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안있어 깨어난 소서화와 소율을 필두로 모두 무당산으로 돌아왔다.
“...허어, 대체 무슨 일이 여기서 벌어진 게야...”
“얼마나 고강한 무공이면... 그 넓은 비무장이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단 말입니까?”
“정녕, 혈교주의 무공이 하늘에 닿은 것인가...”
뒤쪽에서 허허벌판이 된 봉룡각과 대비무장 자리를 보며 탄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곧 목소리를 죽이며 두려움에 찬 대화가 이어졌다.
“헌데, 그... 혈교주는 죽은 걸까요?”
“도망쳤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더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살떨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어찌 봉룡지회에 혈교가...”
“간자는 이전의 봉룡지회에서도 종종 발견되었습니다만, 이런 대대적인 습격은 처음입니다.”
“그런데... 만약 혈교주가 죽었다면, 대체 누가 그 괴물을...”
그런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얼마 안가 무당산 곳곳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무리에 합류했다.
무당의 장로들은 묵묵히 뒤를 따라왔고.
다른 세가나 문파의 장로, 가주급 인사들은 각자 데려온 무사들에게 따로 또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들이 고개를 숙일 때마다 화를 내지 않는 이가 없었다.
“뭐라! 관이가... 보이지 않아?”
“우리 자인이는, 자인이는 어딨느냐!”
“악이가 사라져!!!”
곳곳에서 호통이 터지고 비통에 잠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들 모두 무림이라는 칼날 위에서 살아가는 자들.
부하들이 가지고 온 소식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 그 슬픔과 분노가 조금씩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까지나 이번 봉룡지회의 주최측은 무당파.
결국 책임 소재는 명확했고, 갈 곳 없는 감정이 그곳으로 향하는 건 당연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당해줄 생각은 없다.
죽을둥 살둥 개고생하면서 앙천화를 조진 건 결국 나니까.
환상통이라고 해야할지, 이미 없어진 오른팔에서 욱씬거림이 느껴졌다.
“소율, 힘들텐데 먼저 가고 있어.”
“미안하구나, 본녀가 몸만 멀쩡했어도...”
“아니야. 가서 애들이랑 쉬고 있어. 죽다 살아난 주제에 또 무슨 일을 하려고.”
칠흑빛 갑주처럼 변한 팔 위로 따스함이 스쳐지나갔다.
금방이라도 울 듯 눈시울이 붉어진 소율이 퉁명스레 답했다.
“흥, 무진이 너도... 멀쩡하지는 않지 않느냐...”
“고작해야 팔 하난데 뭘. 어서 가. 세령이랑 소유 좀 챙겨줘.”
“당연한 소리 하지 말거라.”
겉으론 멀쩡해보였지만 소율의 안색이 상당히 창백했다.
출산 후 곧바로 이곳으로 걸어온 세령과 소유도 안색이 좋지 못했고.
그렇게 소율과 세령, 소유를 먼저 위로 올려보내고.
소서화와 맹의 무사들, 그리고 나만이 남아 허허벌판이 된 대비무장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각 세가와 문파의 인사들이 따라왔다.
‘깨끗하게 날라갔구만.’
아마 세가와 문파에서 데려온 자제들과 후기지수들은 머리카락 한올조차 남지 않았을 거다.
피와 골육은 앙천화의 혈옥이 전부 흡수했고.
옷가지와 검, 도, 명패 등은 내 칠흑경이 전부 지워버렸을테니.
결국 오늘 일어난 사태의 실종자는 전부, 사망자란 소리다.
“흠흠! 맹주님과 흑룡께서 저희를 이리로 부르신 까닭이 있겠지요?”
역시나, 조금도 참지 못하고 화가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전황에 대한 보고를 드리려 불렀지요.”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련이 표독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옆으로 오대세가의 인물들이 서있었고, 모두들 눈빛이 살벌했다.
“...어찌, 맹주께선 아무 말도 없으십니까?”
“맞습니다. 저는 오히려 왜 흑룡이 나서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동안 혈교주였다는 그, 천화령이라는 무인의 곁에서 온갖 수발을 든 게 바로 당신 아닙니까?”
“어쩐지 소문이 추잡하더라니, 혹 이 정파 무림을 배신한 것은 아닐런지요!!”
그녀들 중에는 소율과 나와 함께 앙천화와 싸운 이들도 있어서 실상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내가 앙천화를 압도하는 걸 봤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빽빽대면서 날 공격하는 건 소서화를 따라 양광과 싸웠던 인사들.
내가 뭐라 입을 열기 전, 소서화가 먼저 나섰다.
“이번 습격에 본인은 한 것이 없소. 양광을 죽이지도 못했을뿐더러, 혈교주와는 손조차 섞지 못했지.”
“허면, 아까 죽다살아나신, 크흠... 천극혜검님께서...”
“아니, 자네들 중에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이들도 있잖은가? 여기 흑룡이 혈교주 앙천화와 싸웠다는 것을.”
소서화의 매서운 눈빛에 소율과 함께 싸웠던 자들이 시선을 피했다.
이해한다.
저들 또한 자식과 제자를 잃은 이들이 수두룩 할테니.
나 역시 겨우겨우 손에 쥔 것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여기엔 우리만이 남아있고, 혈교인들은 모두 후퇴했다네. 심지어, 그 혈교주는 보이지도 않지! 본인이 더 설명을 해야겠나?”
서릿발같은 목소리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쯤에서 끝내도 되겠지만, 그럴 거면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렇게 불러모으지도 않았다.
나는 칠흑갑주 안쪽에 담긴 자그마한 옥패 하나를 꺼냈다.
“증좌가 필요하실테지요, 여러분들께선. 여기, 혈신패(血神牌)입니다. 확인해보시죠, 맹주님.”
“혈신패!”
세상에서 지워진 앙천화의 몸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물건이다.
혈교의 교주들이 대를 이을 때마다 자신의 피를 남겨두는 혈교의 신물.
그 세월 동안 안에 담긴 절대의 법칙은 내 힘보다도 거대했다.
그러니 지워지지도 않고 남아있었겠지.
소서화는 아는 눈빛이었고, 무언가 아는 게 있다는 듯 옆에서도 놀란 숨소리가 들려왔다.
“맞네. 이런 사특한 기운의 물건이 혈교의 것이 아닐 리가 없지.”
“저도 직접 보겠습니다, 맹주님.”
“보시게, 남궁 가주.”
곧 혈신패를 가문과 세가의 인사들이 두루두루 확인했다.
모두들 거기에 담긴 절대지경의 기운을 읽고선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여지할 바 없는 진품.
그 안에 담긴 끈적하고 질척한 혈기(血氣)를 못 느꼈다면 병신이나 다름 없을 거다.
“...진정, 흑룡 당신이 혈교주를 격살했다는 말이오?”
“그럼 혈교주가 그걸 뭐, 혼인의 증표로 줬겠습니까?”
“흐음...”
소서화가 왠지 모르게 납득하는 눈빛을 보내자 살짝 눈으로 화를 냈다.
몰래 빼꼼하고 혀를 내밀곤 입을 여는 그녀.
“그럼 다들 이견이 없으신 줄로 알겠소.”
소서화의 말에도 모두들 두 눈동자에 의심이 가득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애초에 싸움을 본 이가 없으니.’
곁에 있었으면 죽었을 거고, 없었으니 본 놈이고 년이고 하나도 없고.
이래서 배트맨이 힘든 거다.
그때 남궁련이 앞으로 성큼 나서며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면상에 철판을 깐 듯 뻔뻔함이 터져나왔다.
“그래서, 혈교주가 죽어서 어쩌라는 것이지요. 그자를 죽였으니 다 덮고 끝내자는 겁니까.”
“맞습니다! 애초에 무당이 제대로 색출조차 하지못해 이 사단이 난 것 아닙니까!!”
“죽은 아이들과 제자들은 본 문파의 미래였단 말입니다!!”
선동 당해서 꽥꽥대는 꼴들이 꼭 시장통 아지매들 같았다.
뭐, 이럴 것 같아서 곧바로 여기로 불러모은 거지만.
“그래서라. 그럼 저도 한마디 하지요.”
가볍게 힘을 끌어올리며 한 발 내딛었다.
“어쩌라고, 돼지년들아.”
“뭐, 뭐라!!”
“감히, 지금 뭐라고...”
“역시 근본도 없는 곤륜노답게 예의조차... 허억!!”
“저, 절대지경...?”
뭉클 퍼져나간 칠흑이 모두의 발아래를 덮었다.
슬슬 한계긴 했지만 아직 아줌마들 조질 정도는 충분했다.
“무려 혈교의 습격입니다. 혈교주 앙천화를 위시한. 내가 홀로 앙천화를 상대할 때, 그쪽들은 뭐했습니까?”
“양광을 상대하고, 혈교의 무인들을...”
“그건 맹주님이 하신 거고, 혈교의 무인들은 맹의 무인들과 무당의 제자들 또한 도왔지요.”
한 발 더 내딛으며 칠흑경(漆黑境)을 일으켜 그들을 둥글게 에워쌌다.
이 어둠의 위력은 모두가 봤기에 다들 허옇게 얼굴이 질려갔다.
“흐, 흑룡!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겁니까!”
나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히려 내가 앙천화를 막지 못했으면, 당신들 목숨도 없었어.”
“...”
내가 알던 수많은 무당의 제자들도 유명을 달리했다.
당연히 몸도 섞었고,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나를 살갑게 대해주던 이들이었다.
결국 모두가 무언가를 잃었다.
“그리고 여기서 막지 못했다면. 정파고 사파고 전부 혈교의 수중에 떨어졌겠지. 이래도 더 할 말들이 있나?”
꽥꽥대던 년들이 전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소서화가 다시금 앞으로 나섰다.
“그만 되었네, 흑룡. 이쯤이면 알아들었겠지.”
“무당 또한 제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재산을 잃었습니다. 다들 이해하시겠지요.”
“그럴걸세. 허나 또다른 절대지경의 무인이 무당에 자리를 잡았으니, 무당의 홍복이 아니겠나.”
나는 순식간에 칠흑경을 거두고 한 발 물러섰다.
그러자 덜덜 떨던 인사들이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아무튼, 이런 다툼을 위해 자네들을 모은 것이 아닐세.”
“무엇이 또 남아있습니까?”
이런 건 나보단 그래도 소서화가 나서는 게 나을 듯 싶어 그녀를 시켰다.
소서화가 결의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혈교주는 죽고, 양광은 빈사나 다름이 없지. 죽은 아이들의 넋을 달래주어야 할 것 아닌가.”
“맹주님, 지금 그 말씀은...”
“왜 우리만 당해야하는가? 이 자리에 대부분의 문파와 세가의 인사들이 있으니 선포하겠네. 아픔을 추스린 후, 혈교에 대한 전쟁을 시작할 걸세!!”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머릿속으로 튕긴 주판이 답을 내놨는지 눈빛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현재 혈교는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는 상태.
두 절대지경의 고수가 사라지고, 설령 존재한다 해도 다른 호법 한둘쯤일까.
허나 이쪽은 무림맹주와 천극혜검.
거기에 무당의 장로 운휘, 흑룡 백무진까지 총 4명의 절대 고수가 존재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질 수가 없는 전쟁이었다.
“...전부 참전하시는 겁니까?”
“물론이오. 본인과 흑룡, 천극혜검과 무당의 운휘도 참전할 것이오.”
이미 무당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를 맞춰놨다.
나로서도 언제고 내게 복수할 수 있는 혈교를 가만히 놔두긴 싫었다.
‘혈신패로 무언가 얻을지도 모르고.’
원작에는 나오지 않은 물건.
허나 혈교주의 다른 물건들보다도 이게 가장 중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간 시간을 가진 후, 소집령을 내릴 것이오.”
소서화의 말을 끝으로, 벌판의 사람들은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