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천박한 본성을 숨기질 않는구나.”
“네가 본 것처럼 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 여기 놈들이랑은 다르게 성욕이 충만하거든.”
“그래, 네놈의 이계의 존재였지... 그 이해할 수 없는 변화도 거기에서 기인한 것이냐?”
“궁금해?”
“오늘이 지나면 둘 중 한 명만이 땅을 딛고 서있을테니 말이다.”
완전히 바닥에 발을 딛은 앙천화가 계속해서 물음을 던졌다.
그동안 혈옥은 안정된 상태로 점점 압축되어가고 있었다.
무슨 5층 건물만했던 놈이 이젠 작은 마차정도로 줄어있었다.
쉼없이 꿀렁이는 모습이 조금 역겹기도 하고, 마치 게임 속 슬라임처럼도 보였다.
“음?”
그리고 그 변화가 이어질수록 무언가 눈에 띄었다.
이전이라면 알 수 없었겠지만, 지금의 시야로는 분명 보였다.
압축되고 압축되어가는 혈옥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듯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모인 혈기와 영기가 극으로 치닿는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결국 끝과 끝은 맞닿아있다는 이야기.
지독한 원념과 질척한 핏줄기가 뭉쳐 만들어진 혈옥은, 어이가 없게도 점점 깨끗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아니, 깨끗하기보다는... 정순해지고 있었다.
‘저게 진짜 진혈(眞血)인가.’
저건 ‘죽음’이기도 하지만, ‘생명’이기도 했다.
육체의 혈기와 영혼의 영기가 합쳐진... 그야말로 천하에 다시 없을 영단(靈丹).
금방이라도 죽을 듯 보였던 소율의 얼굴이 생각났다.
멀쩡한 척 했어도, 이 팔로 직접 그녀를 꿰뚫은 나는 똑똑히 느꼈다.
곧 그녀의 숨이 끊길 거라는 걸.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나는 주먹을 쥐었다.
“그렇지. 넌 네발로 바닥을 기면서 멍멍거릴 거거든.”
“감히 본 교주에게...”
“슬슬 시작하지, 앙천화. 이쯤이면 충분히 기다려준 것 같은데.”
흘끗 위로 향했던 그녀의 시선이 재빨리 내게로 돌아왔다.
아직 앙천화도, 나도 원하는 수준으로 혈옥이 압축되지 않았다.
그녀 또한 내가 저것을 노릴 거라는 걸 알고 있을 터.
나는 가볍게 땅을 박찼다.
‘우선은, 살짝만.’
거신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일궈낸 절대의 경지.
저기 저 위의 하늘 속, 새카만 우주를 담아낸 일권(一拳).
내가 받아들인 것을 굳게 쥔 주먹에 담아 쾌속하게 내질렀다.
“오냐! 어디 한 번 본녀를 즐겁게 해보거라!!”
앙천화 또한 미색령으로 촉발됐던 잠력을 대부분 정리한 듯, 한결 나아진 안색으로 마주 일권을 뻗었다.
‘일격에 가루로 만들어주마, 건방진 놈.’
반쯤 완성된 진혈옥(眞血玉)덕에 몸상태는 최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주먹 쥔 자신의 팔은 위에 떠있는 혈옥처럼 맑은 혈광(血光)을 품어 더없이 단단해졌을 것이다.
멍청하게 기다려준 녀석에게 오히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을 정도였다.
‘음?’
헌데 그녀는 무진의 궤적에서 기이함을 느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새카만 어둠이 그의 신형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잔상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알 수 없는 불길함을 자아냈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추는 것은 안될 말이었다.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
앙천화가 진혈옥에서 조금 더 힘을 끌어오며 무진의 일권과 주먹을 부딪혔다.
“아...?”
“크흡...”
이토록 거대한 힘이 맞붙었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로 빨려들어간 것처럼.
그녀 또한 마지막 순간 본능적으로 팔을 빼지 않았다면 그대로 전신이 빨려들어갔을 것이다.
뒷목에 바짝 소름이 돋은 앙천화가 황급히 몸을 뒤로 내뺐다.
“무슨,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야!!!”
“쿨럭, 큽... 아직 어렵네.”
놈의 입가가 끌어올려지며 핏줄기가 흘렀다.
허나 겨우 그뿐.
자신의 팔은 놈의 칠흑빛 궤적에 들어간 순간 아예 지워져버렸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연기가 흩어지듯 감쪽같이 증발했다.
세상천지 다양한 무공이 있다지만, 저런 역천의 무공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저건 아무리 법칙을 뒤흔드는 ‘절대’라 하더라도 허락되지 않을 것만 같은 힘이었다.
‘저놈이 혈옥에 다가가서는 안돼...!’
그러다 무심코 하늘을 본 앙천화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새로운 세계를 보았을 때, 흑노의 머릿속을 파헤쳤을 때 보았던 것.
칠흑처럼 새카만 어둠, 이해할 수 없는 어둠.
하늘 밖의, 하늘.
“...우주.”
“...똑똑하네, 앙천화. 역시 교주의 자질이라 이건가.”
담담히 내뱉는 놈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저 이계인의 기억을 살피며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
천외천(天外天)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걸 절대지경으로 승화한다는 건...
“진정한 역천(逆天)의 무공이구나, 백무진.”
“이름으로 불러주네?”
“본 교주가 네놈을 인정한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놈이 천천히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칠흑빛이 허공을 칠하고 있었다.
‘허나 네놈도 반동이 있는 게지.’
저런 역천의 법칙이 절대로 그냥 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자세히 살피면 놈의 얼굴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고통을 참아내는 듯 미간은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럼 뭐해, 외팔로 날 상대할 수 있겠어?”
“오히려 팔 하나로 네놈의 ‘법칙’을 알았으니 싼값이구나. 그리고 감히 누가 본 교주의 팔이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게야?”
“알기는. 그전에 죽을텐데.”
진혈옥에서 똑하고 핏방울 하나가 떨어져내려 몸을 적셨다.
앙천화의 어깨에서 혈옥처럼 빛나는 팔이 솟아났다.
‘어우...’
예상은 했지만 직접 보니 부러웠다.
나는 잘리면 끝인데, 야발.
그래도 확실하게 통하는 걸 깨달았으니, 탐색전은 끝이었다.
혈옥도 충분히 무르익은 듯 하고, 이제 마누라를 구하러 갈 시간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줘 소율.’
그녀와의 아이는, 딸이 좋을까 아들이 좋을까.
담담히 미래를 그리며 땅을 박찼다.
“간다.”
“네놈을 죽이고, 혈세(血世)를 이룩하마. 네놈을 죽이면 아무도 본 교주를 막을 자가 없으리!!”
나도 앙천화도,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음을 깨닫고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내 팔에는 시커먼 우주의 어둠이 담겼고, 앙천화에게는 요사스러운 혈광이 흘렀다.
콰드득, 콰앙!!
“크학!”
“아악...!!”
이번엔 폭음과 함께 서로의 주먹이 튕겨져나왔다.
그녀의 팔은 반쯤 지워져있었고, 내 주먹 또한 손가락이 전부 부러졌다.
제대로 진혈(眞血)을 두른 그녀의 몸은 이젠 쉽게 지워버릴 수 없었다.
‘그래도, 힘싸움은 내가 위다.’
고작 핏덩이와 귀신 따위가 어디 우주에 비비겠는가.
절대지경은 공상의 영역이었고, 나는 상상할 수 있는 한계치까지 내 몸에 담아냈다.
앙천화를 확실히 이 세상에서 지우기 위해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걸 벼려내 만든 절대.
다만 그걸 제대로 내것으로 만들 시간조차 없었고.
그 대가로 내 몸뚱이조차 조금씩 지워지는 걸 깨달았지만.
“으아아아!!”
“짐승놈!!”
멈출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콰아앙!! 쾅!! 꽈아아앙!!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굉음이 비무장을 무너트리고 산마저 부숴냈다.
뻗어나간 기파에 절벽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히고 나무가 뽑혀나갔다.
각자의 육신을 부수고 깨트리며 나아갔다.
주변의 모든 무인들은 싸움을 멈추고,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그 거대한 파동을 간신히 견뎌냈다.
“좀 뒤져라!!”
“네놈이나 뒤지거라!!”
애새끼 마냥 악을 쓰며 서로에게 주먹질을 날렸다.
발을 내뻗어 뼈를 부러트리고, 수도로 근육과 살점을 깊게 베어냈다.
내가 그녀의 몸을 지워버리면, 앙천화 또한 내 피를 한가득 앗아갔다.
하늘의 혈옥은 숫제 새빨간 태양처럼 변해갔고.
나와 앙천화 또한 칠흑과 선혈빛의 안광을 흘리며 서로를 죽이려 이를 악물었다.
연달은 폭음과 기파로 비무장의 형태는 이제 찾을 수도 없게 무너져내렸다.
“허억, 허억, 커흐윽...”
“하아아... 후우, 만신창이로구나.”
“무리 좀... 했지.”
가슴쪽에 깊이 남은 검상을 매만지며 숨을 골랐다.
진혈옥으로 만들어낸 검이, 그녀의 몸 절반을 지워버리는 순간 폐부를 깊게 쓸고 지나갔다.
내장 안쪽에 피가 찬 느낌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역시, 네놈도 혈기를 다룰 줄 알아.”
“혈기뿐일까.”
나는 거신인 ‘나’처럼 그녀의 힘을 흡수해 몸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놈과 나의 절대로 만들어낸 법칙이 달라, 그런 짓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혈기와 점혈로 상처를 막아내는 것 정돈 할만했다.
앞에 있는 흡혈귀년보다야 못하다만.
“또냐.”
“본 교주는 불멸(不滅)이니라. 하찮은 네놈 따위가 이겨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그런 것치곤, 힘들어보이는데?”
몸뚱이 절반이 한꺼번에 지워진 건 힘든지 그녀도 육체의 재구성 속도가 느렸다.
지금 공격하면 결정타겠지만... 이를 악물고 몸을 회복시켰다.
나도 상처가 컸다.
점혈과 혈기로 틀어막아도 새어나오는 피가 상당했다.
살짝 현기증이 이는 머리를 흔들어 시야를 바로했다.
‘조급해 하지마. 착실하게 되고있어.’
이미 대비무장 일대는 내가 뿌려놓은 칠흑으로 가득했다.
남은 건 고작 비무장이었던 곳의 절반쯤?
그 위쪽과 아래는 앙천화와 혈옥이 버티고 서있어 칠흑으로 덮어씌우기가 힘들었다.
“네놈도 곧 끝이겠구나. 숨결이 거칠고, 법칙은 이전같지 않아.”
앙천화의 눈이 번쩍 뜨이며 혈광이 덮쳐들었다.
차분히 손을 털어내 혈광을 칠흑으로 지워냈다.
검게 변한 혈광 사이로 앙천화의 육신이 쇄도했다.
“큭!!”
몇 겹의 칠흑을 덮어씌워 막아내려했지만, 그녀의 손에는 태양처럼 붉게 빛나는 구슬이 쥐어져있었다.
그녀의 손이 칠흑의 장막을 찢어내고, 손에든 구슬을 내게로 슬며시 밀어냈다.
“잘가거라.”
혈옥신마공(血獄神魔功)
진(眞) 혈옥(血玉)
파(破)
힘을 끌어올려 겹겹이 칠흑을 쌓아도 속절 없이 찢겨져 나갔다.
고작 주먹만한 구슬이, 내 전력이 담긴 공격을 종잇장처럼 찢어내고 있었다.
“제기랄!!”
어느새 심장 가까이 다가온 혈옥에 내 혼백과 흘려낸 피가 빨려나가는 듯 했다.
‘이판사판이다.’
결국 부족한 건 몸으로 때우는 수 밖에 없었다.
저 혈옥은 앙천화의 영역(營域).
나 또한 더 잴 것 없이 가진 모든 것을 펼쳐낼 때였다.
여기 이곳에, 내 영역을 끌어내야했다.
꾸드드득...!
오른팔에 한계까지 내공과 법칙을 밀어넣고,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무리한 힘의 운용에 오른팔이 타는 듯 뜨거워졌다.
“뒈져!!”
흑천묵지신공(黑天墨地神功)
우주홍황(宇宙洪荒)
칠흑경(漆黑境)
손가락 끝에서부터 감각이 사라져갔다.
손목부터 팔뚝, 어깨까지.
젖먹던 힘까지 더해, 그녀의 위에 우주의 영역(營域)을 덧씌웠다.
마침내 시야에 담긴 모든 것들이 검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