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173화 (173/230)

“어떻게 생각하느냐?”

“...”

오랜 시간의 침묵 후에 내어진 물음에도 쉽사리 답은 나오지 않았다.

물음의 장본인도 명쾌한 해답을 원해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답답함에 못 이겨 새어나온 물음일 뿐.

고즈넉한 산의 끝자락에 위치한 전각에서 등불에 비친 그림자가 일렁였다.

“어떻고 자시고, 여기까지 온 이상... 결승전에서 일이 벌어질 게다.”

“본녀도 그리 생각한다만...”

“소녀의 생각도 그러한 것이에요.”

만두 머리 소녀의 말에 소율의 시선이 돌아갔다.

이젠 만삭이 된 배를 찬찬히 쓰다듬는 제자의 평온한 얼굴.

허나 저 가면에 가려진 안쪽은 여리디 여린 아이인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편치 않은 몸으로 찾아와 울먹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세령이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숙의 말에 동의해요. 결승전이 벌어지면 시상을 한 후 봉룡지회는 폐막인데, 굳이 더 기다릴 이유가 없죠.”

“장문인, 저역시 맹주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한 팔이 없는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옆의 서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의견을 본 소율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뻔해도 너무 뻔하지만, 그 날 말고는 큰 타격을 줄 시간이 없다.’

애초에 뻔한 걸 알아도 쉽사리 막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혈교주 앙천화의 무력은 위협적이었다.

‘...그러니 무진이를 믿고 준비해야지.’

그가 어느 순간 혈교주의 손에 당해 멀어진 이후.

소율과 소서화는 필사적으로 무진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쪽에서 손을 뻗어도, 저쪽에서 반응 자체를 안 하니 그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을 수는 없으니, 다방면으로 수를 썼다.

‘이미 무당 안에 혈교놈들이 상당히 잠입했다. 내일은 결승전이니, 그 혼잡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겠지.’

지금까지 소수의 인원으로 봉룡지회에 나온 후기지수들을 염탐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꽤 본격적인 전투를 벌일만한 다수의 인원이 잠입해있었다.

“서화, 맹의 무인들은?”

“이미 무당 바깥에 전부 대기시켜놓았네. 최소한의 방어 인원만 남기고 전부.”

오랜 친우는 끝장을 볼 생각인지 강수를 두었다.

그럴만도 했다.

어찌되었든 혈교주가 범의 아가리 속에 들어온 형상아닌가.

심지어 그녀의 목에 비수를 꽂을 자들이 셋이나 준비되어 있었다.

‘허나 양광이 분명 올 것이고, 무진이는...’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니 눈앞이 암담해졌다.

지난 몇 주간 그의 소문을 들으며 피눈물을 삼켰다.

맨정신으로 견딜만한 치욕이 아니었다.

세령이와 소유에게는 최대한 소식을 막아뒀다.

지아비 될 사람이 그런 수모를 겪고 있다는 걸 알면,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그래. 그만한 혈교인들을 잠입시켜놓고 그냥 넘어갈 리는 없겠지. 이미 제자들에게도 당부시켜놓았으니, 내일 무슨 일이 있던 간에 각자의 위치에 최선을 다하면 될 것이야.”

“너희 둘은 오로지 몸을 보신하는 것만 신경쓰거라. 알겠느냐.”

나지막이 내려진 자신의 결정에 서화가 한마디를 보탰다.

만삭이 된 손녀와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며 그녀가 눈을 번뜩였다.

“하린이가 안내해줄 것이니 반드시 무사히 도망치거라.”

“...네.”

“네, 할머님.”

어차피 그 몸으론 도울 수 없다는 걸 아는 아이들이기에 명령을 따를 것이다.

남은 것은 내일, 천지신명이 이쪽을 봐주시길 바라는 것뿐.

소율이 모두를 물리고 혜원각의 꼭대기에 올랐다.

“하아...”

가슴이 욱씬거리며 아파왔다.

방 곳곳에 남은 그의 흔적에 더더욱 애달파왔다.

혹시 마지막이 될까하는 나쁜 생각에, 그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들춰보았다.

생각보다 얼마 없는 물건에 또다시 울적해졌다.

“못된 놈... 남긴 것이 왜 이리도 없어.”

안쪽에 정만 토해낼줄 알지, 추억할만한 것들은 당최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옷장에 있던 그의 옷가지를 품에 안고 서성거리다보니 왠 함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이 망할 방울이 아직 있었구나.”

문득 예전의 기억이 소율의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갔다.

종을 거세게 흔들며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던 색마.

-이리 오거라!! 담소율!!!

이제는 무양이라는 스님이 되어버린 색마 방원과의 기억.

고작 방울 따위가, 절대지경인 자신을 한순간이나마 이지를 상실한 바보로 만들었던 귀물(鬼物)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흐음...”

그녀가 조용히 눈을 감고 새카만 피부의 남자를 생각했다.

품에 안기면 한없이 커다래서 폭 안기는 느낌이 좋고.

아래에 달린 것은 한없이 커다래서 찌를 때마다 정신이 날아갈 듯한 쾌감을 가져다 주었다.

마치 색욕(色慾)을 형상화한 듯한 사내.

그리도 야한 것을 좋아하는 상공의 성격이라면.

혈교주에게 미약을 썼을까, 안 썼을까.

“썼겠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답이 나왔다.

안 썼을 리가 없다, 그 변태상공이.

소율이 함에 들어있던 서책을 집어들었다.

색금태양공(色金太陽功)이라 적힌 서책.

살펴보니 미색령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적혀있었다.

“...혹시 모르니.”

만류귀종이라. 고작 색공 따위는 하루면 가뿐히 익힐 수 있는 것이 그녀였다.

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소율이 색금태양공의 구결을 따라 운기했다.

어느새 새벽동이 터오고, 미색령을 품에 숨긴 그녀가 밖으로 나섰다.

*

“하여, 봉룡지회에서 봉룡위(鳳龍位)를 얻는 후기지수에겐 맹차원에서의 포상이 내려질 것이고...”

나긋한 목소리의 지루한 연설이 이어졌다.

개막식에서 천상제를 보여줬던 소율과 마찬가지로 하늘로 떠오른 소서화.

그녀가 뒷짐을 진 채 여유로운 목소리로 연설을 이어갔다.

“또한 원한다면 본 맹주가 친히 가르침을 내려줄 것이며...”

딱히 살펴보지 않아도 관중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썩어가고 있었다.

그저 떠있는 것이 손짓 한 번이면 모가지를 딸 수 있는 절대 고수라 참고 있는 거겠지.

“흠...”

“맹주님께서 오늘따라 말씀이 기시네요.”

“확실히 저런 성격은 아니셨던 것 같은데 말이오.”

“...흑노.”

비연이 내 팔뚝을 쓸어내리며 안쓰러운 얼굴을 보였다.

사파련주의 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짙은 절망과 패배감에 휩싸인 그녀의 모습.

“오늘이 지나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어떻게든 되지 않겠소. 비연은 걱정하지 말고 내 곁에 있으시오.”

“...네, 흑노.”

그렇게 30분은 이어진 연설을 끝으로, 봉룡지회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또 붙어있느냐.”

“교주님.”

“슬슬 시작하려는 듯 합니다.”

비연과 내가 바로 부복하고 다가온 여인의 발에 입술을 맞췄다.

그녀가 슬쩍 하늘에 떠오른 소서화를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곧 떨어질 년이 높이도 올라가 있구나.”

“노마녀들도 치실 생각이십니까?”

“양광과 본녀, 흑노라면 어쭙잖은 연기쯤은 던져버려도 좋겠지. 그래도... 흠, 아직은 생각이 없느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직 이 연극을 끝낼 생각은 아닌 듯 했으니까.

몸을 일으키며 앙천화를 쳐다봤다.

“곧 봉황전 결승이 시작될테니 편히 쉬시지요.”

“그럴까. 비연, 너도 들어와서 흑노나 돕거라.”

“네, 교주님.”

그녀를 따라 대기실로 들어가 야릇하면서도 굴욕적인 시간을 보냈다.

비연도 나도 이런 짓엔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앙천화의 명을 따랐다.

“히익... 응, 오옷...”

“아핫, 숫제 계집년이 사정하는 것 같구나. 뒤로도 할 수 있다니... 참, 흑노도 대단해.”

“별 것 아닌 재주입니다.”

무릎 꿇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옆에는 비연이 엎드린 채로 뒷구멍에서 정액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듯 입가에 짙은 미소를 머금은 앙천화가 물어왔다.

“거사 후에 갖고 싶은 계집이 있더냐, 흑노?”

“교주님이 계신데 어찌...”

“슬슬 비연도 질리지 않느냐. 우리 흑 호법의 정욕을 보아 다른 계집이 필요할 텐데?”

“...그리 신경 써주신다면야.”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한 여자의 이름을 말했다.

“소림의 청하가 좋을 듯 싶습니다.”

“청하라. 본녀의 결승전 상대로구나.”

“소림의 진전을 이은 비구니를 이 흑노가 길거리 창녀보다 못한 것으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아하하, 그것 참 재밌겠구나. 그래, 그럼 그리하도록 하지.”

이걸로 앙천화가 갑자기 청하를 죽여버리는 일은 없을 거다.

좀 미친 년이긴 해도 말한 건 잘 지켜주니까.

“봉황전 결승!! 소림의 청하!! 천화령!! 비무장으로 올라오시오!!”

곧 우렁찬 심판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덮고 있던 붉은 장포가 사라락 흘러내리며 앙천화가 몸을 일으켰다.

붉은색의 얇은 무복 아래로 흰 살결이 비쳤다.

"흑노가 선물해준 옷이니, 잘 입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교주님."

"감사하기는. 흑노의 취향이 알만한데. 아하하하."

그녀의 웃음에 농염한 색기가 풍겨오며 빳빳해진 자지에 피가 쏠리고 성욕이 들끓었다.

그동안 미약을 들이부은 탓인가, 갈수록 앙천화의 자태가 뇌쇄적으로 변해갔다.

“흠, 오늘 거사가 잘 이루어지면... 본녀의 발에 사정할 수 있게 해주마. 어떠하냐?”

“영광이옵니다, 교주님.”

“아핫, 역시 흑노는 직설적이어서 참 좋느니라.”

비록 죽여야할 적이지만 꼴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대기실을 나간 사이 반쯤 실신한 비연을 챙기고, 대기실 천막 안에서 비무장을 바라보았다.

“반갑습니다, 천 시주. 직접 대면하니 알겠군요.”

“무얼 말이죠?”

“시주의 기운이 참으로 강대하다는 것을요. 좋은 비무가 되겠어요.”

“그런가요?”

짧은 대화동안 살벌한 기세가 그녀들 사이에서 휘몰아쳤다.

심판을 맡은 운휘가 기세를 정리하고, 결승의 시작을 알렸다.

“봉황전 결승! 비무 시작!!”

천화령의 검에서 짙은 불길이 솟아오르고.

청하의 머리 뒤에서 금빛 후광이 비쳤다.

“부처의 형상이라!”

“선공을 양보하지요, 시주.”

합장한 청하의 등 뒤로 금빛 부처의 형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쇄도하는 천화령의 거센 불꽃.

쾅!! 콰아앙!!

연신 거센 폭발음이 울리며 천화령의 검이 청하의 부동명왕을 공격했다.

그리고 점점 격해지는 비무 와중, 청하를 향해 은밀히 전음을 보냈다.

-목숨값을 쓰겠소, 청하사태! 눈앞의 천화령, 아니 혈교주 앙천화를 죽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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