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152화 (152/230)

“으, 아으... 처, 천 소저...”

“쉬이... 가만히 있어요, 아픈 건 곧 끝이랍니다.”

누가 보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휙 돌릴만한 장면이 이어졌다.

서로에게 밀착한 채로 농밀하게 몸을 뒤섞고 있는 두 여인.

다행인 점은 개인 숙소라서 들킬 일이 없다는 것이었고.

불행한 점은 그래서 연화란을 구해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다, 당신이... 역시, 아윽... 머리, 머리가아...”

“역시? 그때 말을 멈춘 이유가 있었군요. 백무진이라는 사내가 멈추게 했나요?”

“으으으... 흐읍...”

“우후후, 버텨도 상관없답니다.”

더 이상 내공으로 밀어내는 것도 한계였다.

애초에 혈교의 교주인 앙천화의 내력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방대했다.

대를 넘어 이어지는 혈교주들의 육체와, 혈기를 머금어 탄생하는 다음 대의 혈교주.

거기에 스물의 인생을 살아오며 그녀에게 제물로 바쳐진 거대한 양의 혈기.

그저 지금까지 그녀의 유희에 맞춰 고통스럽게 신음을 흘려냈던 것 뿐이었다.

“안, 안돼... 흐으, 아아...”

“나도 벌써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연 소저가 잘못한 거에요.”

결국 연화란의 입과 코를 통해 붉은 핏줄기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빨려들어갔다.

버티고 버티던 그녀가 마침내 무너져내림과 동시에, 승리를 만끽하듯 천천히 그녀를 잠식해나가는 선혈.

‘...너무, 성급했어...’

평범하게 행동했어야 했다.

백무진이 굳이 전음을 통해 자신의 입을 막은 이유.

천화령의 등장과, 혈교의 습격.

자연히 생각은 의심의 가지를 뻗어나갔고, 어제 하루 그녀의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녀의 방으로 향하는 다수의 인영.

마치 한 사람에게 매달려가는 듯한 기묘한 모양새에 다급히 쫓아갔다.

-잘했어요, 생각보다 별 거 없죠? 그냥 넘치는 구경꾼 몇 잡아오면 되니까요.

-...네, 주인님.

주인님...?

그녀에게 협조하는 누군가가 더 있다는 이야기.

그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선 위험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창문 틈으로 몰래 살펴본 방안.

‘...사람을, 잡아먹는 혈교의 수법... 그리고...’

천화령은 바쳐진 제물을 황홀한 표정으로 핏방울 하나 흘리지 않고 남김없이 취했고.

그녀의 앞에 무릎 꿇은 여인은...

-어머, 우리 연 소저가 구경을 하러 왔네요.

-네? 무슨...

-흡...

-아쉬워라. 꼭두각시는 보는 재미가 없는데.

다급히 도망치려 했지만 방을 떠나간 것은 생각일뿐.

몸은 어느새 천화령의 손에 제압당해 방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고 있었다.

“아, 아으... 안돼, 제발...”

“옳지, 잠깐이면 편해질 거에요.”

점점 꺼져가는 정신을 붙잡으려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몸 구석구석 흐르고 있던 피가 전부 뒤엉키는 듯한 역겨운 감각.

눈앞이, 머릿속이 새빨간 선혈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오늘, 이야기를...’

마지막 희망은 그뿐이었다.

오늘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던 그 약속.

백무진이 왜,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제발 알아차려주기를.

연화란의 시야가 암전되어갔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위대하신 분이 명령하셨다.

“멍멍아, 멍해봐.”

“멍!”

*

“본선 제 1경기!! 연화란! 진아연! 비무대로!!”

한낮의 정오에 울려퍼지는 목소리.

비무대의 단상을 올라 중앙에 섰다.

"하아, 하아..."

열이 오르고, 머리가 뜨거웠다.

본선에 대비해 그리 무리한 짓은 하지 않았는데도, 몸이 불덩이가 된 것처럼 후끈거렸다.

분명 더운 계절은 맞지만, 초절정에 이른 몸은 어지간한 더위와 추위에는 아무렇지도 않거늘.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하루종일 검을 휘두르며 무공을 점검했었던 것 같은데.

때아닌 여름 감기라도 걸렸나 싶어 한숨이 나왔다.

'집중하자.'

본선 첫 비무, 그것도 본선의 시작을 알리는 개막전에서 봉황이 탈락한다면.

그것만한 수치가 없을테니까.

“후우...”

심호흡을 내쉬며 허리춤에 감아둔 연검을 꺼내었다.

낭창낭창 휘어지며 준비가 되었다는 듯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검.

눈앞의 상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비무, 시작!!"

종소리와 함께 심판의 외침이 들렸다.

예선과는 달리 시간제한이 없는 본선.

상대의 항복을 받아내거나, 정신을 잃었을 때만이 패배로 간주된다.

"잘 부탁드려요, 무희봉!"

"이쪽...이야말로요."

진아연은 아직 앳된 구석이 있는 무인이었다.

그렇다고해서 얕잡아봐서는 안된다.

어찌되었든 봉룡지회의 본선에 발을 들인 실력자라는 소리니까.

"하압!!"

역시, 초반부터 깔끔한 기세로 치고들어오는 검.

군더더기없이 사선으로 내려오는 베기는 더할 나위없이 빠르고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정직하고 뻔한 검로.

‘옆으로 한 걸음, 무희보(舞戱步)로 뒤를 점하고...’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진아연의 검.

“큭...!?”

급히 검을 회수하는 것을 왼손으로 타격해 무마시키고.

그 반동을 이용해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켰다.

‘가벼운 상처 정도는, 감수해야할 거에요.’

무희보로 뒤를 잡힌 진아연이 급히 몸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허나 한참은 늦은 움직임.

회전의 원심력으로 한계까지 휘어진 연검을 저정도 속도로 받아낼 수는 없었다.

촤아악!

“아윽...!!”

등에 길다란 검상이 그어지며 그녀가 물러났다.

얕게 베었지만 고통은 확실하겠지.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가는 옷.

아찔한 피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와아아아아!!!”

“무희봉 소저어!!!”

관중의 함성이 귓가를 울렸다.

비무 대회라 하지만, 결국은 날카로운 장병기로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 목적인 대회.

어차피 다들 상처를 감수하고 오는 것이기에.

선혈이 터져나옴에도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랐다.

“더 할 수 있죠?”

“물론입니다!”

역시.

진아연의 얼굴에도 아직 전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아압!”

이어지는 공방.

우직할 정도로 밀어붙이는 검과.

예상치 못한 각도로 휘어지며 뱀처럼 살아움직이는 연검.

진아연은 아직 자신에게 한참은 부족했고.

뱀은 그녀의 사지 곳곳을 베어물어 피를 내었다.

“큿...! 하아, 윽...!!”

“하아, 하아...”

단숨에 끝낼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아쉬웠다.

저 여인의 육체에서 뿜어져나오는 혈향이 너무나 달콤했다.

그래서 가지고 놀 듯, 때로는 깊게, 때로는 얇게 살을 파내고 저며내며 괴롭혔다.

“으, 아윽... 흐으, 흐으...”

“더... 할 수 있나요?”

“하아, 후우... 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그런가.

가르침으로 보이려나.

그리 생각해준다면, 더더욱 깊은 가르침을 내려줘야겠지.

손목, 손등, 팔뚝, 다리, 등, 어깨.

그녀의 몸 어디든 새빨간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관중들은 비무장으로 뛰어내려올 듯 거칠게 함성을 지르며 비무에 열광하고 있었다.

‘이대로, 목을 베어버리면...’

...잠깐만,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었지?

상처와 아픔이 두려워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상대방을 보며,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잔인하게... 손속을 뒀었나?

분명, 가볍게 상처만 낸 뒤 항복을 받아내려했었는데...

“아윽...”

갑작스레 두통이 찾아왔다.

새빨갛게 물든 머릿속, 자신의 목덜미를 쥔 채 웃음 짓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질척한 핏물로 뒤덮이는 듯한 감각.

‘...당했어.’

대체 언제?

허나 생각을 더 이어가기도 전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멍멍아, 이제 끝내야지?

위대하신 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비무장 가득 흩뿌려진 피냄새가 머리를 마비시켰다.

“후우, 갑니다...!”

“흐으...”

다가오는 상대.

주체할 수 없이 살심이 끌어오르고, 검을 내뻗었다.

‘안돼에!!’

채애앵!

맑은 검명이 울리고, 질끈 감았던 눈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본선 제 1경기! 연화란 승(勝)!!!”

진아연은 목덜미에 얇은 상처와 함께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마지막 순간 팔을 비튼 탓에 근육이 당겨왔지만, 안도감이 들었다.

‘다행, 다행이다...’

많은 출혈로 인해 이미 기절한 상황.

하얀 옷을 입은 의각의 인원들이 달려나와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이 보였다.

더 지체할 순 없었다.

지금이라도 전음으로 백무진에게 상황을 알려야 했다.

봉룡각 5층, 귀빈실에 있을 그에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큽...”

거세게 뛰던 심장이 이젠 숫제 터질 듯 덜컥거렸다.

목덜미까지 핏줄이 튀어나와 전신을 옥죄어갔다.

-쉬이, 쓸데없는 짓은 하지마렴.

절대적인 명령.

그나마 다행이라면, 백무진과 아주 잠깐 시선이 마주쳤다는 것.

‘백 소협, 도와주ㅅ...’

그 생각을 끝으로, 연화란의 정신이 다시금 점멸했다.

*

“흠...”

“첫 경기치고는 꽤나 화려하군요.”

“원래 저런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만...”

소율의 의심은 타당했다.

무희봉 연화란은, 저렇게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과일 깎듯 돌려깎아가며 괴롭히는 사람이 절대로 아니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목을 노렸던 듯한 움직임은 명백한 살의가 느껴졌었다.

상대방인 진아연이 출혈을 견디지 못하고 공격하던 도중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이 날아갔겠지.’

저정도의 상처는 어떻게 허락돼도, 목이 날아가면 빼박이다.

봉황의 자리를 박탈당함은 물론 무림맹에서 직접 처벌을 내리겠지.

‘어디까지나 비무 대회니까 말이야.’

그런 면에서 연화란은 아슬아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아슬아슬함과, 마지막에 마주친 잘게 떨리던 두 눈동자.

‘천화령한테... 당한 거야.’

그때의 약속에 오지 못했던 이유.

‘생사혈고에 당했나?’

내가 알기로 그건 양광의 주특기였다.

하지만 양광이 할줄 아는 걸 천화령이 못한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사람을 둥글게 압축해 단약으로 만드는 새끼들한테 무슨 방법인들 없겠나.

‘맹주를 통해서 연화란이랑 따로 만나야겠어.’

분명 연화란과 둘이서만 보려하면 천화령이 어떻게든 수를 쓸 게 뻔했다.

맹주 정도라면 천화령도 포기하고 연화란을 놓아줄 가능성이 있었다.

“소율.”

“왜 그러느냐.”

“오늘밤은 혼자 좀 자줘. 할 일이 있어.”

“할 일은 무슨, 또 떡이나 치려는 거 아니더냐.”

날 너무 잘 알잖아.

“서방님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초치지마.”

“염병을 떠는구나. 못된 놈. 알았느니라.”

“고마워.”

소율에게 마구 키스를 날려주고.

첫 비무 내내 허벅지를 비비며 야한 냄새를 풍기던 소서화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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