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168화 (168/230)

“크하악...”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금 피를 토하며 서화의 절대지경이 나를 짓눌렀다.

다급히 손을 저어 기운을 흩어내고 나를 부축해주는 그녀.

잠깐이었지만 온몸의 기운을 다 써버린 듯 힘이 쭉 빠져나갔다.

“괜찮느냐? 방금, 방금 분명...!”

“쿨럭, 소리치지마. 머리 울려...”

“미, 미안하구나. 헌데... 진기가 거의 다 사라졌구나. 나조차도 그 끝을 알 수 없던 내공이...”

그녀의 말대로 끝없이 나를 북돋던 내공이 거진 바닥을 보였다.

이토록 강렬한 허탈감은 평생 처음이었다.

‘나’를 불러일으킨 순간, 전능감과 함께 절대에 발을 디뎠다는 걸 깨달았지만.

고작 몇 초.

아니, 그보다도 짧은 순간 후에 심한 탈력감과 함께 정상적인 감각으로 돌아왔다.

평범한 인간의 감각으로.

그 괴리감에 덜덜 떠는 나를 부축하며 서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폈다.

새파래진 얼굴색을 보더니 다급히 내 뒤로 다가가 앉는 그녀.

“가부좌를 틀거라. 조금 도와주마.”

“...응.”

곧 내 등 뒤에 얹은 서화의 손을 통해 정순한 기운이 넘어왔다.

익숙한 파둔의 힘.

내공이 끝을 모르고 넘쳐나던 단전의 바닥에 그녀의 내공이 조금씩 쌓여갔다.

“후우, 후...”

“신공을 아니 이야기가 편하겠구나. 어서 일주천을 하려무나.”

서화의 말에 따라 단천파둔신공을 운기하며 전신으로 내공을 돌렸다.

그제야 평소의 감각으로 돌아오며 끔찍한 탈력감이 사라져갔다.

‘내공이 없는 일반인의 몸은 이런 느낌이었나.’

고작 1년 새에 내공에 익숙해져있던 거다.

아무튼, 서화의 내공으로 힘입어 조금씩 아래쪽에 내기가 차올랐다.

여전히 평소보다는 한참 부족한 느낌이지만, 그녀의 내공도 무한은 아니니 다시 내 스스로 채워넣어야 했다.

“...이제 말해보거라. 방금 분명, 분명히 넌 절대에 올랐었다. 내가 느꼈던 그 감각은 분명 동급의 경지였느니라!”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서화가 흥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럴만도 했다.

나조차도 믿기지가 않아서 아직 얼떨떨한 상황이니까.

그래도 일주천을 하는 동안 생각했던 바를 그녀에게 말했다.

“...마,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런게 가능할 리가...”

“반쪽짜리야. 몇 초 되지도 않는.”

“애초에 말이 안되는 일이란 말이다!”

“내가 워낙 말이 안되는 놈이라.”

그렇게 밖에 납득시킬 방법이 없었다.

자뻑같지만 뭐 어쩌겠어, 진짜 그랬는데.

‘그래도 쉽사리 쓰지는 못하겠네.’

몸상태나 단전의 기운이나 거의 만전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런데도 겨우 몇 초만에 이런 거지꼴로 변하다니.

마치 무언가 거스른 죄로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전신의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후우, 후우...”

“괜찮느냐...?”

아직도 그 끔찍했던 탈력감이 질척하게 몸에 남아있는 듯 했다.

자꾸만 나른하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그녀에게 부탁했다.

“누님, 먼저 나가있어줘요. 혼자 좀 있을테니.”

“...소율이를 부를까?”

“아뇨. 당분간은 둘만 알고 있죠.”

“흠흠, 알겠다. 몇 시진 후에 돌아오마.”

“네.”

“아! 그... 내 덕에 깨우친 것, 잊지 말거라.”

나가기 전 새침한 목소리로 슬쩍 물어오는 그녀.

지친 얼굴로 미소를 지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도 잘 살 걸 내가 억지로 내 것으로 만들었으니, 소서화도 잘 챙겨줘야지.

그렇게 한동안 연공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오니 이미 어둑어둑했다.

무복 상의가 시뻘겋게 물든 걸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뒤질 뻔했네, 진짜.”

서화 누님을 보내고 한 번 더 시도를 해봤다.

그 절대적인 전능감 속에서 뭐라도 방법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이번엔 어림도 없다는 듯 강렬한 반동과 함께 피를 토하며 기절했었다.

‘만전의 상태에서 딱 한 번이라...’

아쉽긴 했지만,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심장을 옥죄던 앙천화의 혈기가 강대한 거신의 힘에 짓눌려 조금이나마 흩어졌다는 것.

“아무튼... 방법이 생긴 거 같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바, 여기서 멈춘 것이 다행이었다.

내 시야가 거신의 시야와 동일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분명 공허(空虛)였다.

그녀들과 아기들에 대한 사랑도, 앙천화에 대한 분노도.

그 외의 갖가지 감정들도 표백된 것처럼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나’지만 내가 아닌 것.

그게 바로 칠흑빛의 거신이었다.

‘아마 앙천화가 나를 지배하기 위해 남겨둔 기운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거신이랑 동화가 돼서 사라졌을지도 몰라.’

역설적이게도 앙천화의 힘이 나를 이곳에 돌아오게 해준 원인이었다.

그렇다고 고마운 마음은 하나도 없지만.

“에휴... 밥이나 먹자.”

극심한 허탈함과 탈력감 때문인지 공복이 심했다.

살살 배를 문지르며 혜원각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발랄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왔다.

-바쁘더냐?

우뚝하고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나른하면서도 은근한 광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앙천화였다.

“뭡니까.”

-그리 불퉁하게 대하지 말거라. 명색이 혈교의 호법이 될 자인데, 교주에게 친근하게 대해야하지 않겠느냐?

“원하는 거나 말씀하십쇼.”

마른 침을 삼켰다.

연공실에서의 일을 알아챈 건가?

하지만 그 안은 진법에 두꺼운 석벽에, 웬만한 경지로는 애초에 존재조차 모르는 곳이다.

나도 소율이 알려주고나서야 알았으니까.

‘...아니지, 알 수도 있겠구나.’

애초에 저 안에서 앙천화에게 당하지 않았나.

결국 반쯤 들킨 거라고 생각해야했다.

-그냥 말이다. 밥이나 먹을까하고 불렀느니라. 어찌, 되겠느냐?

“교주께서 부르시니 가야지요. 숙소로 갈까요.”

-흐흥, 네녀석이 부탁해 맛있는 것들 좀 들고 오거라. 본 교주가 허기가 지는구나.

그녀의 기척이 사라지자마자 재빨리 주변을 기감으로 흝었다.

하지만 더 멀리서 전음을 보냈는지 앙천화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

밝은 등이 켜진 혜원각에서 맛난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몇 걸음만 더 가면 내 가족들이 있는 곳인데.

혜원각에서 발을 돌려 무당산 중턱으로 내려갔다.

*

“오호, 무당의 숙수의 실력이 꽤나 괜찮구나.”

“많이 드십쇼. 제가 부탁하면 더 내올 것이니.”

무당산의 중턱의 한적한 참가자 숙소.

때아닌 잔칫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치 황제마냥 삼십여가지의 음식을 식탁에 올려놓고 한입씩 맛보는 앙천화.

새빨간 입술이 쉴 새 없이 오물거리며 음식을 씹어넘겼다.

“아니, 되었다. 그래도 본교의 숙수들보다는 나은 것 같구나.”

“뭐, 그쪽의... 숙수분들과는 실력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진짜로 황제의 숙수를 역임하셨던 분도 있으니까요.”

앙천화의 선홍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하마터면 그쪽 지방이라고 말을 하며 아는 체를 할 뻔했다.

‘서장이었지, 혈교의 위치가.’

흔히들 무협지의 포달랍궁이 있다고 하는 중국의 서쪽.

이 세계에선 혈교가 전부 집어삼켜서 피가 줄줄 흐르는 동네일 거다.

현재로서는 아무도 모르는 혈교의 본산.

나는 그걸 당당하게 안다는 듯 말할 뻔한 거다.

식겁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흐흥, 본교의 일을 잘 아는 듯이 말하는 구나.”

“저 역시 장문인의 직전제자입니다. 혈교에 관한 일들은 평범한 무인들보단 많이 알고있죠.”

“그래그래, 무당의 노마녀의 제자였지. 아하하, 네놈이 그년의 배때지에 칼을 쑤시면 어떤 얼굴일지 궁금하구나.”

서늘한 말투에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식사나 더 하시지요.”

“되었데도, 배가 부르면 감이 둔해져.”

시발련이.

길거리의 거지들을 일주일은 처먹일 음식을 차려놔줬더니.

거식증 걸린 것 마냥 깨작대고 말았다.

아까워서 나도 좀 먹으려다가, 앙천화의 말에 다시 젓가락을 내려놨다.

“본녀가 소개시켜줄 인물이 있으니, 인사를 나누거라.”

그녀의 손짓에 방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나를 보지도 않고 앙천화에게 걸어가 부복하는 그녀.

“교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비연. 일어나서 인사를 나누거라. 거사를 도와주고, 본교의 호법이 될 분이시다.”

그렇게 일어난 비연이라는 여자.

앙칼졌던 눈빛이 많이 순해진, 서문비연이었다.

“...비연이라고 합니다, 호법님.”

“...반갑소, 서문 소저.”

“아, 비연은 그 이름을 버린 지 오래다. 본 교주가 내린 이름을 쓰고 있지. 백무진, 너도 본 교주가 이름을 내려줄까 하는데?”

앙천화의 말에 서문비연이 몸을 잘게 떨었다.

나도 짧게 한숨을 내쉬고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려주시지요.”

“역시, 자네는 참 말을 빨리 알아들어서 좋아. 그래... 흑노(黑奴)가 어떨까 하는데? 시커먼 놈이 백(白)가라니 가당키나 하더냐?”

“...감사합니다, 교주님.”

딱히 뭐...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곤륜노나 흑노나 시발.

대신 아까 들었던 말을 물었다.

“헌데, 거사라 하심은...?”

“아, 그렇지. 오늘 흑노를 부른 이유기도 해. 이렇게... 중원놈들만 웃고떠드는 모습을 보니 배알이 꼴린단 말이지. 아니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볍게, 경고를 줘볼까하고.”

무림의 신성(新星)이 되기 위한 밑작업인가.

계속 고개를 숙인 채로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미 준비는 다 되어가고 있네. 여기 비연 소저도 그렇고, 본녀도 힘 깨나 썼지. 아하하, 재밌는 하루가 될 것이야.”

“...저는, 뭘 하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배신(背信).”

“...이미, 이리 하고 있는 것으로도 배신이 아닐런지요.”

사박사박 소리와 함께 앙천화가 일어나 내게로 걸어왔다.

넓은 등판을 쓰다듬는 손길에 소름이 끼쳤다.

“아니지, 아니야. 진정 본교의 호법이 되었다면 모범을 보여야지. 거삿날, 양 호법을 도와 닥치는 데로 전부 죽이게. 그러고 함께 복귀하는 동안 양 호법을 죽여 본녀에게로 몰래 돌아오도록.”

“돌아온다면... 어디에, 계실 건지...”

“일이 잘 풀리면, 이곳에 그대로 남아있겠지. 아하하하.”

팽팽하게 돌아가는 머리가 앙천화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아니,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그녀는 그런 나를 물리친, 아니면 참사를 막아낸 영웅으로 떠오르겠지.

“...교주님의, 명을...”

치솟는 분노와 굴욕감을 억누르며 답하려는 순간.

앙천화의 손톱이 목덜미를 지그시 눌러왔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발버둥이 너무 과하면 안될 것이야.”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요.”

찌지지직...

날카로운 손톱에 살점이 긁혀나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곧 고양이가 할짝이듯 상처에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츄릅, 흑노의 피맛은 꽤나 달콤하군. 그래도 조금 몸이 상한 것이... 원기를 보충할 필요가 있어보여.”

“마침 앞에 교주님이 남겨주신...”

“아니, 흑노가 그리 여인을 취하는 걸 보면... 아마 색공이라도 익혔겠지?”

색공이라는 말에 짧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앙천화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침, 여기 처녀가 하나 있으니... 비연을 취해 몸을 보하시게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