 주먹은 다른 이들의 머리통 마냥 굵고 커다랬다.
신장 또한,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올라와 있었다.
‘색룡이니 뭐니 하더니, 씨발... 놀려먹을 만한 크기가 아니잖아.’
그 사내의 소문을 들은 이들은 당황했다.
연회장에서 대놓고 정사를 벌이는 미친놈.
실력도 안되면서 밤일 하나로 자리를 따낸 창놈.
만령곡을 성불시킨 흑룡이니, 양광을 패퇴시킨 신성이니 하던 소문들은 전부 그것 하나에 사라졌다.
물론 소문을 내며 바람잡이가 조금 들어갔겠지만, 그런 대단한 일을 한 자가 사내라는 이야기에 선망하기도 했었는데.
그에게 악의를 품은 몇몇 이들의 수작과, 실망감이 합쳐져 소문은 그 세를 불려갔었다.
‘그래서 당연히, 허풍에 찌든 쓰레기라고 내심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앞에 있는 건 진정한 용(龍)이었다.
“꿀꺽...”
아직 비무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저 올라와 잠시 자리를 잡고 대기하는 시간.
검을 쥔 손에 식은땀이 가득 찼다.
“하아, 후우우...”
“씨발... 대놓고 알아서 포기해라 이거야...?”
그를 제외한 19명의 무인 모두가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가만히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은 남자의 기세 하나에, 겁먹은 토끼 새끼 마냥 벌벌 떨고 있었다.
이들 전부, 적어도 자기 문파 내에선 수위를 달리는 자들이었다.
한 명 한 명이 절정 이상의 실력을 가진 명실상부한 고수였다.
허나 지금은 마른 입술을 간신히 혀로 축일 뿐.
그럼에도 입술은 바싹 말라갔다.
“태룡전 1차 예선! 개전(開戰)!!”
심판의 외침과 함께 흑색 피부의 사내가 눈을 떴다.
동시에 누군가가 거칠게 검을 뽑아들며 사내를 가리켰다.
“야! 저 시커먼 새끼부터 조져!!”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 목소리.
이 비무장 위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놈만 제끼면, 그래도 본선에 갈 수 있는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이 부서지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분명... 한 대도 맞지 말라고 했었나.”
소서화가 우승할 때의 조건으로 걸었던 거 같다.
아마 지금쯤 귀빈실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겠지.
‘아니면 오늘도, 방에서 암컷냄새 풀풀 풍기면서 있으려나.’
하린의 보고로 알아냈던 어젯밤 소서화의 행적.
차마 자위는 못하겠는지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기를 반복했다는 이야기.
독과 약을 다뤄 냄새에 민감한 하린이 분명 음란한 애액 비린내를 맡았다고 말해줬었다.
“어딜 보는 거냐!!”
“역시 헛소문인 거겠지!! 색마 새끼!!!”
“뒈져!!”
이렇게 오래 생각을 해도 여전히 굼벵이마냥 달려들고 있는 사내놈들.
이리저리 얽히고 설킨 검과 창, 도가 내게로 쏟아졌다.
언뜻 보면 피할 곳 하나 없는 도산검림(刀山劍林)이지만.
“너무 느리다고, 새끼들아.”
이미 내 발은 진각을 밟은 채 앞으로 쏘아질 준비를 마쳤다.
투쾅!!
“큭...!”
“어디갔어!!”
판석 위로 깊게 새겨진 커다란 족적에 뒤늦게 내려쳐지는 무기들.
그 사이 제일 먼저 나한테 검으로 삿대질을 한 새끼 앞에 도착했다.
갑작스레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에 커다랗게 변하는 놈의 눈동자.
“엇...!?”
“원래 이런 건 보통, 입을 연 새끼가 제일 먼저 당하는 거야.”
“잠ㄲ...”
가볍게. 정말로 가볍게 손바닥으로 가슴을 쳤다.
우드득...!
“컥...!”
미처 막을 새도 없이 내 손바닥 모양대로 낙인이 찍혀버린 놈의 가슴.
대포알 마냥 날아간 놈이 비무장 너머의 벽에 부딪혀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채채채챙!
뒤이어 울리는 쇳소리와, 고함소리.
“씨, 씨발!!”
“뭔, 주먹 한 방에 사람이 저따구로 날아가...”
“빨리 몰아붙여 새끼들아!!”
첫 탈락자의 화려한 퇴장에 당황한 사내놈들의 면상이 보였다.
여자의 당황한 얼굴은 꼴리지만, 저건 그리 보고싶지 않았다.
“빨리 끝내자.”
진각을 밟고.
다시 한 번 육중한 신형을 앞으로 쏘아냈다.
지금껏 배워온 신법과 권법으로도 차고넘쳤다.
거창한 기술을 쓸 필요도, 애써 무언가 보여줄 필요도 없었다.
“끄악!!”
“아아악!!”
콰득, 콰직, 으직, 으지직.
주먹질 하나에 한놈. 발길질 하나에 한놈.
일격(一擊)에 일퇴(一退).
“씨발! 왜 안 맞는 건데!!”
“저 커다란 새끼를 왜 못... 아아아악!!”
구름을 거닐 듯 검과 창 사이로 몸을 흘려넣었다.
겨우 숨 한 번 들이킬만한 시간.
“후.”
“하, 하지마!! 날려보내지마!!”
눈앞에 남은 녀석 빼고는 전부 장외 탈락이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런지 관중석도 조용했다.
아니면 비무장에 가득한 먼지구름 때문에 안 보이는 걸지도.
가볍게 내기를 끌어올려 먼지를 치워냈다.
“뒤져어어!!”
“오.”
기특하게도 시야를 가린 먼지구름 사이로 튀어나온 녀석.
검에 서린 내기가 푸르스름하게 빛나며, 온힘을 다한 사선베기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컥...”
하지만 그 목적을 이뤄내기도 전에 놈의 몸이 공중에서 덜컥 정지했다.
일반인의 두 배는 되어보이는 두꺼운 내 손에 목덜미가 잡히면 어쩔 수가 없다.
조금 힘을 주자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여는 녀석.
“커흑... 놔, 놔줘...”
“수고했다.”
파리를 쳐내듯 가볍게 손을 옆으로 털었다.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녀석 또한 벽에 부딪혀 한줌의 먼지가 되었다.
“...종전(終戰)!!”
그리고 터져나오는 함성.
“와아아아아아!!!”
“흑룡!! 흑룡!!”
귀빈실에 당당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소율에게 포권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