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반갑구나, 백무진.
순간 벌어진 상황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방금 들려온 목소리는 천화령, 아니 앙천화의 목소리가 분명했으니까.
나도 모르게 의문이 터져나왔다.
‘...어떻게?’
-본녀가 굳이 너에게 알려주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즐거움과 흥분으로 가득한 목소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도대체 이 미친년이 어떻게 내 정신 속으로 들어온 거지.
점점 핏빛 기운이 퍼져나가는 걸로 보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마음이 빠르게 진정되어갔다.
어쩌면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조금쯤은 짐작했던걸까.
-아하하, 그 검은 콩같은 대가리를 굴리느라 바쁜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구나.
‘...’
-그러게 아무거나 넙죽넙죽 받아먹지 말았어야지, 아하하하.
나른한 웃음소리에서 온몸에 소름이 돋을 듯한 섬찟함이 느껴졌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지루한 본녀의 인생에 이렇게 즐거운 날은 처음이니까.
‘뭘... 하고 싶은 겁니까?’
조심스레 물음을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조용히 하라는 듯 쉬잇, 하며 소리를 냈다.
-철마차에... 저 요상한 복식은 또 뭐고, 건물이 이리도 높게도 올라갈 수 있구나... 참으로 신비한 세계로다.
당연히 중세시대 중국인이 보기엔 눈이 번쩍 돌아갈만한 신비한 것들이 많겠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원작에 대한 기억이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내 불안과 긴장을 읽었는지 그녀가 손을 휘휘 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하하, 그리 무서워할 것 없대도. 그저 마음 같아선 평생 내 옆에 두고 이리 보고 싶구나.
그딴 말을 하는데 어떻게 그러냐고, 시발.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이 말이 되질 않았다.
다만 앙천화의 말로 미루어보아 내가 받아들인 것 중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연화란이 삼킨 혈단일게 분명했고.
그래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말이 안되는 상황은 분명...
‘절대지경의 기술이군요.’
-호오,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는구나. 본녀가 알기로 곤륜노들은 그저 노예에 불과해 명령한 것 말고는 생각을 못한다던데... 흠, 이런 세상을 알고있으니 역시 평범한 자는 아니겠지.
미친년이 숨 쉬듯이 인종차별을 시전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하나는 확실해졌다.
내 기억을 읽는 듯해도 결국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아닐 거다.
그러면 저딴 발언은 못하지.
-그건 그렇고, 색(色)에 한이라도 맺혔느냐? 저 이계(異界)의 기억에선 그러지 않는데, 유독 중원에서는 미친 듯이 색을 탐하는구나.
‘...여인을 좋아할 뿐입니다.’
-아하하하, 정력이 정말 대단하구나. 하초를 잘라서 통에 보관이라도 하고싶어. 본녀의 짧은 생에도 이리 큰 것은 처음이다.
시발... 한 마디 한 마디가 섬뜩하게만 들려왔다.
그러면서도 계속 머릿속으론 상황을 타계할 방법을 생각했다.
그 후로도 앙천화의 기억구경은 조금 더 이어졌고, 이내 만족한 듯한 탄성이 작게 들려왔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제 머릿속에 들어앉으셨으니 원하는 게 있으시겠죠.’
-흠, 그래... 너를 어떻게 할까 고민이구나. 최근 본녀의 심기에 몇 번 거슬렸던 일들은 전부 네놈 때문이겠지. 그 죄를 생각하면 골백번 죽여도 부족하나...
생각에 빠진 듯 고요하게 이어지는 침묵.
천천히 영기를 모으며 반격을 준비했다.
만약 소율처럼 정말로 법칙을 뒤틀어버리는 절대지경의 기술이라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결이 다른 영기를 사용하는 게 맞았다.
평범한 내공의 기술로는 앙천화를 자극하는 꼴만 될 뿐이니.
그렇게 이어진 침묵 속에서 앙천화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마침 말이다. 본교의 호법 자리가 곧 빌 것 같느니라.
‘양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너와는 꽤 인연이 있더구나. 기회를 줄 터이니 네 손으로 죽여버리고, 본녀를 따라 혈교로 가서 호법이 되는 것은 어떻느냐?
장난스런 말투에서 항거할 수 없는 폭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대화를 이어가며 반격의 물꼬를 터야했다.
‘제 기억을 읽으셨으면 아시겠지만, 이미...’
-계집들을 싹 죽이면, 상관없겠지?
‘...’
순간 그녀가 환상이라도 보여준 듯 끔찍한 장면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소율, 세령, 소유... 그리고 내가 아끼는 여자들.
심지어 세령과 소유의 배는, 내 아이가 있을 배는...
‘...그만. 제발 그만 해주십쇼.’
-아핫, 포기하는 것이 빠르구나. 재미없게.
‘뭐든 할테니, 그녀들을 건드리진 말아주십쇼.’
끔찍한 광경에 분노하는 동시에,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리고 반격을 위해 준비하던 영기도 천천히 무로 되돌렸다.
-눈치도 빠르구나. 본녀의 생각을 읽은 게냐?
‘앞으로 모실 분이니 의중을 잘 헤아린 것 뿐입니다.’
-아하하핫!! 즐겁구나, 즐거워. 그래, 이리도 본녀를 생각해주니 계집들은 살려주마. 대신 양광은 네놈 손으로 죽이거라.
‘...죽이지 못하면요?’
-그정도도 못하는 놈은 본녀도 필요 없느니라. 무당이랑 함께 전부 지워주마.
살벌한 선언에 입을 다물었다.
대신, 좀 더 차분하게 생각을 이어갔다.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찬 건 진짜 앙천화가 아닐 것이다.
절대지경의 기술로 만들어낸 무언가라던가, 혈교의 비술일 수도 있었다.
원작에서도 이름만 나오고 제대로 밝혀지진 않았던 그녀의 절대지경과 다른 능력들.
그러니 여기서 반격을 해봤자, 분노한 그녀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분명, 환상으로 보았던 일들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겠지.
‘...알겠습니다. 양광을 반드시 죽여서 쓸모있는 놈이란 걸 증명하죠.’
-그래, 본녀는 이만 가보마. 때가 되면 부를 터이니, 즐겁게 지내도록. 뭐, 그동안의 처신은 알아서 할 것이라 믿는다.
말이 끝나자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기운이 심장으로 내려가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뒤이어 꽈악하고 손으로 붙잡은 듯 강렬하게 심장을 옥죄는 기운.
‘다음에 보자꾸나.’
경고를 마친 앙천화의 기색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크읍...”
“무진아?”
눈을 뜨자 시간은 단 몇 초도 안 지난 듯 보였다.
나는 천천히 연화란과 기운을 순환시켰고, 무난하게 혈기의 통제에 성공했다.
깊게 숨을 내쉰 연화란이 내게로 몸을 돌렸다.
“수고...했어요, 화란.”
“무진 덕분인 걸요, 전부. 평생... 갚도록 할게요.”
“...”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인지 화란이 볼을 붉혔다.
그 모습에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리며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잠깐 갸웃하다가 내 안색이 좋지 않다는 걸 느꼈는지 소율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화란.
조금 부끄러워하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장문인, 백 소협이 많이 힘든 듯하니 바로 올라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 안정이 되었느냐?”
“네, 완벽합니다.”
“그래, 먼저 올라가거라.”
소율의 말에 화란이 먼저 연공실을 나섰다.
그리고 가만히 가부좌를 튼 내게 소율이 다가왔다.
천천히 벌어지려는 입술을 살짝 고개를 흔들어 막았다.
앙천화가 간 듯 보이지만, 믿을 수 없었다.
“...올라가자꾸나, 무진아.”
“네, 태사부.”
그동안 언제나 붙어있었던만큼, 그녀는 무언가 이상한 기색을 알아차린 듯 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앙천화의 절대지경, 진혈(眞血).
이것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
“태룡전 본선 제3경기!!! 백무진! 오룡철! 비무장으로!!!”
익숙한 심판관의 목소리가 비무장에 울렸다.
아마 각주 중에 한 명이었던 것 같은데... 딱히 기억은 안 났다.
“후...”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이 비무장을 비췄다.
덥다는 기분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게 이 시커먼 피부 때문인지, 머릿속에 가득찬 고민 때문인지, 아니면 심장에 자리잡은 선홍빛 기운 때문인지.
“후우우...”
자꾸만 한숨이 터져나왔다.
어제 하루 아무도 들이지 않고 홀로 밤을 지샜다.
새카만 피부와는 대조적인 하얀 손바닥이 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꾸욱 주먹을 쥐어 떨림을 억눌렀다.
“무진!!”
“오라버니!!”
조금 위쪽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른 배를 껴안고 날 향해 열심히 응원하는 그녀들.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 관중석을 바라봤다.
‘...앙천화.’
그 누구보다도 이질적인 붉은 색의 여인이 눈에 띄었다.
가히 경국지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외모.
그녀의 주변 관중들만 무언가에 홀린 듯 오로지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편안히 의자에 기대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을 보거라. 본녀가 아름다기는 하다만, 상대에게 집중해야지.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시선을 거뒀다.
그제야 내 상대가 열심히 주둥아리를 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드시 네놈에게서 선녀님을 되찾을 것이다!!”
“하.”
“분명 껌둥이 네놈에게 속아 저렇게 되신 것일터!!”
개소리를 지껄이는 놈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심판관을 바라봤다.
내 시선에 살풋 볼을 붉히며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그녀.
“비무, 시작!!”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오뭐시기가 나에게 돌진해왔다.
하품이 나올 정도의 속도에 적당히 그를 관찰했다.
“하아압!!!”
보아하니 무기는 검.
내기가 정순하니 어디 정파 무공을 배운 듯했다.
‘원래대로면 좀 더 놀고 끝냈겠지만...’
머릿속이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찬 지금 길게 이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빨리 끝내고 저 뒤쪽 관중석의 질척한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
“내 검을 받아라 껌둥아!!”
본선부터는 본격적으로 내기를 사용한 초식이 가능하기에, 녀석은 자신의 최대 절초로 달려드는 듯했다.
그 모습에 나는 가볍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렸다.
공륜(空輪)
“엇?!”
달려드는 검의 흐름을 손가락으로 휘감아 한바퀴 빙 돌렸다.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도는 오뭐시기.
‘두식이한테 한 방 먹일 때도 이랬던 것 같은데.’
문득 떠오른 옛날 생각에 피식 미소를 지으며 팔을 뻗었다.
콰앙!!
“커허억!!!”
오뭐시기가 피를 토하며 비무장 바깥으로 훨훨 날아갔다.
정적이 흐르던 비무장을 관중들의 함성이 덮어갔다.
“태룡전 본선 제3경기! 백무진 승(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