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179화 (179/230)

‘양광은 도망쳤나.’

멀리 붉은색의 빛줄기가 쏘아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어디 숨어있었는지 그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혈교의 무인들.

허허벌판에 널부러져 있던 서화를 안아들고 소율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쉽지만, 이젠 양광 따위가 문제가 되진 않지.’

사실 소서화는 배제하고 양광만을 칠흑으로 지워버릴 수도 있었지만.

무당을 집어삼키려는 칠흑을 통제하느라 그렇게 세밀하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어차피 혈교주 앙천화를 잃은 혈교는 손쉬운 먹잇감이다.

이번 습격으로 가족과 친지, 자식을 잃은 무인들의 분노를 쏟아낼 곳으로 적당하겠지.

그렇게 제운종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달리던 도중, 미약하게나마 이어지던 소율의 기운이 갑작스레 사그라들었다.

“...안돼.”

가슴이 싸늘하게 식으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땅을 거세게 박찼다.

순식간에 그녀의 기운이 끊긴 곳에 도착했다.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서 숙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앗... 흐, 흑룡 대협...”

“무진님...”

“맹주님!!”

달려온 무인에게 소서화를 맡기고, 인파 사이를 헤치고 들어갔다.

그들은 나를 막아서지 않고 길을 터줬다.

애초에 그리 많은 수도 아니어서, 금방 안쪽이 눈에 띄었다.

“사저, 사저... 눈을 떠요, 담 사저, 아니... 소율이 언니, 언니...”

“백 시주, 잠시 감정을 가라앉히고... 읏...”

“비켜.”

외팔로 나를 막아선 청하를 밀어내며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손에 반으로 갈라진 붉은 구슬을 쥐고선 천천히 다가갔다.

운휘의 품에 아리따운 여인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매일 아침마다 보던 얼굴이라 정겹기 그지 없는 살가운 얼굴이었다.

“...무진아. 무진아, 언니가, 소율 언니가...”

“...소율.”

털썩 무릎을 꿇어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곱게 감긴 눈꺼풀은 금방이라도 파르르 떨리며 눈을 뜰 것 같았고.

붉은 앵두같은 입술은 여전히 촉촉해서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내려간 손이 뻥 뚫린 가슴께의 구멍에서 멈췄다.

“...소율.”

떠나보낼 때만 해도 분명 미약하지만 힘차게 뛰던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 작은 고동조차 흘리지 않았다.

살결에 맞닿은 피부는 아직 따스했다.

하지만 내 손에 묻어난 피는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담소율...”

내가 알던 담소율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뜨겁고, 따스한 여자였는데.

나이에 안 맞게 소녀같고, 밤에는 여우처럼 사람을 홀리는 요부같던 여자였는데.

또한 검을 쥐면 그 누구보다 강하고, 고고하던 여인이었는데.

지금은 그 어떤 모습도 보여주지 않고 그저 잠들어 있었다.

침묵에 잠긴 내게 청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백 시주. 시주의 두 부인이 사천쪽으로 향하지 않았소. 시주께서 돌아온 걸 보면 습격은 우리가 승리했으니 서둘러 그 두 분이라도...”

“...그쪽은 다른 이들이 갔소.”

소서화가 칠흑에 삼켜지기 전 한 명령을 들었다.

전투는 내가 승리했으니, 그 둘도 안전할 거다.

“백 시주, 죽은 사람은...”

“시끄럽소. 운휘, 소율이 숨을 거둔지 얼마나 되었지?”

“채, 채 몇 분이...”

“운휘, 그리고 다른 분들께 호법을 부탁하겠소.”

다른 의문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절대의 기운을 가득 담아 나직이 이야기했다.

살릴 수 없다느니, 죽었다느니 개소리를 들어줄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모두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로 내 주위에서 벗어났다.

나는 곱게 발을 뻗고 누운 그녀의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죽지마, 담소율. 내 애 낳아준다며. 하나고 둘이고 잔뜩 낳아줘야지. 가긴 어딜가.”

손에 쥔 반쪽짜리 혈옥을 으깨어 그녀의 가슴에 흘려넣었다.

앙천화의 진혈(眞血)을 흡수해 혈기에 대한 내 이해도는 그녀와 다를 바가 없어졌다.

거기다 아직 살릴 가능성은 있었다.

현대에선 몇 분 정도는 죽어도 어떻게든 살려내지 않던가.

붉어지는 눈시울을 억누르며 소율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갔다 오라고 했으면, 살아있어야지.”

돌아올 곳이 없어지면 살아돌아온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차분히 눈을 감고, 그녀의 몸속 깊숙이 내 혈기를 불어넣었다.

아직 미지근한 온기를 띤 혈액이 소율의 몸속에 남아있었다.

그저 점점 식어가며 가만히 굳어갈 뿐.

나는 혈옥에 담긴 힘과 앙천화의 진혈(眞血)을 사용해 강제로 소율의 몸속에 피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살려낼게 내가.’

심장이 강하게 수축하며 전신으로 피를 내보내듯, 내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몸 어디 하나 빠트리지 않고, 전신세맥 곳곳으로 피를 내보냈다.

특히나 머리쪽은 극에 달한 감각으로 한톨의 오차도 없이 천천히 피를 공급했다.

거기에 더해, 혈옥 속 가득했던 정순한 생기와 영기가 소율의 몸속에 퍼져나갔다.

“...허업.”

순간 놀래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감은 눈 너머로 밝은 광채가 느껴졌으니까.

아마 소율의 전신은 지금 태양처럼 빛을 발하고 있을 거다.

계속해서 소율의 전신에 피를 공급한 나는 심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기와 영기, 그리고 따뜻하게 덥혀진 혈액을 심장에 가득 채워넣었다.

‘천천히, 손으로 살살 마사지 하듯이...’

지금의 그녀는 내공으로 최소한의 방어조차 하지 못하는 평범한 몸이었다.

숨이 끊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자궁의 내공은 그대로였지만, 사용할 수가 없을테니.

미간을 타고 내려온 땀방울이 똑똑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후욱...”

차분히 숨을 고르며, 내 심장박동에 맞추어 소율의 심장을 쥐었다.

아주 여린 꽃잎을 만지듯, 필생의 집중을 다했다.

어느새 진혈옥은 전부 녹아내려 소율의 가슴에 생긴 구멍을 메우고, 전신에 흡수되어갔다.

나는 쉬지 않고 심장을 매만지며 작은 생명의 조짐을 느끼려 애썼다.

“어, 어찌...”

“장문인께서 정말로...”

호법을 서고 있던 이들은 죽은 장문인의 모습이 산 사람처럼 변해가자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작게 숨죽여 이야기하며 기도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진조차도 암담해지는 심정을 숨기기 힘들었을 때쯤.

아기처럼 조그마한 숨결이 내쉬어졌다.

아주 작고 미약해서, 가까이 붙어있던 그만이 알 수 있었다.

“하으...”

“...소율?”

나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눈을 떴다.

눈부시게 빛나던 그녀의 광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시선을 내리자, 자기 가슴께를 매만지던 여인의 군청색 눈동자가 보였다.

더없이 맑고 깨끗해서, 내가 알던 그녀와 똑같아서.

긴장이 탁 풀리며 울음이 새어나왔다.

“...무진아.”

“소, 소율.”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소율 또한, 힘없이 팔을 뻗어 내 목덜미를 매만졌다.

나는 품속에서 느껴지는 작은 온기와, 포근한 향기, 조그만 고동소리를 느끼며 흐느꼈다.

“...본녀가, 어찌... 되었던 게냐? 숨이... 끊겼다고, 생각했거늘...”

“흐윽, 흡... 후우, 소율, 소율...”

“욘석, 우는 게냐. 걱정말거라, 응... 본녀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닌가 보다.”

머릿결을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품에 안은 그녀의 머리칼에 자꾸만 입술을 맞추며 꼬옥 끌어안았다.

주변에선 원시천존이니, 장삼봉 진인의 덕이라니.

시끄러웠지만 신경 쓰지 않은 채 가만히 소율을 안고있었다.

“이제 좀 놔주거라. 괜찮대도...”

“싫어... 조금만...”

“되었대도. 네놈이 뭔 짓을 한 지는 몰라도, 잘만 숨을 쉬고 있잖느냐.”

살아났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놓아주면 다시 떠나가버릴까봐 차마 감싸안은 팔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응? 무진아. 오히려 이전보다 더 건강해지고, 내공도 늘어난 것 같은데...”

“그럼, 혈옥을 때려박았는데.”

“...뭐?”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고... 지금은...”

바깥에서 달려오는 기척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찬가지로 힘겹게 몸을 세우며 저멀리 바라보는 소율.

곧 풀숲을 헤치고 낯익은 얼굴들이 등장했다.

“오라버니!!”

“무진!!”

세령과 소유였다.

뒤쪽엔 맹의 무사들과 당하린과 연화란, 서현도 보였다.

다들 도망치느라 고생이 컸는지 수척하기도 하고, 힘들어보였다.

“세령, 소유... 잠깐만, 품에...”

“맞아요, 무진.”

“오라버니와 소녀의 아기인 것이에요!!”

작은 포대기를 안고 내게 다가온 둘.

엄마들을 닮아 벌써부터 미인이 될 조짐이 보이는 아기 둘이 곤히 잠들어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볼을 만져보려다, 한가득 묻은 피를 보고선 재빨리 뒤로 물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세령과 소유가 살풋 웃어보였다.

“...미안해. 곁에, 있어줘야했는데...”

“아니에요, 무진. 당신은 꼭 여기있어야 했으니까...”

“흐흥, 소녀는 이해한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홍이는 모르겠다는 것이에요.”

“쯧, 지 애비가 죽을 고생을 했는데 요 깜찍한 것이 이해해야지, 소유야.”

소율의 타박에 소유가 귀엽게 웃어보이곤 내게 홍이를 내밀었다.

“어서 안아보라는 것이에요, 오라버니.”

“자, 여기 무령이도요.”

“흠, 본녀는 잠깐 상황을 좀 정리하고 오마.”

“소율.”

“괜찮느니라. 아가들이 애비 품에는 안겨봐야지.”

그때를 기회라고 여긴 듯 소율이 슬쩍 내 품에서 빠져나갔다.

세령과 소유에게 잠깐 죽다 살아났다는 걸 들키기 싫은 듯 보였다.

결국 손에 묻은 피를 박박 닦고선 무령이와 홍이를 안아들었다.

“...”

“...무진, 울어요?”

“아뇨.”

“오라버니 우는 것이에요!?”

눈시울만 빨갈텐데 놀리기는.

나는 양손에 하나씩 아기들을 안고 얼굴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나보다는 엄마들을 닮아서 벌써 이뻤다.

“...이쁘네.”

이렇게 가벼운데, 바람불면 날아갈까 조심스레 어르며 빤히 애기들을 바라봤다.

무령이는 백설기마냥 새하얬고, 홍이는 살짝 까무잡잡한 게 건강해보였다.

“누가 언니야?”

“음... 그때 정신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소녀도 소리만 질렀지 모르겠다는 것이에요.”

“...그럼 뭐, 같이 태어난 걸로 치자.”

괜히 언니니 동생이니 싸우는 것보단, 동갑이 낫지 않나?

서열 정리는 나중에 다 커서 지들끼리 무공으로 해야지.

그렇게 안고 있다보니, 곧 무령이가 빼액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홍이도 따라 울었고, 나는 각자의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코를 훌쩍였다.

모유라도 주려는 것인지 임시로 세운 천막으로 향하는 둘.

“흠, 애기 태어날 때 옆에 없으면 좆된다던데...”

장인이 오래 걸린다고 자장면 먹다가 애가 나와서 좆됐다는 썰이 문득 기억났다.

하지만 뭐, 나는 당당한 이유가 있으니까.

무려 무림을 구한 것 아닌가.

그렇게 잠시 홀로 서서, 잔잔하게 젖어드는 감정을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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