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167화 (167/230)

비무를 마친 뒤 귀빈실로 가지 않고 대기실에서 머물렀다.

비무장 양쪽으로 나뉜 두 개의 대기실 중 우연히도 나와 같은 대기실에 있던 무양이 내게 다가왔다.

“형님, 안색이 좋지 않으시오.”

“...그럴 일이 있다.”

“그러지말고, 이 아우가 도울 것이 있겠소?”

왠지 이놈이 도와준다 하니 살짝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고 걱정되어 물어오는 이를 내칠 수도 없는 노릇.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은지 무양이 입을 열었다.

“형님, 내 목탁만 두드리던 스님들 몇 눕혀보니 깨달은 게 있소이다.”

“...뭘 깨달았는데?”

“결국, 안되는 건 없다는 것이오. 솔직히 형님께 가진 것도 다 뺏기고, 색공 하나 들고 아미산으로 갔을 땐 막막했소이다.”

하긴, 아미파가 그래도 불법을 공부하는 곳이라 무양에겐 상극인 곳이었을 거다.

생각해보니 나도 너무 무책임하긴 했었다.

“하지만 말이오, 내 진심으로 뉘우치고 지금의 스승께 죄를 고하니 그분께선 부처의 이름으로 모두 용서해주셨다오. 마치...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지.”

“그래보이긴 한다.”

색공 특유의 느낌은 하나도 없고, 소림의 청하와 비슷한 기운을 지니고 있으니.

이놈도 꽤 재능이 있는 놈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 기분을 아미의 모든 스님들께 전하려 노력했다오.”

“...”

“길고도 희열 넘치는 시간이었소.”

나를 바라보는 무양의 눈동자는 맑기 그지없었다.

뭘 전하려 했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불가에서 새로 태어난다 함은 열반과 다를 것이 없잖소? 맨 처음은 내 스승이었소. 가장 격렬히 저항하셨던 분이었지. 하지만 스승께선 나를 통해 새 세상을 깨달으시고 제일 앞장서 나를 도우셨소.”

“...크흠.”

“이해하오. 내가 깨달은 건 속세의 인물들은 쉬이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니. 허나 중요한 건, 결국 이 아우가 성공해서 이리 돌아오지 않았소? 형님도 고민이 있다면 이 아우가 몸소...”

“아니, 괜찮다.”

이 미친놈이 드디어 나까지 사정권에 두는 건가 싶어 바로 끊어냈다.

식겁한 마음에 살짝 엉덩이를 녀석의 반대편으로 붙였다.

“쩝, 알겠소. 뭐, 형님께선 남녀간의 일로 깨달음을 얻고 계시니, 이 아우가 참견할 것은 아니겠지.”

“...그래.”

아쉬운 듯한 녀석의 말투에 식은땀이 흘렀다.

곧 바깥에서 무양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가보겠소이다. 형님께서 바빠보이시니, 맡기신 일은 따로 잘 진행하겠소.”

“그래, 부탁한다.”

“나중에 같이 아미나 놀러가봅시다. 그럼.”

자비로운 미소와 함께 합장하는 녀석을 보내고나서야 긴장이 탁 풀렸다.

뒤이어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나왔다.

“하, 하하... 식겁했네.”

그렇게 녀석을 보내고나니 심장을 옥죄는 듯한 불안과 긴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앙천화의 기운은 여전히 심장에 머물렀지만,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결국 안되는 건 없지.”

너무 쫄아있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까지 당해본 건 처음이라, 나도 꽤 주눅들어 있었던 게 확실했다.

당장 사단이 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분명 할 수 있는 게 있겠지.

노예 새끼가 무당파 대가리까지 올라왔는데.

혈교주 대가리 하나 못 딸까.

‘아니, 그래도 좀 힘든가.’

아무튼, 지금은 숙이고 있을 때였다.

*

다음날 태룡전 2차 본선이 치러졌다.

남자놈들 비무는 별 관심이 없어서 나는 지하연공실로 향했다.

가벼운 걸음걸이 사이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소율이 이년, 이런 곳을 또 꿍쳐놨다니.”

“뭐... 산속에서 명상하는 게 좋다니까. 나 때문에 일부러 다시 개방한 거야.”

얇은 도포 하나를 걸친 채 나를 따라오는 서화.

그녀가 살며시 내게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절대지경이라... 뭐, 네녀석도 한 번 노려볼 때는 됐지.”

“누님의 절대지경은 뭐야?”

평소에도 보지년에 무진님 이럴 순 없으니 적당히 말을 놓으며 물었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지만, 앙천화가 제대로 나를 부리기 전에 절대에 오르면 분명 타계책이 생길 거다.

‘그래도... 어려울 것 같긴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에 기대는 수 밖에 없었다.

“흠, 그렇게 당당하게 물어봐도 되는 것이 아닌데...”

“소율이는 이미 능력까지 싹 다 알려줬는데?”

“그거야... 쯧, 혈교주 일도 있으니 본인도 알려줘야겠지. 대신...”

슬쩍 커다란 젖탱이를 비벼오며 눈을 깜빡이는 서화.

팔뚝으로 살며시 밀어내며 낮게 답했다.

“당분간 아무하고도 관계를 맺을 생각은 없어.”

“...뭐?”

내 말에 서화 누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다.

“네가? 어디 아픈 게냐? 응? 다쳤어? 아니면 미친 게야?”

“아니, 읍...”

그렇게나 충격이었는지 단박에 달려와 내 볼을 잡고 늘어지는 서화.

간신히 손을 잡아 떼어놓고 말을 이었다.

“사정이 있어.”

“사정은 네 자지에서 정액이 나오는 게 사정이고. 무슨 죽을병이라도 걸렸느냐?”

죽을병이라면 병이긴 하지.

앙천화가 무슨 수작을 부려놨는지 모르니 당분간 섹스같은 밀접한 접촉은 피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무튼.”

“아니 왜! 어제도, 혼자... 위로하다 잤는데!!”

“크흠... 말 못할 이유가 있다니까.”

“이익... 그렇게 싸질러대니 정력이 후달리는 거 아니냐! 어!!”

미약에 푹 절여져서 극태 흑자지로 극락을 맛보자마자 내려진 청천벽력.

그녀가 내 멱살을 잡은 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내, 내가 어떤 말까지 했는데...!”

“서화 누님.”

그러다 살짝 싸늘해진 내 눈빛을 보더니 겁먹은 강아지 마냥 찔끔 물러나는 서화.

“밖에 나가서 보지 한 번 할까요? 사람이 없긴 해도 무당파 제자 몇은 순찰 돌텐데.”

“아, 아뇨...”

아쉽게도 서현이랑은 다르게 노출증은 없는 모양인 듯 했다.

“그럴 일이 있어. 그러니까 빨리 알려나줘봐.”

“...힝.”

나이에 안 맞게 귀여운 척을 하는 그녀를 살짝 흘겼다.

입을 삐죽대며 자신의 애검 파천을 꺼내는 서화.

그 순간부터 그녀의 눈빛이 일변했다.

“흠.”

일반적인 장검보다는 날이 크고 두꺼운 장검.

가볍게 연공실 안에서 검을 휘두른 서화가 천천히 내기를 끌어올렸다.

아까의 하찮은 모습과는 달리 절로 뿜어져나오는 고고한 기운에 살짝 존경심이 일었다.

“소율이에게는 뭘 들었느냐?”

“절대란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 자신만의 영역을 가진다고 했었지.”

“그래, 그렇지. 이 넓고 넓은 사바세계에 고작 인간 하나가 우뚝 선다는 것. 절대란 그런 경지다.”

마치 바람처럼 가볍고 표표히 흐르는 소율과는 정반대의 느낌.

‘무겁다.’

일반적인 무게감과는 느낌과는 달랐다.

좀 더 근본적인 무거움, 마치 세상 그 자체가 나를 짓누르는 감각.

점점 굳어가는 내 얼굴을 본 서화가 기운을 거두며 말했다.

“허나... 대체 뭘해야 그런 경지에 오르는 것인지에 대해선 아무도 알 수 없지. 나 또한 소율이처럼 죽고 죽이고, 싸우고 또 싸우던 와중에 길을 오른 것이니까 말이다.”

“소율도 딱히 명확한 방법이 없다고 했었어.”

둘다 말하는 의미는 비슷했다.

세상에 누가 절대지경 두 명의 온전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

원작의 설정까지도 알고 있으니, 이론은 완벽했다.

“명확하진 않지. 허나 결국 의미는 일맥상통하잖느냐.”

당연히 이 세계의 창조주인 작가가 정해놓은 이론이 있으니까.

떡하니 쓰여진 이론이 있는데, 그게 뜬구름만 뒤지게 잡으니 머리가 빠개질 것만 같았다.

침울함에 젖은 내 옆에 서화가 털썩 주저앉았다.

“왠지 급해보이는 구나, 무진아. 조금만 가라앉히고, 내 말을 들어주렴.”

“...누님.”

“네가 비록 색에 미친... 아니, 많이 밝히는 놈이지만... 그만큼이나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칭찬인지, 욕인지.

하지만 그녀 또한 무양처럼 내 불안한 의중을 알아채고 말을 하는 듯 했다.

“애초에 절대란 것이 쉬운 길이 아니야. 나도 소율이도, 운휘마저도 오랜 수행 끝에 도달한 길이지. 그걸 이리도 젊은 나이에 해내려는 네놈이 진정으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고보니 운휘도 있었지.

시간이 나면 그녀에게도 가보는 게 좋을 듯 했다.

“잠깐 명상으로 머리를 좀 비우거라. 그 뒤에 절대에 관한 내 의견을 알려줄 터이니. 기술설명 같은 건 나중에라도 해주마.”

“...응.”

어차피 이런 머릿속으로 들어봤자 풀릴 것도 없었다.

어깨를 토닥이는 보드라운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진짜 위기가 닥치니 쩔쩔 매는구나, 나는.’

정말 제대로 된 위기라 그런 걸까.

수많은 위로들 속에서도 자꾸만 긴장이 턱끝까지 차고올라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그만큼, 앙천화가 보여줬던 환상은 내 흉터처럼 머릿속과 마음속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 그녀를 이겨내지 못하는 이상 평생 나를 따라다니겠지.

‘급할 것 없어. 천천히.’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빠르게 온 건지 모른다.

고작해야 일년이나 조금 넘었을까.

문득 지금까지의 일들이 떠올랐다.

냇가에서 보았던 노예상 애진 누님의 일행, 봉황각의 사군자.

세령과의 첫만남, 그리고 우리 두식이...

무림맹에서의 일들과 만령곡, 그리고 소유와 세령의 임신.

‘항상 생각했던 거지만, 언제나 꿈은 아닐까 싶었지.’

세상에 댓글 좀 달았다고 빙의라니, 시발.

선 넘었지.

그래도 원래 세계보다는 훨씬 재밌고, 즐겁고, 행복한 삶이었다.

이만한 미인들을 어디 가서 만나고, 내 여자로 만들어.

그래, 꿈은 아닐까 했던 이곳은 이제 내 삶이 되었다.

“이제 된 듯하니, 전해주마.”

맑게 가라앉은 내게로 은은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나(我)’다.”

내 삶, 내 인생, 내가 있어야할 곳.

그리고 나.

“‘내’가 바로 서야한다는 것. 싸우고 싸우다보면 어느새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르지. 소율이도 느꼈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분명히 느꼈었다.”

처음 느꼈던 서화의 기운이 내 몸 곳곳을 짓눌렀다.

소율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절대’가 항거할 수 없는 법칙으로 나를 압박했다.

금방이라도 몸이 우그러지고, 한 점으로 말려들어가 부서질 것만 같은 느낌.

숨이 거칠어지는 사이 서화가 말을 마쳤다.

“나는 그 속에서, ‘몰아(沒我)’속에서 역설적이게도 ‘나(我)’를 느꼈다.”

그녀의 마지막 말에 한순간 무언가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잊어버린 상태에서 느끼는 ‘나’.

문득 떠올랐다.

나는 백무진으로서 존재하고 있지만, 이전의 ‘나’는.

이미 사라져버린 원래의 ‘나’는 어딨을까.

식물인간이라도 된 걸까, 아니면 지구에서도 완전히 사라졌을까.

아니, 지구의 ‘나’라는 게 애초에 존재는 했던 걸까.

순간 거대한 위화감이 전신을 휩쓸었다.

지하연공실에 있는 내가, 그대로 세상에서 지워지는 듯한 끔찍한 해방감.

그 해방감 속에서 ‘나’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자그만 선혈빛의 기운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바깥에서, 익숙하게만 느껴지는 칠흑빛의 거신이 있었다.

내 시야는 거신의 것과 닮아있었다.

‘그렇구나, 나는...’

그때, 기이한 광경 속에서 의식이 선혈빛 기운쪽으로 빨려들어갔다.

“커흑...!”

“무진아!!”

입가를 타고 새빨간 핏물이 줄줄 흐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서화를 밀어내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다시, 다시 해봐.”

“몸부터 살피... 아니, 알겠다.”

입술을 깨문 그녀가 다시금 아까의 절대적인 법칙으로 나를 짓눌렀다.

거대한 압박감 속에서, ‘나’의 고개를 들었다.

“뭣...?!”

경악에 찬 서화의 목소리와 함께.

숨이 턱턱 막혀오던 절대지경의 무게감이 씻은 듯이 사라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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