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진짜 수련하려고 했는데.”
“으음... 지랄떨지 말거라. 서화 방에 들어오자마자 네 눈에 담긴 욕망을 읽었거늘.”
“...”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소율의 말에 입을 닫았다.
함께 몸을 씻고 나와서 뽀송뽀송한 얼굴을 내게 부비적대는 그녀.
중간에 실신한 소서화와 서현도 잘 씻겨서 침대에 눕혀놨다.
“쯧, 멍청한 얼굴 좀 하지 말거라. 걱정되게.”
“걱정할게 뭐있어.”
“...심마라도 들까 그러지, 욘석아.”
심마라. 주화입마를 말하는 건가.
솔직히 스트레스는 쌓일 일도 없이 매일매일 정력적으로 풀어내니 별 걱정은 없었다.
다만 이제 내 앞에 놓인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갈까가 고민이지.
‘절대지경.’
의(依)가 하늘에 닿고, 기(氣)가 땅을 덮으며, 나 자신이 곧 세계(世界)가 된다.
최소한 그 자리에 발은 걸쳐야 혈교주와 마주 서는 게 가능할 거다.
대결의 결과가 어떻게 되던 간에 말이지.
‘그리고 이건...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초절정의 수준까지는 정말 순식간에 다다랐다.
흑천묵지신공으로 내공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교접을 통해 얻어낸 신공들로 깨달음을 대신했다.
‘쉽게 말해서 물량빨이지.’
보통 이런 건 심기체(心氣體)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나는 어거지로 뚫은 셈.
당연히 그 윗단계인 절대지경에서도 무언가 걸림돌이 될 게 분명했다.
‘그래도 방법을 찾아야지.’
성심성의껏 내게 모든 걸 알려줄 절대지경의 고수가 둘이나 있으니 안심이 되기는 했다.
“소율.”
“왜 그러느냐.”
“절대지경엔 어떻게 올라야 돼?”
“오른다고 오르면 개나소나 다 올랐겠지, 이놈아.”
“그러니까.”
볼따구를 부비적대던 소율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시선을 마주했다.
정욕 가득한 암캐가 아닌 현기(玄機)가 충만한 도사님 같은 눈빛.
‘...도사 맞구나.’
운령자라는 도호도 떡하니 있었지.
한참을 날 뚫어지게 바라보던 소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혈교주와 싸우려면... 무진이 너도 더 강해져야겠지.”
“그치. 소율이랑... 우리 맹주님으론 힘들테니까.”
원작에선 주서현까지 해서 세 명의 절대고수가 혈교주 앙천화를 합공한다.
하지만 그녀의 신위(神位)는 진정으로 하늘에 닿아있었고, 주서현을 제외한 모두가 리타이어.
그리고 홀로 남은 주인공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기회를 잡고, 목숨을 뺏기지 않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내가 그럴 수 있느냐하면... 글쎄.’
주서현 같은 방식은 내게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힘을 안 기를 수도 없었다.
뭐든 해보려면, 일단 앙천화와 같은 수준에는 올라야 이야기가 될 테니까.
“물론 본녀나, 서화나 네가 절대에 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울 게다. 허나... 그 경지에 드는 것은, 그야말로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보우하심이지.”
“소율은 어떻게 올랐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언제나 소율과 서화가 정파의 기둥이고, 절대 고수라며 추앙하는 것만 써져있을 뿐.
정확히 어떻게 올랐는지 하나도 안 쓰여져있었으니까.
“별 것 없다. 본녀도, 서화도 모두... 피비린내 나는 혈투 속에서 경지에 올랐으니까.”
“혈투?”
내 물음에 소율이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괜한 것을 물었나 싶어 끌어안으니, 그녀가 내게 폭 안겨들며 말을 이었다.
“...그래. 가족, 친척, 사문, 친우, 동료... 그 모든 것이 핏물 속에 잠기고 나서야... 깨달았지.”
“뭘?”
“그들 모두가, 본녀를... 고작, 나 하나를 담금질하기 위해 죽어나갔다는 것을.”
“...소율.”
“괜찮느니라. 이젠 본녀 홀로 그 고독을 끌어안지 않아도 되잖느냐?”
슬쩍 고개를 들어 마주한 눈빛이 흠뻑 젖어있었다.
가볍게 입을 맞추고, 여린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래, 음... 따뜻하구나.”
“밥 좀 잘 먹어. 뼈밖에 없네.”
“네놈이 하도 괴롭히니 그런 것 아니냐.”
그렇게 따지면 나는 진짜 뼈만 남아야지.
자기도 틈만 나면 날 쥐어짜는 주제에.
“...아무튼. 절대에 이르는 길이 쉽지는 않을 게다. 특히 모든 걸 쉬이 올라왔던 네녀석은.”
“...그렇겠지.”
벽만 쳐바라보는 면벽수련이니, 쏟아지는 폭포물을 맞는 명상이니.
그런 건 해보지도 않았다.
떡협지답게 떡만 존나게 쳐서 강해졌지.
‘주서현도 절대지경은 상당히 오래 걸렸지.’
거진 대부분의 시간을 초절정으로 지내다가, 혈교주와 싸우기 얼마 전에 절대에 올랐으니까.
물론 무공 자체가 음양오행을 다루는 사기급 무공이라 딱히 고구마는 없었다.
“어떻게하면 좋을까?”
“그렇게 말을 해도, 정형화된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흠... 소율이 가진 절대지경은 뭔데?”
“흐응, 세령이한테도 보여주지 않은 걸, 보여달라는 게냐?”
“응.”
개구쟁이같은 표정을 짓던 소율이 눈을 흘겼다.
“쯧, 우리 상공이 알려달라는데 알려줘야지. 도포 좀 입혀다오. 연무장에 가자꾸나.”
“이 시간에?”
달이 뜨긴 했지만 아직 깊은 새벽녘이었다.
물론 그 정도로도 소율을 보는데에는 충분했지만.
“얼른. 괜히 낮에 신경 써가며 하느니, 지금 해버리자꾸나.”
결국 소율을 안아들고선 같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애병인 송문고검을 들고나온 소율.
월광 아래 맑게 빛나는 검이 반짝였다.
“최선을 다해 들어와보거라.”
“진심으로?”
“진심으로.”
여유롭게만 보이는 소율의 표정을 변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도 너무 제대로 하면 주변이...
“뭐든 해보거라. 본녀를 믿고.”
저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웃통을 벗고 천천히 흑천묵지신공의 내기를 순환시켰다.
처음엔 가볍게 원 하나.
키잉...
파륜(波輪) 하나가 전신을 휘감아 돌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이 원을 잘게 쪼개고 또 쪼개어 수백수천의 원을 몸에 담았을 거다.
그렇게 그 가공할 회전력(回轉力)을 사방팔방으로 뻗은 게 광룡만천이고.
한 방향으로 모아 극한으로 끌어올리면 만령곡에서처럼 영혼마저 분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는 기술을 써보기엔 조금 아쉬웠다.
‘오늘은 조금 다르게 가볼까.’
진심을 다한 절대지경의 고수가 공격을 받아준다는데.
이런 날만큼이나 실험하기 좋은 순간이 있을까.
‘최근에 얻은 게 뭐가 있더라.’
당장 생각나는 건 당하린의 암혈마라신공.
하지만 독을 섞자니 말도 안되는 짓이고.
음양신공을 써보자니 무당파 장문인한테 태극으로 깝치는 게 조금 아니다 싶었다.
“안 들어오느냐. 본녀가 갈까?”
“쓰읍, 지금 하늘 같은 남편이 고민중이잖아.”
“으이구, 그럼 먼저 보여주도록 하마.”
살랑.
한줄기 바람이 소율에게서 일었다.
가볍게 나부끼는 도포자락 위로 나뭇잎이 떨어져 그녀의 손에 얹어졌다.
“무당의 묘리는 언제나 흐름을 읽으라 말하지. 또한 읽는다면 당연히, 스스로 흐름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손 위에서 나풀거리던 나뭇잎이 대뜸 미친 듯이 회전해 작은 용권풍을 만들어냈다.
허나 내기의 유동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냥 없는 수준이었다.
‘흐름, 그 자체를 통제하는 건가?’
나도 내력을 때려박으면 나뭇잎을 저렇게 미친놈 마냥 돌릴 수는 있다.
하지만 소율처럼 내기를 거의 쓰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또한,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녀가 살짝 밀어낸 나뭇잎이 내게로 천천히 날아왔다.
슬쩍 손을 뻗자 그 위로 내려앉는 나뭇잎.
그리고 순간, 소율의 손에 있었던 것처럼 강렬한 폭풍이 내게 일었다.
“큭...!”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고 말이다.”
공중에서 몇 바퀴 휘돌은 나는 간신히 중심을 잡아 바닥에 착지했다.
허나 착지하고 나서도 고생은 계속됐다.
“소율!”
“그 또한 흐름이다. 무당의 제자가 그것도 못 읽어내느냐.”
“아니, 으아악!!”
소율의 손짓에 이리저리 날아드는 나뭇잎이 내 몸에 닿을 때마다, 하늘을 날아다니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 번을 밤중에 자이로드롭을 타고서야 나뭇잎이 그녀의 손으로 돌아갔다.
“푸하핫, 우리 무진이 꼴이 말이 아니구나. 응?”
“...소율.”
“흐흥, 밤에 괴롭히려드는 것이라면 환영이니라.”
“안 괴롭히면?”
“그럼 안되지요, 상공. 여인네의 기쁨을 그렇게 깊이도 알려주고선 독수공방을 시킨다니.”
정색을 하고선 맞받아치는 소율.
그녀가 다가와 나를 일으켜세웠다.
“우리 무진이가 기초가 부족해서 그런가, 쉬운 걸 잘 깨닫질 못하는 구나.”
맞는 말이긴 했다.
내 방식은 야매무공의 정석 아닌가.
하지만 또 그냥 당하려니 아쉬워서 소율을 밀어붙였다.
“...소율이 가르쳤잖아.”
“...응?”
“태사부라매. 그럼 소율 잘못이겠네.”
“아니... 이놈이 정말!”
찰싹찰싹 하고 때려지는 소율의 손길.
하도 맞아서 때릴만한 곳을 전부 쳐내니 소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후우... 아무튼, 그래. 무진이 넌 항상 몸 안에서만 흐름을 만들어 내잖느냐.”
“...그렇지.”
“왜 안쪽만 신경 쓰고 밖은 나몰라라 하느냐?”
“그래서 밖으로 내뿜잖아.”
극한의 회전을 마치 사정하듯 전부 토해내는 게 나선파륜권의 기술이니까.
“그건 네가 잘하는 씨뿌리기랑 다를 바가 없잖느냐.”
"으음..."
부부는 일심동체라.
소율도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내 웃음의 의미를 깨달은 그녀가 가볍게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본녀가 보여준 나뭇잎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다. 본래는, 이렇게.”
"...?"
슬쩍 떨쳐낸 소율의 도포가 살랑였다.
그리고 그 바람은 이내 근처의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감싸더니, 끝에 달린 나뭇잎을 톡톡 끊어와 소율의 손으로 돌아왔다.
‘...내기는 한줌도 쓰지 않았어. 어떻게?’
내가 경악한 건 다른 게 아니었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했다.
아까도 분명 내공은 하나도 쓰지 않고 나를 농락한 게 분명했다.
“간단한 손짓으로 가져올 수 있지.”
“...이거구나.”
“...흐흥, 이건 또 바로 아는 구나. 그래. 이게 본녀의 절대지경, 만유(萬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