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괜찮나요?”
“...네, 서문 소저. 굳이 문병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아니에요, 그래도 얼굴을 익힌 안면이 있으니...까요.”
연화란의 시선이 침대 옆에 앉은 서문비연을 향했다.
불안과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서문비연의 얼굴.
저번부터 느꼈지만, 사파련주의 까탈스럽고 지랄맞은 성격이라 소문난 그 외동딸이란 게 믿기질 않았다.
‘애초에 친분이 그리 깊지도 않잖아?’
해봤자 봉룡회와 무당산에서 몇 번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
목숨을 구해준 백소협도 아니고 굳이 자신을 문병하겠다고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그렇군요.”
“...네.”
그 대답 이후로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평생 누군가에게 떠받들어지며 살아온 서문비연은 딱히 할말이 없었고.
그녀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기색을 느낀 연화란도 굳이 입을 먼저 열지는 않았다.
결국 연화란에게 찾아올 수 밖에 없었던 서문비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그... 봉룡지회는, 계속 참가하시는 건가요?”
“의각의 의원님들도 그렇고, 다들 괜찮다고 하시니, 네. 참가할 거에요.”
“다, 다행이네요. 연 소저의 실력이면 8강도 분명 무난히 승리하실 거에요.”
“...감사해요.”
연화란의 눈에 자꾸만 서문비연이 소매 속에 넣어둔 손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자꾸 다른 말로 주의를 끌려고는 하지만, 저렇게 뻔히 보여서야.
무인이 소매 속에 숨길 수 있는 건 정말 많았다.
단검, 비도, 독침... 아니면 마비약같은 것도 쓸 수 있으니까.
뭐가 되었든 좋은 의도로 보이진 않았다.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이불 속의 손을 허리춤의 연검으로 가져가며 생각을 이어갔다.
‘서문비연과는 정말 별다른 관계가 아닌데...’
혹시 둘 사이에 무슨 사건이 있다면 분명 그때뿐이었다.
혈교의 습격을 받아 흐릿하게만 기억나는 본선 이후의 며칠.
분명 그때, 방안에서 본 건 코가 마비될 정도로 짙은 혈향과...
‘두 명의 여인.’
주인과 수하의 관계인 듯 부복한 여자와 천화령이 있었다.
‘가만, 당 소저도 오늘이 본선 비무라 자리를 비웠지?’
당분간의 호위라고 할 수도 있는 그녀가 사라진 이때를 맞춰 온 서문비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심이 증폭되어만 갔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흐읍...!”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갑자기 놀란 듯 숨을 크게 들이킨 서문비연이 창백한 안색으로 변한 것이 보였다.
“아, 알겠으니 제발...”
뒤이어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인 서문비연이 무언가 결심한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그녀가 소매 속에서 붉은 환단 하나를 꺼내었다.
환단은 짙은 피비린내를 풍겼고, 기억 속의 그 혈향과 너무나도 똑같았다.
서문비연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미안해요, 연 소저.”
본능적으로 거부하면 안된다는 것을 느꼈다.
서문비연은 기습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 자신에게 환단을 먹이려 했고.
그것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아직 내가 통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면 굳이 당해줄 필요가 없었지만...
서문비연의 뒤에 있을, 그녀가 쉽사리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하웁.”
결국 벌어진 입으로 서문비연이 건넨 환단을 집어삼켰다.
역겨울 정도로 퍼져나가는 피비린내.
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내고 붉은 환단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크윽...!!’
그렇게 뱃속으로 내려간 환단은 그대로 단전에 자리잡아 영향력을 발휘했다.
머릿속이 또다시 짙은 핏빛으로 물들어 가고, 맹목적인 충성심이 자라났다.
하지만 두 번이나 같은 수에 당하면 어디 가서 당당히 무인이라 칭할 수도 없는 노릇.
‘백 소협이 다룰 수 있도록 도와준 혈기.’
그동안 조심스레 건드려보았던 그걸 이용할 때였다.
다만 지금은 서문비연이 떠나갈 때까지 버텨야 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어머니를, 사파련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어요... 정말 미안해요, 연 소저...”
자신의 손을 붙잡은 채 흐느끼는 서문비연.
그렇게 겨우 눈물을 닦아낸 서문비연이 자리를 뜨고, 연화란은 그제야 의각에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가 탁하고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빨리...’
그리고 그제서야 겨우 혈기를 일으켜 환단을 감싸안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머릿속이 핏빛으로 물들어 다시 천화령의 종복이 되었을 거다.
“쿨럭...”
얼마간의 시간 후, 연화란이 선홍색 핏물을 토해냈다.
간신히 환단을 녹여내 자신을 지배하려는 것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너무, 너무 기운이 사특해...’
붉은 환단은 마치 사람의 원념과 절망을 모아 만든 듯 기운이 탁하고 사악함마저 느껴졌다.
그나마 무무신공(武舞神功)에 빗대어 정신을 붙잡고는 있지만, 이래서야 버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백소협, 백소협이...’
딸랑.
그녀가 겨우 침대 옆의 종을 울리자, 의원이 한 명 방으로 들어왔다.
피를 토한 자신을 보며 놀래 달려오는 의원.
“연 소저!!”
“당장, 당장 백 소협을 불러주세요...!”
*
“누님, 보지.”
“앗, 네 무진님.”
성의없는 말투에 소서화가 천천히 기어와 치마를 들췄다.
도톰한 보짓살이 번들거리며 언제든 자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응...”
“임신은 아직 안되니까, 운기조식 잘해놔요.”
“네엣... 앙, 하앙...”
손가락으로 슬쩍 비부를 짓누르자 새어나오는 야릇한 침음성.
안쪽을 살짝 긁어내자 어젯밤과 오늘 비무를 보며 잔뜩 쑤셔넣은 정액이 손가락 위로 툭툭 떨어졌다.
“빨아요.”
“네, 무진님... 츕, 쮸웁...”
손가락으로 그녀의 혀를 괴롭히며 축축한 촉감을 즐겼다.
켁켁대며 목구멍에서부터 진한 타액을 흘려내는 그녀.
“크훕... 츄브븝, 움...”
적당히 괴롭혀준 뒤 팔을 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힘없이 딸려와 내 곁에 쓰러지듯 눕는 소서화.
발갛게 달뜬 얼굴을 보며 소율이 이죽였다.
“푸흡, 아주 정신을 못차리는구나 서화야.”
“하아, 후... 시끄럽다 이년아, 어제 그렇게 당하고 오늘도 쉬지도 못하고 무진님한테 시달렸으니 어쩔 수 없잖느냐.”
“무진님은 무슨... 하던데로 부르지 왜.”
내 가슴팍을 사이에 두고 두 보지가 째릿하는 게 느껴졌다.
오른쪽도 왼쪽도 한손으로 바깥에 있는 모두를 굴복시킬 힘이 있는 여자들.
그런 둘이 내게 아양을 떨며 젖가슴을 부벼왔다.
‘절경이구만.’
노예에서 여기까지 오다니.
내 스스로에게 살짝 감동하며 소율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소율도 보지해야지?”
“크흠, 오늘 좋은 걸 알려줬는데 꼭 해야겠더냐.”
“흠, 오늘만이야.”
“아니, 그리도 중요한 걸 알려줬는데...”
하긴 친구 옆에서 당당히 보지 들추는 게 어렵긴 하지.
소서화도 내심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게 보였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지.’
부끄러워도 내 명령을 따르겠다는 그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니겠는가.
그래도 제자들한테까지는 안 보여준다고 일부러 지금 명령을 내려봤다.
지금 귀빈실에 나와 소서화, 소율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령과 소유는 배가 불러 오늘은 쉬겠다며 혜원각에 남았고.
당하린과 서현은 공교롭게도 오늘 둘다 본선 비무에 참가하는 날이었다.
“흠, 무난하게 올라가겠지?”
“그럼, 떨어지면 본녀의 지옥훈련이 기다리고 있거늘.”
“하린이도 그리 쉽게 떨어지지는 않을 거에요, 무진님.”
떨어지면 안되지.
둘다 이미 봉황의 자리에 있는 여자들인데.
별 걱정없이 소율과 소서화를 껴안아 살결을 부볐다.
“응, 핫... 아주, 셋만 있다고...”
“아읏... 무진님...”
침대만한 푹신한 의자를 가져다놓고 그 위에서 즐겁게 내게 달라붙는 둘을 즐겼다.
그렇게 서현과 당하린이 무난하게 본선에 오르고, 슬슬 마무리될 때쯤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장문인, 의각의 혜정입니다. 급히 백 소협을 모셔가야할 듯 합니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연화란에게 무언가 일이 터졌다는 걸 직감했다.
의각주에게 직접 부탁해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지만, 상대가 다른 방법을 쓴 듯 했다.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혜정과 함께 의각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오?”
“연 소저께서 선혈을 토하시더니 급히 백 소협을 찾았습니다.”
“먼저 가겠소.”
곧바로 대비무장을 빠져나와 의각으로 달렸다.
극성으로 펼쳐진 제운종이 평소보다 좀 더 빠르게 느껴졌다.
‘소율이 보여준 것 때문에 그런가...?’
다들 고수의 싸움을 보면 무언가 얻는 게 있다고들 하지 않는가.
나 또한 이 세상의 흐름에 관한 심도 깊은 이해를 보았으니, 마치 공기의 저항을 뚫고나가는 그 흐름 자체가 느껴지는 듯 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의각에 도착해 연화란에게 향했다.
“연 소저.”
선홍빛으로 젖어든 환자복을 입은 채 가부좌를 튼 그녀.
다급히 기감으로 몸을 읽어냈다.
“...백 소협. 무언가, 이상한 걸 먹었습니다...”
“말하지 마시오. 운기를 도울 테니 집중하시오.”
“하나만, 하나만요.”
“그럼 어서 말해보시오.”
서둘러 그녀의 등 뒤에 자리잡아 단전에 손을 댔다.
천천히 연화란의 몸에 혈기를 주입하며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서문비연. 그녀가... 천화령의 꼭두각시입니다.”
말을 마친 뒤 연화란이 눈을 감고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나 또한 눈을 감고 그녀를 도우며 방금 들었던 말들을 상기했다.
‘서문비연이 당했다라... 이상한 건 아니야.’
이미 양광에게 한 차례 잡히지 않았었나.
생사혈고는 없었지만, 무언가 다른 수가 있을 거라는 건 확실했다.
‘일단 깨어나면 더 들어야겠네. 성급히 서문비연에게 시선을 돌리면 위험해.’
그때 연화란의 몸으로 파고든 혈기에 질척하고 원념에 찬 기운이 느껴졌다.
살짝 영기를 끄집어내 살펴보니, 사람의 혼 여럿이 처참하게 구겨져 동그란 모양으로 말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혈단(血丹)...’
아마 천화령이 서문비연을 시켜 보낸 것이리라.
소서화에게 불려간 것을 보고 연화란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먹인 거겠지.
나는 영기로 혈단에 남은 원한을 감싸안으며 속삭였다.
“혈기는 전부 그때처럼 흡수하도록 하시오. 원념은 내가 처리할 테니.”
알아들었다는 듯 연화란이 다시 운기행공을 시작했고.
나는 영기로 원념을 그대로 성불시켰다.
만령곡에서 그 수많은 원혼을 날려보냈는데, 고작 이정도쯤은 어렵지도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연화란이 눈을 떴다.
“흐읍...!”
반개한 그녀의 눈에서 하얀 정광(正光)이 아닌 붉은 혈광(血光)이 뿜어졌다.
아마 혈기가 가진 바 내기를 넘어설 정도로 차오른 듯했다.
“하아, 하아... 백 소협...?”
“여기있소. 괜찮소? 경지가 한 단계 나아간 듯 한데.”
그녀의 사지에 흐르는 내기의 흐름이 더욱 활발하고 거대해진 것이 느껴졌다.
아마 혈기의 힘을 빌어 전신의 세맥을 더 뚫어낸 듯 싶었다.
“...네. 다만, 제, 제 기운이...”
“알고 있소. 이젠 거의 혈교의 무인들과 다를 바가 없어졌구려.”
“...흐윽, 흡...”
하지만 연화란의 입에선 기쁨보다는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세상 어느 누가 혈교의 무공을 익힌 자를 좋게 보겠는가.
연화란의 앞날이 험할 것이 분명했다.
“죄, 죄송해요... 추한 꼴을 보였습니다.”
“아니오.”
그렇게 한참을 흐느끼던 그녀가 내게 사과했다.
피가 흐른 입가와 눈물을 닦아낸 연화란이 나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촉촉해진 눈동자에 처연함이 가득했다.
“...백 소협.”
“말씀하시오.”
“혈기를... 다룰 줄 아시는 걸로 보입니다.”
“...맞소."
감출 것도 없었다.
계속해서 그녀에게 빚을 지우는 이유도 뻔하잖은가.
서문비연과 천화령 때문에 조금 시기가 빨라진 것 뿐.
“...부디 제게 가르쳐주세요.”
그녀가 애절한 목소리로 부탁해왔다.
며칠 고생한 탓에 조금 수척하고 핏기가 없는 얼굴.
하지만 그정도로 연화란의 미모를 감출 수는 없었다.
내가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에, 연화란이 다소곳이 무릎을 꿇으며 말을 이었다.
“두 번이나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고, 또 그런 가르침까지 받으며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연 소저.”
“저를 거둬주세요, 백 소협. 평생토록 부군으로 섬기겠습니다.”
알아서 내 것이 되겠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