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값을 쓰겠소, 청하사태! 눈앞의 천화령, 아니 혈교주 앙천화를 죽이시오!!
청하의 담담한 얼굴에 한줄기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눈앞의 아리따운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그 혈교주라니?
‘허나 백 시주가 헛소리를 할 인물은 아니지요.’
최근 그의 행적에 의심이 갔었는데, 진정 천화령이 혈교주라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그녀에게 잡힌 것이든, 숨어들어 무언가 한 수를 준비한 것이든.
심장을 찌를 비수는 끝까지 숨겨야하는 것이 이치이니.
그리고, 그 비수를 찌를 적기가 바로 지금인 듯 했다.
“어머나, 왜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실까요?”
“무량수불. 빠르게 끝을 보지요, 천 시주.”
목숨값을 빚진 만큼,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되든 그의 말을 따를 것이었다.
다만 걸리는 것은 천화령의 안색이 백무진의 전음과 동시에 변했다는 것이다.
정말 교주라면 전음을 훔쳐듣는 건 일도 아닐텐데.
그가 실수를 한 것일까.
“아하하하, 빠르게라.”
음산한 목소리에 생각을 더 이어갈 새도 없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원래도 농염한 기운을 풍기던 천화령의 기운은, 점차 짙어지고 더욱 진해져갔다.
마치, 잠든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듯...
“음?”
“어딜 보시나요, 스님?”
그녀가 가볍게 쏘아보낸 붉은빛의 검기에 다급히 시선을 되돌렸다.
관중석의 인원들이 눈빛이 붉어진 채 부들부들 떠는 것이 언뜻 보였었다.
“아미타불. 더는 비무가 아니로군요.”
청하의 손이 순식간에 여러 가지 수인(手印)을 그려냈다.
그녀의 등 뒤의 부처의 형상이 점차 진해지더니, 이내 삼두육비(三頭六臂)의 형상을 취했다.
“청하사태가 저정도의 경지였단 말이오!!”
“허어, 명정사태께서 무림의 홍복을 키워내셨소이다!”
귀빈실의 인원들도, 관중들도 놀라운 광경에 모두 탄성을 자아냈다.
허나 한 사람만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핫, 재밌는 무공이네요. 허나 이까짓 걸로, 절 죽일 수 있을 것 같나요?”
청하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수결(手決)을 마무리 지었다.
잠시 후 삼두(三頭)가 눈을 뜨며 눈부신 광채가 쏟아졌다.
부동명왕(不動明王)
아수라파천무(阿修羅破天舞)
“죽일 수 있을지 아닐지, 시주가 판단해보시오.”
청하가 합장한 오른팔을 들어올리자, 삼두육비의 여섯 개의 팔 중 오른쪽 세 개의 팔이 하늘 높이 들어올려졌다.
그 웅장한 광경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금빛의 검이 쥐어진 세 개의 팔.
천지를 가르듯 금빛의 검이 천화령에게로 떨어졌다.
“얼마든지요, 아하하!!”
광소를 터트리던 천화령이 이내 도를 수납했다.
그와 함께 주변의 공기가 후끈 달아오르며 얼굴에 열이 올랐다.
떨어지는 금빛의 검을 보던 그녀가 입술을 요염하게 핥아내며 속삭였다.
“후후, 장난삼아 만들어낸 무공으로 어디까지 되려나?”
끔찍할 정도로 방대한 내력이 천화령에게로 모이는 것이 청하의 눈에 보였다.
곧 압축되고 압축되어진 내공이 불꽃으로 변해 타올랐다.
마치 태양을 앞둔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그녀의 도(刀).
급기야 비무장의 판석이 눈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염천화령도(炎天火囹刀)
참(斬)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금빛의 검을 향해, 불꽃이 빛살처럼 휘둘러졌다.
꽈아아아앙!!!
광대한 기파가 터져나옴과 동시에 비무장이 내려앉으며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관중들은 그 막대한 충격에 놀라면서도 비무장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커흑... 쿨럭!!”
먼지구덩이속, 청하의 입에서 선혈이 한움큼 뿜어져나왔다.
휘황찬란하던 삼두육비의 금상(金像)은 어느새 오른팔이 전부 박살나 있었고.
자신의 오른팔에서도 고기 타는 냄새가 맡아졌다.
슬쩍 내려다본 팔은 팔꿈치 아래로 존재하지 않았다.
“큽...”
재빨리 혈도를 짚어 출혈을 막고 주변을 살폈다.
비무장에 짙게 피어오른 먼지구름 사이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일격에 반으로 가르려 했는데... 흑노,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뭐긴 쌍년아, 쿨럭, 배신이지.”
“언제부터?”
“처음부터지. 내가 진짜 네 개가 된 줄 알았어?”
한줄기 광풍이 몰아치자 먼지구름이 흩어지며 비무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느새 도를 수납한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한 손으로 먼지를 날려보낸 듯 했다.
그리고 그 옆에 새카만 피부의 거한이 여인의 등에 손을 맞대고 있었다.
둘 모두 입가에서 선혈을 흘리며 안광을 빛냈다.
“가만히 있어. 안쪽에서 전부 터트려버리기 전에.”
“흑노도 성하진 않을텐데.”
앙천화의 기운과 맞서 내공이 미친 듯이 날뛰는 게 느껴졌다.
내 방대한 내공으로도, 앙천화의 몸속에 들어간 잠력을 잠깐 격발시키는 게 최대였다.
처음 피해를 입힌 것 빼고는 앙천화가 전부 자신의 내력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미친년, 무슨 내공이...’
애초부터 전음을 들킬 걸 알았다.
내가 원한 건, 앙천화가 무리해서라도 청하를 죽이기 위해 틈을 보이는 그 찰나.
정확히 공격이 맞붙는 순간을 노려, 앙천화에게 접근했었다.
‘이년이라면 분명 청하를 노릴테니까.’
자신이 최강이라고 믿는 년이니까.
내 배신보다는, 청하의 실력을 먼저 확인하고 싶었을 거다.
그리고 내 몸에 자신이 건 금제가 걸려있는데, 무슨 수를 써도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겠지.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의 앙천화에게 이죽였다.
“왜? 내가 멀쩡하니 신기해?”
“슬슬 본색을 드러낼 줄은 알았는데... 아하하, 역시 흑노는 본녀를 참으로 즐겁게 해주는 구나.”
“앞으로 더 즐거울 일만 남았지. 여기에 널 상대할 고수들이 많거든.”
흘끗 살핀 청하는 상태가 좋지 않아보였다.
오른팔은 반이 날아갔고, 안색도 초췌했다.
‘내가 안 나섰으면 일격에 반으로 잘렸겠구만.’
나는 청하의 금상이 깨지는 순간 앙천화의 내부를 진탕시켰다.
그로 인해 도의 궤적이 흔들렸고, 청하가 살아남았다.
“흑노가 이리 선물을 준비했으니. 본녀도 은혜를 베풀도록 하마.”
“잘못 움직였다간 진짜 단전이 작살날 텐데?”
“본녀가 그정도로, 무너질성 싶더냐?”
“큭...!”
누가 뭐라할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의 안쪽을 진탕시켰다.
나는 갖가지 독과 내 것이 된 진혈(眞血)을 터트렸고.
앙천화는... 내 몸에 돌고 있는 핏줄기를 전부 터트렸다.
“크하악!!”
끔찍한 고통 속에서 나가떨어진 건 나뿐이었다.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고, 입가에서 잘게 조각난 고깃덩이가 느껴졌다.
칠공에서 쉬지 않고 핏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커흑, 끄아악... 아아아악...!!”
무언가가 전신의 혈도를 바늘로 쑤시며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미친 놈처럼 몸을 비틀었다.
“역시 흑노는 그 모습이 어울리는구나, 아하하하!!”
콰아앙!!
비웃음에 찬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폭음이 울렸다.
“양광!!”
“혈교의 습격이다!!”
먹먹한 귓가로 비명이 울려퍼졌다.
저멀리 봉룡각이 시뻘건 혈기에 휩싸여 무너져내리는 것이 보였다.
가운데엔 악귀의 형상을 한 핏빛 기운이 나타나 주변을 전부 부수고 있었다.
“아악!! 살려줘!!”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 아아악!!”
관중석에선, 옆자리에 앉아있던 무인이 대뜸 칼로 주변사람들을 베어냈다.
빨갛게 물든 시야속에서도 피가 뿜어지는 광경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잘 보거라. 네가 지키려던 모든 것이 본녀의 손에 무너지는 광경을.”
“컥...”
“특별히 흑노의 연인들은, 흑노의 손으로 죽이는 상을 내리도록 하지.”
가슴팍을 작은 발이 태산처럼 짓눌렀다.
앙천화에게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와 내 전신을 덮어갔다.
‘진혈(眞血)인가...?’
항거할 수 없는 법칙이 나를 덮어씌워가고 있었다.
아직, 내가 그것을 벗어나기엔 실력이 부족했다.
약해지고 죽어가는 몸으로는 어떻게 해도 불가능했다.
‘그래도...’
그래도, ‘나’라면 다르겠지.
“음?”
봉룡각에서 거대한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청량하고 맑은, 소율의 기운.
자꾸만 감겨오는 눈꺼풀에 저항하지 않으며, ‘나’를 깨웠다.
*
“서화! 괜찮느냐!”
“아무렴! 너는 어서 무진이에게나 가보거라!!”
소율의 흐름이 비무장 전체를 덮어갔다.
무진이 앙천화를 급습한 순간, 이미 바깥의 무림맹 무사들을 불러냈다.
하지만 소서화의 말에 따라 그에게 가지는 못했다.
“사파련주. 갑자기 배신을 한 이유가 뭐지?”
“이유요. 뭐겠습니까, 담 장문인. 뻔하지요.”
사파련주 서문혜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채찍을 들었다.
못 보던 세월 사이, 그녀 또한 절대에 발을 들인 듯 쉽게 이겨낼 수가 보이지 않았다.
도와줄 다른 문파의 장로들이나 가주급 인사들 절반은 목이 떨어져있었다.
‘무진아, 조금만 버텨다오.’
그의 기운이 갈수록 약해져만 갔다.
무진의 기습을 보자마자 그 뜻을 이미 알아차렸었다.
본래라면 앙천화가 급습을 당한 순간 도와주러 갔어야하건만.
“명성이 자자한 천극혜검의 실력을 보여주세요!!”
서문혜의 손에서 채찍이 천변(千變)을 이루며 달려들었다.
바로 저 한 수에 태반이 죽어나갔다.
남은 자들은 소서화를 필두로 양광을 포함한 혈교인들과 맞서 싸우는 형세.
소율의 송문고검이 분노한 듯 검명을 일으켰다.
“본녀도 자네만큼이나 사랑하는 것들이 걸려있어, 봐주진 못하겠군.”
“오만하십니다 그려!!”
딱딱하게 굳은 소율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세상 모든 것에 깃든 흐름이 그녀의 손에서 아름답게 피어났다.
“크윽...!”
서문혜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벌처럼 쏘아진 채찍이 마치 파도에 휩쓸린 듯 어지러이 허공을 나돌았다.
벌레 털 듯 가볍게 휘젓는 담소율의 손에 평생의 깨달음이 담긴 일격이 먼지처럼 흩어져갔다.
‘같은 절대인데도, 이 나를 갖고놀 듯이..!’
무너진 봉룡각 전체에 파공성이 울려퍼지고, 채찍이 남긴 거친 흉터가 가득했다.
허나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오는 하얀 사신의 옷엔 한가닥 상처도 없었다.
하다 못해 저 나풀거리는 옷도, 치렁한 머리카락 한 올조차 스치지 못했다.
“이익... 나 또한 포기할 수 없단 말입니다!”
심장에 박힌 혈기가 자신의 분노에 반응하듯 대량의 기운을 쏟아냈다.
그에 힘입어 서문혜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녀가 일평생 추구했던 것은 끝없는 변화.
감히 사람의 눈 따위로는, 쫓을 수 없는...
“아...?”
어느새 다가온 백색의 사신이 만변(萬變) 위로 검을 느릿하게 내리치는 것이 보였다.
바늘 하나 통과하지 못할 거대한 기운 사이로 아무런 저항없이 다가오는 서늘한 칼날.
마치 원래 그래야하는 것처럼.
그녀를 위해 길을 열어주는 것처럼.
검이 몸을 베고 지나갔다.
서걱.
“컥...”
자신의 평생을 무념한 얼굴로 베어낸 담소율이 곧바로 옆을 스쳐지나갔다.
신경 쓸 잠깐의 여유도 없다는 듯한 무관심에, 서문혜의 얼굴이 허탈함으로 물들었다.
“연아야...”
허물어진 그녀의 신형이 바닥을 굴렀다.
소율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곧바로 비무장으로 몸을 날렸다.
“무진아!!!”
사내는 여인의 발 아래에 무력하게 쓰러져있었다.
이미 끔찍한 혈기 속으로 몸의 대부분이 삼켜져가고 있었다.
“아하하하!!! 늦었느니라, 천극혜검! 네 사내는 완전한 본 교주의 꼭두각시가 되어 태어날 것이야!!”
앙천화가 광소를 내뿜으며 그녀를 비웃었다.
허나, 혈교의 오래된 적을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두근.
“대체, 뭐...?”
혈기에 휩싸인 사내의 몸에서 칠흑처럼 검은빛이 반짝였다.
아까 느꼈던 위화감이 전신에 경종을 울렸다.
“큭!”
다급히 몸을 뒤로 뺀 그녀의 발이 있던 가슴을 새카만 손이 스쳤다.
“어떻게, 어떻게 그 몸으로 일어나는 게냐?”
전신의 혈도를 말끔히 박살내었을텐데.
핏물 한 줌 남기지 않고 전부 쥐어짜냈을텐데.
사내가, 얼굴마저 알아볼 수 없게 새카만 어둠으로 칠해진 사내가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