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소저.”
이마까지 푹 고개를 숙인 그녀의 팔을 잡아 끌어올렸다.
거절의 뜻인 줄 알았는지 새파랗게 질린 연화란의 안색.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때의 은원에 얽매여 연 소저의 처우를 정하지 않도록 하시오.”
이쯤에서 살짝 튕겨봤다.
부군이란 건 나랑 혼인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뜻.
어디까지나 내 노예인 당하린이나, 특수한 위치인 소서화랑은 달랐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순서가 뒤에서 세는 게 빠르다면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많이 상하지 않겠는가.
내 말에 연화란이 마른 침을 삼키며 다시금 물어왔다.
“...완곡한 거절이신가요? 아니면... 아직 기회가 남아있나요?”
“연 소저도 알다시피... 이미 혼인을 약속한 연인이 있소. 내 아이를 밴 여자도 둘이지.”
“세, 셋째 정도라면...”
“음, 아닐 것이오. 아마 더 뒤이지 않을까.”
“...”
백무진의 말을 들은 연화란이 차분히 머리를 굴렸다.
아마 백세령과 소소유, 그 둘이 백무진의 부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저번에 봉룡회에서 본 주서현이라는 소저도 마음이 있다면 얼마든 가까운 사이가 될 것이고.
‘...성격으로 보아 여자가 더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지.’
무려 연회장에서 대놓고 정사를 나누는 범상치 않은 인물 아닌가.
보통의 남자들과는 다르게 색(色)을 상당히, 상당히 밝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부님이 욕망에 충실한 남자를 잡으라 하셨었는데...’
이젠 돌아가신 사부님의 유언.
홀로 산속에서 외로이 살다 죽지말고, 다루기 쉬운 남자를 잡아 오순도순 일생을 보내라 하셨었다.
당신부터가 무공의 수행을 위해 산속에서 몇십년을 홀로 보내셨으니 그리 하신 말일 터.
‘나를 들이고 나서부턴 외로움이 많이 덜하다 하셨었지 항상.’
또한 욕망에 충실한 남자는 그것만 채워주면 다루기 쉬울 것이니 이것은 홀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는 욕망 덩어리 그 자체처럼 보였다.
‘백무진.’
무당 장문인의 직전제자.
그리고 사내의 몸으로 이미 초절정에 오른 강자.
차기 장문인이라고도 불리던 백세령과는 이미 사실혼적인 관계니, 언젠가 무당이 그의 손에 쥐락펴락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물었다.
“그, 그럼... 대략 몇 번째일지...?”
“뭐, 두 자릿수는 아닐 것이오.”
“...”
이어진 백무진의 대답이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인네를 끼고 살 것이기에 저런 소리가 나온단 말인가.
연화란이 언젠가 보았던 성(性)에 관한 서책을 떠올렸다.
‘사내는 한 번 제대로 정사를 치루는 데에도 몇 주는 푹 쉬어야 한다고 들었었는데...’
만약 부인이 두 자릿수면 고작해야 1년에 잘해야 한두 번 남편과 동침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반쯤 독수공방하듯이 살기는 조금 꺼려졌다.
사랑이 없는 관계라도, 함께 지내다보면 정이 생길 것 아닌가.
그리고 이왕 부부가 된다면 그리 살기는 싫었다.
“...그리 많은 부인을 두시면 다른 부인들이 독수공방하는 날이 길지 않을까요?”
그래서 순수한 마음에 질문을 건넸다.
하지만 백무진은 무슨 소리냐는 듯 의문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건 연 소저가 걱정할 것이 아니오. 오늘도 충분히 만족시켜 주고 왔으니까.”
그의 말에는 자신감이 꽉 들어차있었다.
도구라도 사용하나 싶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 좀 외로워도 어쩔 수 없어.’
사부님의 모든 걸 전수 받고 꿈에 부풀어 뛰쳐나온 강호는 도처에 위협이 가득했다.
봉룡지회에서 무림맹주의 은혜를 받아 뒷배가 생기기 전까지는, 함부로 누군가를 믿지조차 못했다.
강호에서 ‘혼자’라는 건 그저 사냥감일 뿐이었다.
무공이 조금 강하면 뭘하는가, 결국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법이었다.
또한 평생을 걸쳐도 갚지 못할 은혜마저 입었으니, 더는 망설일 것이 없었다.
“...몇 번째든, 상관 없습니다. 그저... 백 소협이 저를 거두신다면, 평생토록 곁에 있었으면 합니다.”
“나는 내 여인을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이오.”
떡칠 때 빼고는.
떡칠 땐 조금 거칠어져도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어정쩡하게 무릎 꿇고 있던 연화란의 자세를 편히 하도록 했다.
조금 저렸는지 허벅지를 주무르는 그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어찌 부르면 좋겠소?”
“편히 하시지요. 그냥... 화란이나, 연 매정도로 불러주세요.”
“그럼 이름으로 부를게요, 화란.”
“...네, 부군.”
“화란도 밖에선 편히 이름으로 불러요.”
“네, 그럴게요.”
지나치게 공손한 그녀에게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서문비연이 왔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줄래요?”
“네, 그러니까...”
그렇게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내고, 화란의 옷을 갈아입힌 후 혜원각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나와 나를 맞이하는 보지들.
대표로 나선 소율이 입을 열었다.
“어딜 갖다 이제 오느냐. 서현이랑 하린이와 저녁을 하기로 했거늘.”
“사람 좀 구하다 늦었습니다.”
내 옆에 파리한 안색의 연화란을 보더니 안쓰러운 눈빛을 하는 소율.
연화란이 멍하니 그녀들을 바라보다 포권을 올렸다.
“...여, 연화란입니다.”
“혈기에 당할 뻔한 걸 구했습니다. 앞으로 한 식구가 될 거니까, 잘 지내보죠.”
한 식구라는 말에 째릿, 하는 시선이 날아들었다.
뭐, 그녀들의 시선은 알바 아니었다.
하늘 같은 남편이 데려오면 알아서 잘 지내야지.
“따라오거라.”
“...네, 장문인.”
소율이 연화란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가 따라들어갔다.
아직까지도 소원을 꿍쳐두는 서현과 밝게 웃으며 내 곁에 달라붙은 당하린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선 소서화가 허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린이 너도 이미 당했었구나.”
“죄송해요, 맹주님. 하지만 주인님께 당해낼 여인이 있겠나요, 후훗.”
내게 굴복했던 날이 떠오르는지 얼굴이 발게진 소서화.
그리고 그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서현에게 과일을 먹여주며 시선을 돌렸다.
뭐, 안에 있던 여자들은 대충 다 알아챈 것 같지만.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연화란에게 귓속말을 했다.
“화란, 식사를 마치면 지하의 연공실로 태사부님과 함께 가있어요.”
“네, 무진.”
소율에게는 이미 말을 해뒀다.
옛날에 거둔 혈동자들이야 밖에서만 활동하니 상관이 없었지만.
연화란의 혈기는 어떻게든 외부로 드러나지 않을 방법을 취해야했다.
‘천화령도 들키지 않을 방법이 있으니 화란에게 조치를 취했겠지.’
아니면 연화란을 혈교의 간자로 만들어 자기가 죽인 후 공을 쌓는, 그런 방식을 취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그렇게까지 간다면 그냥 다 까발리고 한바탕 싸울 수 밖에 없을 거다.
“오라버니, 오늘은 밤까지 있어주는 것이에요.”
“맞아요, 무진. 요새 너무 쓸쓸했다구요.”
“미안해, 둘다.”
그리고 생각을 마친 내게 세령과 소유가 다가왔다.
둘 모두 이제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수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잘해주기를 바래야지.’
이미 호북에서 실력있는 의원과 유모를 구해서 대기시켜놓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출산 전까지는 근처에서 계속 따라다니면서 둘의 상태를 살필 거다.
“얼른 올라가자.”
“흐흥, 오늘도 홍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이에요!”
“무령이도 좋아하겠네요. 무진이 들려주는 동화는 신기한게 많아서 저도 즐거워요.”
폴짝폴짝 뛰며 나를 이끄는 소유와 선선히 팔짱을 낀 채 함께 걷는 세령.
무령인 나와 세령 사이의 아기 이름이고, 동화는 원래 세계의 것들을 들려준 거다.
인어공주니 백설공주니 잘 먹힐만한 것들로 말해주니 세령과 소유도 항상 눈을 반짝이며 함께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둘의 손을 잡은 채 위층의 침실로 올라갔다.
*
“잘 재워주고 왔느냐.”
“후... 동화책 읽어주는 것도 빡셉니다.”
“너처럼 음탕한 녀석이 아빠 노릇을 하려니 어색한 게지. 아가들은 순수하게 크면 좋으련만.”
“애엄마 둘이 순수하니 둘을 닮겠죠.”
이건 진짜 그러길 바랬다.
특히 딸이 태어나면 자기 엄마들을 닮는 게 더 좋겠지.
‘아들이면... 흠, 뭐 방법이 있겠지.’
아들이든 딸이든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기왕이면 딸을 바랬다.
어찌되었든 남녀가 뒤바뀐 세계니까... 자식들은 어떤 재능을 타고날지 모르니.
“그럼 슬슬 시작하죠.”
“저는 언제든 준비되어있어요, 무진.”
“혹여 일이 터지더라도, 우리 태사부께서 어떻게든 수습해줄 거니 너무 걱정하지마.”
“실없는 소리 하지 말거라.”
“이미 혈단으로 인한 원념은 제거를 했으니,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겁니다.”
다시금 가부좌를 튼 화란의 뒤에 앉아 등에 손을 대었다.
‘이렇게 계속 혈기를 받아들이면 나도 맛이 가려나?’
혈기가 불길하고, 또 끔찍하게 느껴지는 건 그 수행의 방법 때문에 그렇다.
그냥 사람 하나 죽이면 그 사람분만큼의 내공이 쌓이는데, 이렇게 쉬운 길을 마다하고 정종심법처럼 호흡으로 내공을 쌓는 힘든 길을 갈 이유가 없는 거다.
‘막말로 거의 뭐 인구수 조절하는 거지.’
당연히 그런 원통한 죽음으로 쌓아올린 기운이 깨끗할 리가 없고.
피 자체가 주는 거부감과 겹쳐져 혈기(血氣)는 사마외도로 분류되어 배척당하는 것이다.
거기에 혈사를 일으켰던 혈교까지 있으니 이젠 그냥 무림공적 수준.
그래도 이미 한 번 정화를 해보았으니 마음이 편했다.
또한 혈단 때문에 혈기가 폭증하기 전에는, 분명 연화란의 기운에서 혈기(血氣)의 사이함이나 끔찍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다.
“마음 편하게 먹어요, 내 생각대로면 꽤나 쉽게 풀릴 거니까.”
“...고마워요, 무진. 정말로...”
“아니에요. 말했잖아요, 화란. 내 여자가 되기로 했으니,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지랄염병을...”
“크흠! 태사부, 시작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서윗한 분위기 좀 잡고있는데 소율의 욕때문에 다급히 말을 끊었다.
슬그머니 나를 흘기며 송문고검을 화란의 무릎 위에 얹는 그녀.
“송문고검은 사마를 정화하고 정신을 맑게해주는 힘이 있으니 도움이 될게다.”
“가, 감사합니다 장문인...”
화란이 감동한 듯 조금 울먹였고, 슬슬 시작하려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어려울 것 없어요. 처음 혈기를 나와 순환했던 것처럼 해요.”
“네, 무진.”
곧 맞닿은 손바닥으로 서로의 기운이 순환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저번처럼 질척하고 끈적한, 혈기 특유의 느낌이 느껴졌다.
‘쉽겠네.’
그래서 조금 마음을 편하게 먹었고.
내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는 줄로만 알았다.
머릿속에 그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전까지는.
-아하하하!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역시 넌 재미있는 사내야, 백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