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175화 (175/230)

녹음이 우거진 푸른 산의 중턱.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곳곳에 질척한 핏물이 튀겨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다.

촤악!

“커윽...”

“하아, 하아... 내 극독에 당하고서도 대체...”

녹색 궁장을 입은 여인이 쓰러진 시체에서 손을 빼내었다.

좋은 비단을 쓴 듯한 옷 곳곳에 피가 묻어있었다.

“우리 백 부인, 소 부인께선 괜찮으신지요?”

그녀의 물음에 뒤에서 열심히 산을 타던 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른 배는 이미 뱃속의 아이가 세상에 나올 때가 다 되었다는 걸 알려주었고.

무당산의 험한 산길은 내공을 쓸 수 없는 둘에게 큰 부담이었다.

“너희들은 두 분을 부축하거라. 여기까지 강대한 기운이 느껴지니, 더욱 걸음을 빨리해야겠다.”

“존명!”

빨간 도포를 입은 동자 여덟이 세령과 소유를 도와 열심히 산을 탔다.

“윽...?”

그리고 그때, 거센 기파가 산 전체를 타고 퍼져나갔다.

강렬한 압박감에 모두가 걸음을 멈춘 채 숨을 골랐다.

“...무진.”

세령의 입에서 탄식하듯 새어나온 말에 소유와 하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이 정말로 슬펐지만.

괜한 자존심과 오기로 저곳에 남았다면 더 슬픈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어서 가요, 하린.”

“...네.”

그렇게 무진의 아이를 밴 세령과 소유가 무당을 떠나던 그 시각.

관중석은 물론이고, 거대한 비무장의 바깥에서도 병장기의 날카로운 소음이 울렸다.

붉은색을 띤 눈동자를 빛내며 수많은 무인들이 악귀처럼 달려들었다.

그에 대항해 무당의 제자들과, 산을 올라온 맹의 무사들이 목숨을 걸고 맞서싸웠다.

“큭...!”

“어서 정신차려라!!”

그런 그들에게도 비무장 중앙에서 터져나온 강렬한 기파가 덮쳐들었다.

잠깐 그것을 느낀 것만으로도 손이 벌벌 떨리고, 뒷목에서 싸늘하게 식은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끄륵...!”

“끄아아!!”

다행인 것은 혈기에 물든 혈교인들조차도 공평하게 떨었다는 점일까.

오히려 그들은 폭주하는 혈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펑하고 터지기까지 했다.

이렇게 바깥에서 피가 튀기는 격전을 치루는 사이.

대비무장의 한가운데는 오로지 침묵만이 자리했다.

‘...무진이가, 맞는 겐가?’

소율 또한 그런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눈앞에 마치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일어난 사내는, 분명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그가 맞았다.

‘허나, 풍기는 기운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불길하고 꺼림칙했다.

심지어 그의 얼굴은 칠흑같은 밤하늘로 뒤덮여 알아볼 수가 없었다.

곧 몸을 일으킨 무진이 천천히 자신의 손발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흥미롭게 몸을 살펴보다 돌연 주먹을 쥐더니, 파공성이 울렸다.

쿠르르릉...!!!

“뭣...”

대비무장의 한쪽 벽면이 완전히 무너져내려 바깥의 무당산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소율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아가 없는 것인가...!’

흡사 주화입마에라도 빠진 것 같은 모습.

무진이 주먹을 뻗은 자리에는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가의 장로가 있었고.

그녀가 있던 자리엔 발목 아래만이 덜렁 남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초절정에 이른 무인이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었다.

“아하하하! 설마, 적아의 구분조차 없는 괴물이 된 게냐 흑노!!”

바로 그때 앙천화가 광소를 터트리며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도망치려는 것인가 싶어 잡으려해도, 무진의 상태를 알 수 없어 쉽사리 손을 쓸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바로 미색령을...’

하지만 곧 그녀는 소율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듯.

손을 들어 거대한 핏빛 반월을 수십 개나 만들어내었다.

“자아, 그럼 어디 날뛰어보거라 괴물아.”

“안돼!!”

지금 무진의 상태를 보아 저런 공격을 받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방금의 그, 자신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던 그 일격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막아!!”

그녀의 명령을 받은 장로들과 소율이 미처 검을 뻗기도 전에, 섬뜩한 핏빛 반월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무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다가오는 핏빛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반월이 몸에 닿기 직전,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기이한 흡인력이 발생하더니, 핏빛 반월이 전부 빨려들어가 사라졌다.

“흐으으...”

그와 함께 그가 처음으로 소리를 뱉어냈다.

맛있는 성찬을 먹은 듯, 만족스러우면서도.

아직 한참은 부족하다는 듯, 아쉬움에 찬 탄성이었다.

동시에 미라처럼 말라있던 그의 살결이 조금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무진이 슬쩍 시선을 올려 앙천화를 바라보았다.

“흐...”

“...읏?”

순간 섬찟함을 느낀 앙천화가 공중에서 한 발 물러났다.

그녀는 수치스러움과 함께, 심장이 빠르게 뛰며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축축해진 손바닥을 으스러지도록 쥐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무어냐, 방금의 그 감각은...?’

얼굴이 검은 먹구름처럼 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텐데도.

저 속에서 탐욕에 가득 찬, 저열하기까지한 어떤 사내의 눈빛이 보인 듯 했다.

“더...”

음산하게 울려퍼지는 목소리.

다음 순간, 앙천화가 황급히 뒤로 돌며 핏빛 기막을 만들어냈다.

허나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녀의 뒤에 나타난 칠흑빛에 휩싸인 손이 닿자 허상처럼 빨려들어갔다.

그렇게 가볍게 기막을 빨아들인 손은 앙천화의 젖가슴을 스치며 허공을 갈랐다.

당황한 앙천화가 분노하며 뒤로 몸을 내뺐다.

“감히!! 이성을 잃은 괴물놈 따위가!!”

“모두 혈교주를 공격해라!!”

소율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장로들과 청하, 살아남은 인원들 전부 앙천화에게 각자의 절기를 쏟아부었다.

형형색색의 기운들이 각자의 초식으로 변화해 앙천화에게 쇄도했다.

“흥! 네까짓 놈들이 본 교주를... 아니, 이놈이 정말!!”

앙천화가 혈기를 끌어올려 무언가 하려는 족족 칠흑빛이 그것을 흡수했다.

그러곤 탐스러운 여체를 향해 손아귀를 뻗어 잡아채려했다.

허나 그 탓에 강맹한 초식들이 무진의 육체를 공격했고, 다들 놀라며 침음성을 흘렸다.

“이런!”

“색, 아니 흑룡 대협이...”

“담 장문인, 방금...”

“본녀도 느꼈네, 청하사태.”

다른 이들은 아직 이르지 못해 모르는 듯 했지만.

소율은 방금의 공격에서 알아낸 것이 있었다.

그녀는 흐름을 담은 일격이 무진에게 닿는 것을 느꼈다.

검이 상대의 몸에 닿기까지의 그 흐름을 강제로 통제하는, 필중(必中)의 일격.

아까전 사파련주를 반으로 갈라낸 것도 이 기술이었다.

‘제천검(制天劍)의 흐름을 어찌...’

허나 지금의 무진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그의 팔에서 강력한 흡인력이 발생함과 동시에 절대의 법칙은 흩어지고.

오히려 그곳에 담긴 막대한 기운만이 무진에게로 빨려들어갔다.

‘마치 무저갱같구나.’

전설상의 흡성대법(吸星大法)처럼 무진의 손은 모든 것을 흡수했다.

그럴수록 그의 육체는 이전과 같이 단단하고 오밀조밀한 근육들로 채워져가는 것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했다.

이미 반쯤 헐벗은 그의 몸이 정말로 칠흑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이익...!! 저리 꺼지거라!!”

“더...”

“대체! 대체 왜 아무것도 안 통하는 게야...!!!”

당황한 앙천화의 표정은 숫제 두려움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막대한 혈기를 일으키고, 진혈(眞血)을 끌어올려 거대한 혈검으로 놈을 내려쳐도 똑같았다.

아귀에게 먹힌 듯 핏방울 하나 남기지 않고 놈에게 빨려들어갔다.

도와줄 필요도 없이.

혈교주는 그 강대한 무위를 발휘하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이었다.

“다행입니다, 장문인. 이대로라면 혈교주를 정말로...”

허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소율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져갔다.

앙천화의 힘을 빨아들이며 변해가는 무진의 모습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불안과 긴장을 토해냈다.

‘...이대로라면, 너를 잃을 것 같구나.’

그런 직감이 들었다.

저 칠흑빛의 몸이 얼굴처럼 완연한 먹구름에 감싸인다면.

다시는 무진을 볼 수 없을 거라는 느낌.

당장이라도 무진이를 깨우지 않는다면, 끝일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꺄아아악!!! 이놈!! 더 이상 봐주지 않으마!!”

상념에 빠졌던 사이 앙천화의 팔 한쪽이 늙어죽기 직전의 노파처럼 바싹 메마른 것이 보였다.

“흐흐흐, 더, 더...!”

아마 저 아귀와도 같은 손이 닿았던 것이리라.

허나 그 때문에 앙천화도 크게 분노한 듯 거대한 기운을 방출하며 하늘로 떠올랐다.

“저건...!! 모두들 내공을 끌어올려 자신을 보하게!”

소율의 외침과 함께 새빨간 선혈빛의 혈옥(血玉)이 허공에 생겨났다.

혈옥은 세차게 회전하며, 비무장과 비무장 바깥에 잔뜩 흐르고 있는 핏줄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끼아아악!

-죽기싫어, 죽기싫어!!

-아아... 교주님!!

동시에 마치 만령곡에서처럼, 희끄무레한 영혼들이 귀곡성을 내며 혈옥으로 빨려들어갔다.

그 모습에 안색이 파리해진 청하가 소율에게 물었다.

그녀 또한 저것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저, 저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장문인?”

“...지난 혈사에 모였던, 무인들의 절반을 고혼(孤魂)으로 만든 일격일세.”

소율의 머릿속이 과거를 흝었다.

전대의 혈교주가 보였던 끔찍할 정도의 무위.

저것은, 죽을 걸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죽음이었다.

“흐으...”

그리고 그것을 보며 군침을 흘리는 무진.

소율은 저것마저 그가 흡수한다면, 아까 느꼈던 직감이 현실로 찾아올 거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소매 속의 방울을 매만지던 소율이 눈을 부릅 떴다.

무진이 저것마저 빨아들인다면.

주변에서 싸우고 있을 모든 무인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저것은 비무장을 넘어 그 밖의 모든 것까지 집어삼킬만한 끔찍한 재해(災害) 그 자체니까.

허나, 소율의 마음속 저울은 그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무진아...”

울먹이는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칠흑빛의 광인(光人)에 가까워진 무진이 그 흐느낌을 듣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다.

인간이 아닌 듯한 모습에 소율이 입술을 깨물며 미색령을 꺼내들었다.

“...!!!”

동시에 무진이 마치 고함을 치듯 큰 목소릴를 내며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한없이 느려진 시간 속, 소율은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수도(手刀)를 보았다.

방울을 흔들지 않고 검을 든다면 막아낼 수 있었다.

허나 그런다면 무진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한 번 믿어보마, 색마.’

소율은 절대지경인 자신의 영혼까지 흔들어놓았던 방울을 굳게 쥐었다.

본래는 저 위에서 악귀처럼 웃고있는 앙천화에게 쓸 물건이지만.

‘우리 상공에게도 안 통할 리 없겠지.’

따로 색금태양공의 구결을 운용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에게도 통할 것이다.

소율은 눈을 감고, 미색령에 한가득 자신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혹여나 실패할까, 만유(萬流)를 끌어올리며 방울의 흐름까지 가속시켰다.

“정신차리거라, 이 못된 녀석아.”

강렬한 기운을 양껏 머금은 방울이 새하얗게 빛나며 흔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