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이, 대체 무어냐?”
대비무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
끔찍한 혈귀(血鬼)의 모습을 한 양광과 그런 그를 전력을 다해 찍어누르고 있던 소서화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오랜 세월 살아온 그들에게도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어둠이 뭉클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둠의 끝이 보이질 않다니?”
“크윽... 크아아아!!”
“가만히 있거라 양광!!”
그 틈을 타 잠력을 폭발시키는 양광을 내리누르며 소서화가 당황을 수습했다.
천 길 물속도 파악할 수 있고, 아무리 깊은 동굴의 어둠이라도 꿰뚫을 수 있는 것이 절대 고수의 안력이었다.
허나 저것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눈 뜬 봉사가 된 것처럼, 한 치 앞조차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아, 하아... 맹주님, 저 어둠이 점점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때 곁에서 연화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은 혈교인들을 정리하고 있던 그녀와 다른 이들도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저 정체 모를 어둠은 전보다 그들에게 가까워져 있었다.
“서현아, 네 음양기(陰陽氣)를 쏘아보거라.”
“네, 맹주님.”
소서화를 도와 양광의 혈기를 억누르고 있던 서현이 가볍게 검기를 쏘아보냈다.
혈기를 흩어버리는 기오막측한 그녀의 힘을 한 번 시험해본 것이다.
곧 흑백이 뒤섞인 반월 모양의 기운이 어둠에 맞닿았다.
“...흐, 흡수당했습니다.”
“그래보이는 구나.”
허나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어둠은 그저 조용히 다가올 뿐이었다.
‘마지막 순간 터져나온 건 분명 무진이의 기운이었다.’
혈교주 앙천화의 힘과 그의 힘.
두 가지가 양패구상하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렇게 점점 다가오던 어둠이 주변에 있던 시체와 부서진 건물 잔해까지 남김없이 해치우자, 모두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맹주님, 후퇴를... 해야할 듯 합니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다가온 운휘가 나직이 말했다.
이미 그녀 또한 저 어둠에 법칙을 담아 검을 휘둘러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도리어 그 반동으로 검의 반절이 사라져 있었다.
그 모습 또한 지켜본 소서화가 침음성을 흘렸다.
애초부터 전장이 봉룡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저 어둠은 금방 당도할 터였다.
소서화의 시야가 빠르게 주변을 흝었다.
“전황은?”
“혈옥이 사라진 이후로 저희쪽이 강세입니다. 곧 마무리가 될 듯 싶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혈교의 무인들은 대부분이 정리되었고, 양광만이 아직 버티고 서있었다.
본래라면 운휘와의 협공을 더해 쉽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혈교주의 혈옥때문에 일이 어렵게 돌아갔었다.
‘지금이라면 단숨에 죽일 수 있나?’
소서화의 눈동자가 눈앞의 거대한 혈귀(血鬼)에게로 향했다.
혈혈동자 양광의 절대지경, 혈신투귀(血神鬪鬼)는 그를 거진 불사신으로 만들어주었다.
서현의 음양기로 혈기를 흩어내더라도, 아직 그녀의 경지가 부족해 제압하는 것이 한계였다.
“맹주님, 속히 결정을 내려주십쇼.”
고민하는 동안 어둠은 대비무장을 모두 삼키고 지척까지 다가와있었다.
소서화가 입술을 깨물며 결심했다.
‘여기서 양광을 놓치면 후환이 클 터!’
남겨두고 있던 내공을 전부 끌어올리며 그녀가 크게 외쳤다.
“맹의 무사들과 무당의 제자들은 속히 무당산을 떠나거라!! 운휘, 그대가 지휘하게. 사천으로 떠난 세령이와 소유를 챙기게.”
“...존명.”
“맹주님, 전 남겠습니다. 제 힘이 있어야...”
“아니, 너도 가거라.”
“읏, 장로님!!”
맹주의 눈빛을 읽은 운휘가 서현을 챙겨 다급히 어둠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적막해진 자리, 거대하게 몸을 부풀린 양광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끄아아!! 소서화!! 네년도 저 어둠에 삼켜져 뒈지고 싶은 게냐!!”
“늙은이들은 이제 비켜줘야하지 않겠나.”
그에 소서화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곧 빛조차 삼켜지는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둘의 신형이 사라졌다.
*
한편, 사천으로 떠난 세령과 소유 일행도 멈춰서있었다.
혈동자들은 입고 있던 장포를 전부 벗어 양지바른 곳에 깔았고.
당하린은 떠나기전 의원에게 들었던 것을 상기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윽... 흐으윽...”
“하아, 하아... 홍이, 아주 나쁜 것이에요... 하윽...”
생각을 마친 그녀의 감긴 눈에서 녹색 안광이 번뜩였다.
“삼호와 사호는 주변의 민가를 찾아 아낙을 데려오거라. 의원이 있다면 불러오고. 일호는 나를 돕고, 나머지는 호법을 서거라!”
“존명!!”
자그만 체구의 혈동자들이 급히 명령대로 움직였다.
그동안 세령과 소유는 혈동자들이 깔아준 도포 위에 누워 고통스런 신음을 뱉어냈다.
‘하필이면 지금...’
당가에서 소가주직을 맡으며 갖가지 의원의 일에도 정통한 그녀였다.
약과 독은 하나였으니, 당연히 소가주로서 배워야할 덕목이었으니까.
‘그 안에 산부의 일도 있기는 했지만...’
허나 겨우 기본적인 것일 뿐, 갑자기 이렇게 되다니.
둘이 함께 산통을 호소하자 그녀로서도 머리가 하얗게 변해갔다.
그런 그녀를 보며 세령과 소유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 하린... 할 수 있어...”
“맞아요, 소녀도... 할 수 있는 것이에요...!!”
이미 하혈이 시작되어 둘의 옷은 피범벅이었다.
더 늦출 수도 없는 상황.
결국 당하린이 결심을 굳히며 둘의 곁으로 다가갔다.
“두 분, 버티셔야 해요. 알았죠?”
“무진의 아이니까, 내가... 죽더라도, 낳을 거야...”
“언니, 그런 소리 하면 안되는 것이에요... 둘 다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산통 때문에 창백하게 변한 둘의 얼굴을 보며 당하린이 준비를 마쳤다.
혹시나해서 데려왔던 의원의 것을 챙겨왔었는데, 정말로 쓰게 될 줄이야.
본래 이런 무가의 출산은 산모도, 아이도 건강하기 마련이었다.
산모는 무예를 수련해 건강하고, 내공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단전의 기운이 항상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니까.
하지만 지금은 거칠고 급한 산행에 더불어, 의원도 없이 위험한 산속에서 하는 출산이었다.
‘피냄새를 맡고 짐승들이 올 수도 있어...’
세령과 소유는 약해져있었고, 자리도 좋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근처의 아낙을 모셔왔습니다!!”
“산모는 어디요!!”
“아아, 여, 여깁니다!!”
삼호와 사호가 아낙 셋을 들춰업고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들은 도착하자마자 팔을 걷어붙이며 세령과 소유를 살폈다.
“거기, 동자 둘은 가서 물이나 한가득 떠오시게!”
“여기 아씨는 우리 좀 돕고!”
“아, 알겠소.”
삼호와 사호가 떠나며 근처의 화전민촌에서 데려온 아낙이라는 전음을 남겼다.
여건이 된다면 그곳으로라도 가야겠지만, 이미 둘의 상세는 더 미룰 수 없었다.
“깨끗한 천 좀 더 가져오시오!”
“물!!”
여기저기 아낙들의 고함소리가 울려퍼지고.
“아아악!!”
“홍이, 홍이 아주 나쁜 것이에요!!!”
“무지인!!! 아악!!”
“오라버니이익!!!”
두 산모의 비명도 산이 떠나가라 질러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늦은 오후의 햇살이 자취를 감추고, 맑은 달빛이 바닥에 닿았다.
혈동자들은 피냄새를 맡고 찾아온 늑대 무리를 해체하며 고기를 옆에 쌓아뒀다.
곧 아낙들의 밝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가씨네요, 아가씨!!”
“이쪽도 아가씨여요!”
세령의 곁에는 뽀얀 피부의 아기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고.
소유의 곁에서는 조금 까무잡잡한 아기가 앵앵대며 세차게 울음을 털어댔다.
“하아, 하아... 딸인가요?”
“네, 여기, 얼른 안아봐요.”
“자자, 이쪽도.”
둘은 모두 서로의 아기를 안고서 사랑이 듬뿍 담긴 눈으로 쳐다보았다.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아가들이 조용히 엄마의 품에 안겼다.
“무령아...”
“우리 홍이, 아주 나오자마자 엄마를 개고생 시키는 것이에요...”
둘 모두의 어미의 고충을 아는지 얌전히 품에 안겼다.
곧 타닥거리며 모닥불이 지펴지고, 노릿한 고기냄새가 작은 분지에서 퍼져나갔다.
산모 둘은 아기와 함께 임시 천막에 누워있었다.
“고맙소, 세 분 모두. 이 일은 무당파에서 반드시 보답할 것이오.”
“어이구, 도사님들이셨소.”
“아가씨들 인물이 훤하드만, 남편은 좋겄소.”
“네, 좋은 분이지요.”
“좋기는! 지 마누라를 이 산바닥에서 애를 낳게 하는 몹쓸 놈 아녀!”
하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화전민촌 사람들에게 봉룡지회니 혈교니 그런 소식이 닿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혈동자들에게 촌으로 돌아가도록 호위를 맡기고, 하린이 천막으로 들어섰다.
작은 천막 안에서 쯉쯉거리며 무언가를 빠는 소리가 가득했다.
“애기씨들이 배가 고픈가 보네요.”
“그러게요, 하린. 빠는 모습이 누구를 닮아가지고 열성이네요.”
“아주 귀여운 도야지인 것이에요.”
한날한시에 태어난 아기들이 각자 어미의 가슴을 물고 배를 채우고 있었다.
하린의 그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함에 가슴이 옥죄어왔다.
‘주인님...’
다행스럽게도 세령과 소유 모두 건강했고, 아기들도 건강했다.
하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큰 슬픔을 둘이 견뎌낼 수 있을까.
아마 둘도, 그런 불안을 품고 있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는 것이리라.
곧 다 먹은 아기들의 등을 두드려 준 세령과 소유가 피곤한 얼굴로 몸을 눕혔다.
“불 끌까요?”
“아뇨. 우리 무령이 얼굴 좀 더 볼게요.”
“소녀도요.”
둘의 대답에 하린은 묵묵히 천막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혈동자 둘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무당으로 가보거라. 만약 혈교가 승리했다면 곧바로 도망치고, 아니라면 주변까지 전부 살피고 돌아와.”
“존명!”
하린은 두 동자의 뒷모습을 보며 천막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
“독한 년 진짜.”
“몸을 내놓거라.”
“이거 부수면 너 뒈지는 거 알지?”
“혈옥이 없으면 무당의 마녀도 곧 뒈지겠지.”
반쯤 부수어진 혈옥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칠흑경으로 앙천화의 육신을 지워버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녀의 원념이 혈옥에 들러붙었다.
‘...더 시간을 끌면 칠흑경을 회수할 수가 없다.’
이미 대비무장을 넘어 무당산을 집어삼키려는 칠흑경이 느껴졌다.
이년과 더 실랑이를 하다가는, 무당산이 아예 사라질 지경.
“좋아, 사라진 오른팔을 네가 대체해라. 적당한 육신을 찾으면 널 보내주지.”
“아하하, 좋은 선택이니라.”
혈옥이 반으로 똑 갈라지더니 한줄기 핏물로 변해 내 오른쪽 어깨에 달라붙었다.
곧바로 육신 곳곳에 침범하려는 핏줄기를 제어해 어깨로 한정시켰다.
“큭... 어딜.”
“흥! 강제로 떼어낼 생각은 접거라. 그러다간 네 상반신이 전부 뜯겨나갈 것이야.”
“됐고, 혈옥에 원념은 전부 제거했겠지?”
“그래. 노마녀에게 가면 충분히 살릴 수 있을 게다.”
내 영기로도 반만 남은 혈옥의 정순함과 강렬한 생기가 느껴졌다.
악독한 것들은 전부 앙천화가 가지고 나와 내 어깨에 들러붙었을 터.
나는 곧바로 눈을 감고 칠흑경을 회수했다.
“후우...”
일부러 폭주하듯 풀어버린 탓에 조금 힘들긴 했지만, 곧 사방천지로 퍼졌던 법칙이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개판이구만.”
무당이 자랑하던 산과 초목, 아름다운 경치가 허허벌판으로 변해있었다.
칠흑경은 우주의 어둠 그 자체를 구현해내는 것.
조금만 늦었으면 진짜로 좆될 뻔했다.
그때 붉게 변한 오른팔이 내 목으로 쇄도했다.
가볍게 칠흑으로 덮으며 반발을 제어했다.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힘을 끌어냈다.
“흠, 작작하랬지?”
“아하핫, 쉽지 않겠구나.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네 몸을 차지... 아니, 잠깐... 잠깐, 아아악!!!”
“씹년이, 내가 대책도 없이 널 받아들였을까봐?”
“끄아아!! 그만! 제발 그만해다오!!”
칠흑으로 만든 갑주처럼 변한 오른팔에서 비명이 솟구쳤다.
영기와 절대를 깨우친 내게 고작 원념 따위는 별 것 아니었다.
“갈아마셔주마.”
“네놈이, 네놈이 어찌 원념을!! 꺄아아아악!!!!”
칠흑 갑주 안에서 공륜(空輪)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앙천화의 원념을 폭풍처럼 찢어냈다.
비록 그 꼴리는 몸뚱아리는 따먹는데 실패했지만, 그녀의 진혈(眞血)이 담긴 혈옥은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잠시 후 비명소리가 잦아들고, 새카만 피부를 지닌 사내가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