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신가 보오?”
“...그렇네만.”
“절대에 올랐으니 반로환동과 환골탈태도 했을 것이고, 흠...”
남자는 무당신룡의 웃음기 어린 말투에 불현듯 팔뚝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오랜 세월 무공을 배우고, 사선을 넘나들며 발달된 감각이 소리쳤다.
‘무어냐, 이 소름끼치는 불안함은?’
허나 사내는 옆에서 담담히 서있는 아내를 보고 마음을 다스렸다.
상대는 무려 그 혈교주를 격살한, 정파 무림의 신성(新星)이라 불리는 무당신룡이 아닌가.
저 젊은 나이에 절대지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오른 자다.
‘내공만 하더라도, 나와 부인의 예상을 한참 웃돌고 있었지.’
그러니 방심하지말란 그녀의 이야기를 똑똑히 새겨들었다.
“허면 자식은 있소?”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가? 본인은 그냥 궁금했을 뿐이오. 부인께선 아직 한창이신 듯 보이길래.”
“...뭐라? 큭!!”
묵빛 수도가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코끝이 베인 것인지 아릿한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겨우 말장난 뿐인 허접한 수에 당하다니.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히며 검을 휘둘렀다.
“얕은 수작 부리지 말거라!!”
사내의 손에서 뻗어진 연검이 낭창거리며 휘었다.
그저 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자신조차 전부 파악할 수 없는 연검의 무한한 경로.
불규칙한 검의 궤적이 쏘아진 화살처럼 누군가를 노리고 날아갔다.
까강! 캉, 카앙!!
검은 피풍의를 입은 무당신룡의 팔이 한가롭게 움직였다.
‘외공을 익혔다고들 하더니, 정말이구나!’
묵빛으로 물든 팔뚝이 요혈을 노린 검기를 가볍게 쳐냈다.
이제 자신의 차례라는 듯 한 걸음 내딛는 놈.
먹빛 잔상이 허공에 새겨지고, 솥뚜껑같은 손이 자신의 옆을 노리고 짓쳐들었다.
후웅! 후우웅!
살벌한 파공음이 귓가를 스치고, 용권풍에 말려든 옷자락이 거칠게 찢겨져나갔다.
‘검을 맞대면 아주 박살이 나겠구나, 이놈!’
외공을 익힌 자들이 으레 그렇듯, 놈의 공격은 패도적이고 파괴적이었다.
내공에서 밀리니 검을 맞대어봤자 아끼는 애병만 상할 터.
남자는 보법을 밟으며 밀려드는 잔상들을 연신 피해냈다.
사랑하는 부인이 바라보고 있는 이상, 질 생각 따위는 없었다.
“눈길이 아주 애틋하십니다, 그려.”
“허접한 수에 두 번은 안 당할 것이다.”
“그래야지. 원래 암컷은 강한 수컷이 차지하는 거니까.”
“이... 크으윽!!!”
비릿한 말투에 울컥 분노가 솟구쳤다.
때문에 몸을 피할 그 짧은 간격을 놓쳤다.
카가가각!!
몸으로 저 우악스런 주먹을 막아내느니, 검을 희생해야했다.
놈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주먹을 굳게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다 날아가고 싶으냐!!”
“잘라봐, 할 수 있으면.”
낭창하게 휜 자신의 애병은 놈의 두꺼운 손아귀에 잡혀있었다.
공력을 한껏 불어넣어 잘라버리고 싶어도, 불똥이 튀기며 검신에서 들려서는 안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간 이어진 힘겨루기.
내공도, 육체적인 힘에서도 밀리니 놈이 당기는데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즐기는 듯 낮은 웃음과 함께 검을 잡아당기는 놈.
“크으...”
부인이 보고있다는 생각에 굴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살과 뼈를 깎으며 그녀와 동등한 위치에 올라섰는데, 약관이 좀 넘은 애송이에게 이런 굴욕이라니.
반격의 한 수를 준비하려는 때, 대뜸 고개를 돌린 놈이 소리쳤다.
“거기 부인, 이딴 비실비실한 놈을 부군으로 뒀으니 밤마다 심히 외로우시겠소!”
“감히!!!”
노골적인 말투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남자는 주인이 직접 내린 명령을 어겨서라도 놈의 대가리와 하물을 잘라내고야 말 것이라 결심했다.
"크으...!"
“음?”
“부군!!”
놈의 손에 잡혔던 검이 끌려나오며 맺힌 핏방울이 검신을 적셨다.
‘마기(魔氣)를 썼는데도 손이 안 잘리고 겨우 핏방울이라?’
그렇다면 그 핏방울을 모아 강으로 만들고 말리라.
남자는 전신을 타고흐르는 전능감을 느끼며 짧게 읊조렸다.
“사죄의 대가로 무당신룡, 네놈의 목을 들고가면 교주께서도 이해하실 거다.”
“역시, 마교였나?”
“알았다한들, 바뀌는 건 없다.”
남자는 검보랏빛으로 물든 애병을 뒤로 끌어당겼다.
놈과의 거리는 피부의 잔털마저 보일 정도로 가까운 상태.
까드득, 소리와 함께 동심원을 그리며 연검이 압착되었다.
오로지 그 유연함을 이용해 베기만을 추구하는 연검에서, 단 하나 존재하는 찌르기.
일지관천(一支貫天)
남자의 손에서 연검이 곧게 뻗어나갔다.
한계까지 압축된 탄성(彈性)은 그 해방감을 양껏 느끼며 눈앞의 적에게로 쏘아졌다.
소름끼치는 파공성이 울리고, 남자는 무당신룡의 몸에 동그란 구멍이 뚫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
허나 눈앞에 펼쳐진 결과는 그를 당황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주한 놈의 손과 검이 맞닿자 늪에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검이 사라지고 있었다.
놈의 악력에 조금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이럴 수는 없었다.
검게 물든, 아니 저걸 단순히 검다고 할 수 있을까?
넋 놓고 바라보면 빨려들어갈 듯, 저 하늘의 밤하늘처럼 어두운 공허가 놈의 손에 펼쳐져있었다.
그곳으로 검이 사라지고 있었다.
놈의 몸을 꿰뚫고, 이 비루한 기루의 천장을 뚫어낼 일격이.
지워지고 있었다.
“이, 어찌된...”
“패배자위는 왼손으로도 할 수 있겠지?”
일지관천은 그야말로 온 힘을 끌어모아 쏘아내는 일격.
중간에 강제로 멈춰서면 탈골이 그나마 나을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을 것이다.
그럼에도 남자는 멈추려 노력했다.
저곳에 빨려들면 검보다도 귀한 오른팔이 완전히 날아갈테니까.
“부군! 정신차리세요!!”
애검이 사라지고, 손마저 지워지는 순간 어딘가로 몸이 쭉 딸려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숨을 고르고 선 옆에는 부인이 창백한 안색으로 창을 들고 있었다.
“고맙소, 부인...”
“...부군.”
검은 잃었지만, 팔은 남았다.
헌데 옆에 선 부인의 얼굴에 슬픔과 분노가 보였다.
슬쩍 내린 시선에, 어깨 아래로 자신의 팔이 없었다.
“크하악...!!”
“물러나세요, 부군.”
“부인, 안돼오. 내가... 큭...”
핑하고 도는 머리에 다급히 자세를 잡았다.
서둘러 점혈을 마치고 시선을 돌렸다.
“그대로 지워버릴 수 있었는데, 부인께서 감이 좋으시오.”
“정파 무림의 기재라는 자가 천박하기 그지없군요.”
“보지도 닳을만큼 닳으신 분이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네이놈!!”
창백해진 안색으로도 고함이 터져나왔다.
자신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아내는 얼마나 분노에 떨고 있을까.
“...네놈과 네놈의 계집들은... 몸 성히 나가지 못할 거다.”
“거기 두 분도, 걸어서 나가지는 못할 거요.”
결국 부인이 창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매섭게 돌아가는 창이 부서지고 박살난 기루의 물건들을 깨끗하게 치워냈다.
바로 저 망할 놈을 향해.
벽력처럼 쏘아져나간 기물들이 놈의 손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져갔다.
“박아달라고 재롱이라도 부리시오, 부인?”
“큭... 이놈!!”
한 마디 한 마디가 예의는 뒷간에 처박고온 듯한 놈이었다.
마교에서도 입이 걸걸한 연놈들은 수두룩했지만, 저렇게까지 원색적인 놈은 처음이었다.
“부인! 그깟 헛소리에 흔들리지 마시오!!”
“알아요!!”
대답하는 부인의 목소리를 보니 괜찮았다.
그녀는 마교의 팔장로 중 사군(四君)의 위치에 든 강자.
진정으로 교주 아래에 선 막강한 네 명의 절대 고수 중 한 명이었다.
자신 또한 사군이지만, 그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허나 지금은 부인의 면을 생각할 때가 아니지.’
남자는 왼손으로 몰래 새로운 연검을 쥐며 기회를 기다렸다.
다시 한 번 녀석이 절대의 법칙을 쓴다면 그때를 노릴 생각이었다.
세계를 뒤트는 그 힘은 하나하나가 역천(逆天)의 능력을 지녀 힘의 소모가 막대했다.
‘넘치는 내공으로 처음이야 멀쩡할 것이다.’
폭풍처럼 돌아가는 부인의 창과, 놈의 묵빛 잔상이 쉼없이 부딪혀 불똥을 튀겼다.
무당신룡의 실력은 그 나이에 맞지 않게 경이로웠다.
무당이라는 이름값을 하듯 매서운 폭풍이 놈의 몸을 계속해서 빗겨나갔다.
“과연 부군을 상처입힐만 하구나!!”
결국, 그녀마저도 마기를 격발해 검보라빛으로 전신을 물들였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몽운루와 운몽, 그리고 이 주변의 모든 인간들을 말살해야했다.
아직 천마신교는 중원에 드러나서는 안됐다.
“네년은 거기 있거라.”
“...네, 대인.”
어차피 부인이 질 리는 없으니 슬금슬금 몸을 빼던 운몽에게로 향했다.
일은 전부 아랫것들에게 맡겨놨으니, 무당신룡이 찾는 계집 셋도 운몽이 알 터였다.
어찌나 꽁꽁 숨겨두었는지, 기감으로 기루 전체를 훑어도 느껴지질 않았다.
필시 진법을 써서 존재감을 감춰뒀을 터.
“저놈이 찾는 계집 셋, 어딨느냐?”
“...기루 어딘가에 있습니다.”
“죽고싶은 게냐. 어서 말하지 못해.”
비록 왼손이지만, 고작 초절정에 이른 늙은 년따위 단숨에 도륙낼 수 있었다.
운몽이 계속해서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알려드리면, 절 죽이지 않는다고 약조하시지요.”
“그래, 약조하마.”
망설임 없는 대답에 운몽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알려줘도, 안 알려줘도 이 여자에겐 죽음만이 남아있다.
차라리 그냥 죽이고 아랫것들에게 알아보는 것이 편할까 싶던 찰나, 이번에도 들려선 안될 소리가 들려왔다.
“카하윽!!!”
“부인!!”
다급히 돌린 시선에 부인의 상체가 깊숙이 꺾여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 안쪽으로 바위같이 커다란 주먹을 쑤셔박고 있는 놈.
‘설마, 무공마저도 앞선다 말인가!!’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녀의 머리를 향해 놈의 팔꿈치가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안돼!! 큭... 네년이 감히!!”
그때 왼팔뚝이 긁히며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운몽이 검을 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무당신룡!! 이 둘을 죽이면 자네의 계집들을 돌려주겠네!! 도와주시겠나!!”
“이년!! 닥치거라!!”
“그러지, 할망구!!”
또다시 들려온 할망구 소리에 운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허나 급박하게 이루어진 동맹은 곧바로 힘을 발휘했다.
부인의 상태를 본다고 집중하지 못한 남자의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갔다.
“간악한 년, 독을...”
“커흑... 부, 부군...”
“...부인.”
힘겹게 맞춰진 초점에 입에서 울컥 피를 토해내는 부인이 보였다.
그녀는 뒷덜미를 잡힌 채 힘없이 놈에게 끌려오고 있었다.
“창년답게 좀 쑤셔주니 정신을 못차리는 구만.”
“이놈! 그딴, 그딴 망발을...”
“검 버려, 새끼야.”
한쪽 팔이 날아간 중상.
동급의 고수와 맞서 싸운 탓에 극도로 소모된 체력과 내공.
남자의 몸은 독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의지와는 관계없이 바닥에 떨어진 검이 맑은 소리를 퍼트렸다.
“십새끼가 남의 여자 걸로 뭐하는 거야.”
놈의 손으로 검이 빨려들어갔다.
익숙하게 허리에 찬 후, 놈이 천천히 다가왔다.
“일어나면 즐거운 시간이 될 거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파렴치한 자에게 패배하다니.
“네놈은, 반드시... 교주께서...”
“뭐래, 소추가.”
남자가 정신을 잃고, 무진이 시선을 돌렸다.
혈도를 짚어 여자는 이미 기절했다.
냉막한 눈동자가 운몽을 옥죄어갔다.
“뭘 빤히 쳐다봐. 안내해.”
“...그러지.”
“그러지?”
“...알겠...습니다.”
운몽은 그녀의 손녀처럼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 사내는 안 대인과 박빙으로 싸우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철 대인이 자신에게로 접근하자, 기다렸다는 듯 공세를 펼쳐 그녀를 몰아붙였다.
허공을 검게 지워가는 저 기괴한 어둠 속에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따라오시지요.”
“할망구 손녀는 갖은 수를 다 쓰던데, 그 지랄하면 바로 골통을 부술 거니까 기대해.”
지금껏 살아오며 받은 협박 중, 가장 섬뜩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