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윽...!!”
솟구쳐오른 불기둥이 사라짐과 동시에 천화령이 남궁연의 눈앞에 나타났다.
밑에서부터 빠르게 올려치는 사선베기.
“흡!”
카가가각...!!
손목을 비틀어 간단히 흘려내고.
곧게 찔러 들어가는 순간 발밑에서부터 다시금 폭발이 일었다.
“망할...!”
“어머나, 예쁜 머리가 엉망이 됐네요.”
그녀의 눈동자에 고약한 탄내를 풍기며 흩날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 뒤로 나른한 미소를 짓고있는 붉은 무복의 여인.
그녀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전부 알아내고 왔다.
‘천화령. 화기(火氣)를 다루는 무공의 소유자.’
그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특징이었다.
무림의 역사에 자연지기(自然之氣)를 품은 무공은 수도 없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화기(火氣)는 특히나 그 화려함과 파괴력이 남달랐다.
“얍, 얍.”
도에 일렁이듯 남아있는 기의 불꽃.
천화령의 도가 위협적으로 주변을 흝고 지나갔다.
섣불리 기를 담아 맞부딪혀봤자 폭발로 인해 자신만 손해를 볼 터.
검기를 흩뿌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쫓아오며 장난스럽게 도를 휘두르는 천화령.
“큭,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요!”
“장난? 아하하,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상대방은 그런 화기(火氣)의 특성을 이용해 접근조차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감옥처럼 둘러싼 기의 잔향(殘香).’
그것이 공중에 길을 그리듯, 검의 궤적에 따라 주변을 휘돌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자신을 보며 축처진 눈매를 반달처럼 휘는 천화령.
“얼마든지 들어와도 좋답니다, 남궁 소저?”
“...후회하게 만들어주죠.”
수도 없이 많을 기인이사들의 제자가 봉룡지회에 이름을 내밀지만.
대부분이 명문세가와 구파일방의 이름 앞에 스러져갈 뿐.
‘이토록 많은 기를 밖으로 뿜어내고도 여유가 많진 않겠지.’
눈앞의 빨간 머리의 여자도, 곧 그리 될 것이었다.
“하압!”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자랑스런 남궁세가의 무공.
못난 오라비보다 수 배는 나으리라 다짐하는 초식이 상대를 향해 쏟아져나갔다.
‘기막(氣膜)과 함께 펼쳐 폭발을 막아내고.’
꽈앙! 콰아앙!
서로 다른 기운의 충돌에 귀가 먹먹해지도록 터져나오는 폭발음.
얽힌 기운들이 폭죽처럼 화려하게 터져나갔다.
미리 쳐둔 기막으로 충격을 흡수하고, 제왕보(帝王步)를 사용해 단숨에 가까이 접근했다.
“앗!”
당황한 듯 커다랗게 변한 천화령의 눈동자.
휑하니 벌어진 온몸의 빈틈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설마, 그 수많은 기흔(氣痕)을 다 막아냈다고 생각하지는 못했겠지.’
방금의 수는 완전한 내공대결이었다.
공중에 넘치도록 흩뿌려진 화기(火氣)를 막아낼 내공이 자신에게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내가 내공 싸움에서 질 리가 없고!’
이대로 벙찐 천화령의 목에 칼날을 가져가면 자신의 승리.
자신에게 처음 기습을 가하던 천화령처럼,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사선을 베어냈다.
“이제 끝이다!!”
“꺅!”
슈칵!
허나 아슬아슬하게 천화령이 몸을 돌렸다.
출렁이는 흉부를 한 치 벗어나 하늘로 향하는 검.
재빠르게 자세를 되잡아 연격을 날렸다.
“이익...!”
“아흑!”
꽈앙! 꽈앙!
제왕의 검에 담긴 패력(敗力)이 천화령을 미친 듯이 밀어붙였다.
그때마다 그녀가 허겁지겁 펼쳐낸 도기(刀氣)가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흩날렸다.
“아흣, 역시 남궁인가요!”
“이제야 좀 차이를 알겠나!!”
쩔쩔매는 꼴을 보니 절로 흥이 올랐다.
‘시뻘게 가지곤, 꼭 혈교의 수족같은 년!’
저 나른한 미소 뒤에 감쳐진 빨간 눈동자가 너무 거슬렸다.
‘눈동자 하나쯤은, 가져가마!’
예의상 그런 중요 부위는 어디까지나 피하도록 되어있지만.
어디까지나 예의.
고작 그깟 걸로 남궁에 따지고들 위인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교묘하게 검로를 조정해 오른쪽 눈을 가져가려는 순간.
성큼 다가와 검로를 회피한 천화령이 낮게 읊조렸다.
“많이 봐줬다, 그쵸?”
“허윽...”
천화령의 목소리에서 짙은 피비린내를 느낀 남궁연의 몸이 순간 경직됐다.
목덜미에 수십 개의 칼날을 겨눈 듯 두려움이 심장을 옥죄었다.
분명, 피하기만 하고 제대로 받아치지도 못하던 년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살기를...
“아, 미안해요. 생각하는 꼬라지가 너무 훤히 보여서 그만.”
하지만 천화령이 손을 휘저으며 웃음을 보이자, 마치 환상처럼 살기가 흩어졌다.
검을 쥔 손이 그 사이에 흠뻑 젖어 축축함이 느껴졌다.
‘...거, 거짓말이다.’
어디 사문 하나 모를 개잡년이, 발악하듯 내보인 거겠지.
저 멍청한 웃음에 그런 실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대신 슬쩍 시선을 돌려 봉룡각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
멍청한 오라비의 뒤를 이어 봉황의 위를 거머쥐지 못하면, 회초리 정도론 혼내기를 멈추시지 않을 거다.
“제대로 해라, 천화령!”
“흐응, 제대로라...”
피가 끓는 듯 거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이겨야한다. 반드시.’
뿌득, 하고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대로 해.”
“원하신다면요.”
남궁의 검은 고작 창궁(蒼穹)에서 끝나지 않는다.
창천(蒼天)을 가를 제왕의 검.
‘눈과 더불어 팔도 한 짝 잘라내주마.’
남궁연의 기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운을 띠기 시작했다.
자유로이 하늘을 누빌 듯하던 느낌은 사라지고, 천하를 압도하는 패자(霸者)의 형상을 띠었다.
천화령 또한 가볍게 도를 그러쥐며 미소지었다.
“제왕검형(帝王劍形)이라. 생각보단 실력이 괜찮네요, 남궁 소저.”
“날 얕본 걸 후회하게 해주지.”
천하오대세가의 일원인 자신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일인전승 문파의 후계자.
죽더라도 아무런 상관없는, 남궁세가의 이름값에 가려질 찌끄레기.
“간다.”
“오세요.”
콰득, 콰앙!!
거칠게 밟은 진각이 떼어지고, 빛살과도 같이 검이 쏘아졌다.
여전히 그 보기싫은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잡는 천화령.
“하아압!”
제왕검형(帝王劍形) 천섬(天殲)
카가가가각!!
하늘을 죽이는 검이 그녀를 베었다.
길게 그어지는 참격의 기운이 비무장의 진법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마치, 아지랑이처럼 흩어지는... 천화령.
‘...흩어져?’
눈앞의 신기루가 사라졌을 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남궁연의 목덜미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이정도로 시간을 끌었으면, 슬슬 끝내도 되겠네요.”
“아...”
마치 거대한 악귀가 뒤에 서있는 듯했다.
재 한 줌 남기지 못하고 타올라버릴 것 같은 극한의 공포감.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듯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주, 죽는...’
질끈 눈을 감음과 동시에, 목덜미에 서늘한 기운이 맞닿았다.
패배를 알려주듯 얇게 피부를 저미며 들어오는 칼날.
“사, 살려...”
주륵 흘러나온 핏줄기가 앞섬을 적시는 것이 느껴졌다.
챙그랑.
얼른 검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굴복도, 굴욕도 아니었다.
놓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져, 졌습니다!!!”
“어머, 포기가 빠르네요. 어디까지 들어가나 보고 싶었는데, 아쉬워라.”
"히끅, 힉..."
스각.
“히이익...!”
“안심해요, 비무는 끝났으니까.”
깔끔하게 베어진 왼쪽 머리칼이 바닥에 흩날리고.
심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천화령! 승(勝)!!!”
“와아아아아!!! 적안검녀!! 적안검녀!!”
*
‘관종끼가 다분한 년이구만.’
금빛 자수가 새겨진 붉은 장포를 펄럭이며 사방으로 인사를 하는 천화령.
중요인물답게 얼굴이 예쁜 건 물론이고, 젖탱이까지 커다라니 인사할 때마다 출렁이는 게 훤히 보였다.
“완전히 갖고놀더구나.”
“네, 애초에 저럴 작정으로 초반에 봐준 것 같군요.”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때, 그녀에게 열광하고 있는 관중들이 눈에 띄었다.
“적안검녀!! 적안검녀!!”
“언니 최고에요!!”
“역시 남궁 따위는 이름만 번지르르하지!!!”
평소보다 배는 격한 듯한 관중들의 함성.
소변을 지린 건 아닌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남궁연.
아무리 패배하더라도 쉽사리 검을 놓지 않는 게 무인일진데, 그녀는 스스로 검을 놓는 것도 모자라 주저앉아 울기까지 하는 듯 보였다.
‘기득권이 처참하게 깨지는 스토리는 모두가 좋아하지.’
그것도 아무도 모르던 무명소졸이 그러면 더 좋고.
가슴도 크고 예쁘장한 미인이면 더더욱 좋고.
“천화령은 스타... 아니, 유명해지려는 겁니다.”
“유명해진다?”
“오늘부로 적안검녀 천화령, 하면 모르는 이가 아무도 없겠죠. 혈교의 간자가, 정파의 촉망받는 후기지수가 되는 겁니다.”
애초에 그걸 노리고 온 것처럼 비무는 극적이었다.
남궁의 검에 속절없이 밀리던 그녀가, 마치 이형환위(移形換位)라도 쓴 듯 신기루처럼 남궁연의 뒤에서 나타났으니까.
그리고 화려함은 앞에서 모두 보여줬다는 듯, 깔끔하고 담백한 일검(一劍)의 승리.
심지어 남궁연은 뭔 짓을 당했는지 검까지 놓아버리곤 세상 무너진 것 마냥 주저앉았다.
‘장난으로 대충 참가한 게 아니야. 진짜로 봉황이 되려고 온 거다.’
반쯤은 유희가 맞겠지만, 그걸 제하고서도 천화령은 강했다.
충분히 봉황의 자리 정도는 따낼 수 있겠지.
‘그렇게 되면, 쉽사리 처리하지도 못해.’
단칼에 죽이지 않는 한.
분명 그녀를 누군가가 지키려하고, 분쟁이 일어날 거다.
생사혈고니 뭐니 거창한 짓을 안해도, 정파 내부에 암덩어리가 생겨나는 거지.
“...지금껏 혈교의 간자들은 후기지수를 암살하거나, 독살하거나... 그리 해왔었다.”
“그렇습니까.”
“그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라면 그게 상책이니까.”
미래를 이끌어갈 동량을 잃어버리는 것만큼 커다란 손해가 없다.
심지어 무공이란, 후인이 없으면 사라지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더더욱 피해가 크겠지.
“...만나봐야겠습니다, 태사부.”
이젠 그냥 지켜본다는 선택도 어려웠다.
예선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지만, 저렇게 나선 이상 이쪽도 방식을 바꿔야겠지.
소율이 다급히 눈을 마주치며 나를 말렸다.
“안된다. 너무... 위험해.”
“그럼 누굴 보내실 겁니까. 어떻게든 막아야 됩니다.”
“안돼요, 무진.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거 알잖아요.”
그리고... 느낌이 온다.
천화령, 아니 앙천화가 이곳에 온 건 나때문이라는 확신이.
결국 모든 변화의 주축은 나였으니까, 내가 해결을 해야한다.
“오라버니...”
“둘은 너무 신경 쓰지마. 엄마가 아프면 아기도 아프데.”
“...바보같은 소리.”
"바보 오라버니인 것이에요!"
소유와 세령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나를 껴안았다.
둘을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물론 지금은 어렵고,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겠습니다.”
“...방법이라도 있는 게냐?”
“아뇨. 뭐라도 해봐야지요.”
천화령이 아직 ‘유희’에 집중하고 있을 때.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