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록, 콜록...”
“괜찮아, 란아?”
“...난 괜찮아. 너는...?”
조금 어두워진 목소리에 서현이 작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나두. 아직 버틸만해. 언니는, 괜찮아요?”
“...응.”
한참이 지나서야 구석진 쪽에서 새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의 흐름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저번 대답보다 훨씬 힘이 없었다.
빛조차 들지 않는 암실은 먼지가 쌓여 퀘퀘했고, 그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피냄새도 더없이 선명했다.
서현이 떨어지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었다.
“상처... 괜찮은 거죠, 언니?”
“...응.”
이번 대답은 방금 전보다 조용하고 작았다.
연화란도 자신도 자잘한 상처는 다 입었지만, 비연의 부상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 최소한의 조치만을 취하고 그녀들을 가뒀다.
철썩같이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한 비연은 빠르게 기력을 잃어갔다.
“언니... 조금만, 조금만 버텨요. 분명 사형이 구하러 올거니까.”
“...혈교 토벌을 마무리 지으셔야지. 난 그분의 발목을 잡기는 싫어...”
“비연 언니! 정신차려요. 그렇다고 이대로,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연화란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긴 인연은 아니었지만, 며칠 간 했던 고생만으로도 감정이 깊어지기엔 충분했다.
“후... 무거워...”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화란이 있던 쪽에서 들렸다.
점점 흐릿해져가는 귓가에 선명하게도 울렸다.
이까짓 철덩어리, 내공만 사용할 수 있다면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건만.
‘...수준 차이가 너무 많이 나. 도저히 스스로 풀 수 있는 점혈이 아니야...’
그녀들을 직접 점혈한 여자는 이미 정점에 서있는 자였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의 발목만 잡고, 친근한 이들마저 함정에 빠지게 만들어 버렸다.
무기력하게 변해가는 그녀들을 그저 바라만 보아야했다.
혈교 토벌을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올 텐데.
자신들의 소식을 접한 그가 어떤 마음일지.
‘슬퍼해줄까...?’
비연의 머릿속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봉룡지회에서의, 고작해야 두 달 남짓한 시간.
허나 그와의 관계는 서로의 은밀한 곳을 모두 드러낼 정도로 가까웠다.
짐승처럼 교성을 내지르고, 끊임없이 육욕을 탐하는 그런 관계.
“하아아...”
허나 그에게 여자의 육체란 한도 끝도 없는 욕구의 대상일 뿐, 자신도 깊은 관계는 아닐 것이다.
그의 아이를 낳은 둘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겠지.
‘그래도... 구하러 와줬으면 좋겠는데...’
점점 숨을 쉬는 것이 힘들어진다.
마지막으로 보고싶은 건,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니라 그였다.
*
운몽은 나를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거긴 밟지 마시지요. 극독이 발린 화살이 나옵니다.”
기루 아래로 운남성 땅굴은 지가 전부 파뒀는지,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여긴 바로 아래에 철죽이 있습니다.”
“...”
“아, 이건 용린(龍鱗)이라는 불을 뿜는 장칩니다. 사람의 근육과 뼈가 채 일다경도 되지 않아 녹아내리지요.”
보기만해도 섬뜩해보이는 기관장치들이 수두룩했다.
그녀는 내가 조금이라도 위축되기를 바라는지 열심히 설명을 했다.
아래로 아래로 발걸음은 향했고, 도대체 어디까지 가나 싶을 때쯤 그녀가 멈춰섰다.
“여기가 루주의 묏자린가?”
“네놈의 묏자리지.”
돌변한 그녀의 말투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어디까지 발악을 할까 싶어 따라왔다.
운몽은 모를 거다.
내려오면서 저 새하얀 백발을 붉게 만들어줄 기회가 얼마나 많았는지.
골통을 부수지 않은 건 몽운루에 무언가 남은 게 있나 싶어서였다.
“동맹도 하고, 문주자리도 지켜준다했고, 천마신교의 침략자들도 친히 죽여줬는데. 대체 왜 발악을 하는 거지, 운몽?”
“네놈... 전부 가진다하지 않았더냐?”
“...손녀딸도 믿고 있는 게 아니었구만.”
“이 사파에 믿을 것은 없다.”
운도혜가 흘리진 않았을 거다.
나한테 개처럼 따먹히고 기절한 년이 무슨 수로.
아마 그 진이 펼쳐져 있던 방의 호위무사 셋 중 하나겠지.
아니, 둘 중 하나. 하나는 내가 죽였으니.
그럼에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봤잖아? 마교에서 당당하게 보내준 두 연놈이 나한테 개박살나는 거?”
“...”
“영역까지 사용했는데, 내가 지쳐보이나?”
삿갓 때문에 내 표정이 안 보여서 그런가?
나는 슬쩍 삿갓을 벗어서 미소 띤 얼굴을 보여줬다.
한달간 소율에게 특훈을 받으며 절대지경에 관한 깨달음을 모두 전수받았다.
개인적으로도 칠흑경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동안 쌓아온 내공은, 내가 흑천묵지신공을 진정으로 다루기 시작해서야 제대로 된 빛을 발했다.
“이 내가, 평생을 일구어온 것을 네놈에게 홀랑 넘기겠느냐? 이 묏자리가 전부 불타오르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을 여기서 묻을 것이다.”
“하긴, 주인이 죽자마자 꿀꺽 삼키려던 걸 두 번씩이나 뺏기려니 화가 나겠구만.”
“이곳의 주인은 나다!! 이 운몽이란 말이다!!!”
운몽이 시뻘게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파련주한테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말툰데.
그제야 운도혜의 옛날 이야기와 운몽의 얼굴이 겹쳐졌다.
오랜 친우는 친우가 아니라, 열등감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 열등감의 분노가 대를 타고 넘어온 걸테고.
나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열등감에 똘똘 뭉친 패배자년.”
“닥치거라!!!”
제대로 찔렀는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운몽이 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마치 지옥에라도 있는 것처럼 풍경이 변화했다.
“흠.”
어느새 내 팔뚝이 녹아내려 뼈가 보이고,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불에 타는 듯 했다.
다리는 천근만근이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았는지, 어디선가 통쾌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천살대진(天殺大進)속에서 죽어가거라!!!”
운몽이 준비한 마지막 한 수인 듯했다.
미묘하게 코끝을 간질이던 약향과 빙글빙글 한 곳을 계속해서 돌던 그녀의 모습.
고개를 들자 어디선가 날카로운 고드름이 내게로 날아오고 있었다.
발밑에선 살과 뼈를 녹인다는 용암이 터져나왔다.
“아무것도 믿지 말라면서, 이딴 허접한 진법은 믿는 건가?”
“닥치고 뒈져!!”
고드름은 아까 설명해준 극독이 발린 화살이었고, 용암은 용린이라는 불인 듯 했다.
그 밖에도 그녀가 열심히 입을 털었던 것들이 무언가로 화해서 내게 쏟아졌다.
금방이라도 내 몸뚱아리 하나쯤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재해(災害)가 덮쳐왔다.
그에 맞서, 나는 손바닥 위에 작은 구체를 피워올렸다.
“열려라 풍ㅎ... 아니지, 이건 위험하지.”
아직 저작권이 건재한 작품이니까.
나는 조금씩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커가는 구체를 바라봤다.
칠흑(漆黑)속에 집어넣은 강대한 파륜(波輪)이 재해를 빨아들이며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당황한 운몽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무어냐!! 그것은 대체 무엇이야!!”
겨우 머리통만한 크기의 흡입력으로도, 이미 천살대진이 반파되어 운몽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콰득, 콰드드득!!
바닥이, 벽이, 천장이 뜯겨져나가며 구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빛마저 빨아들인다는 저 하늘의 아귀처럼, 검은 짐승은 모든 것을 사정없이 집어삼켰다.
흑천묵지신공(黑天墨地神功)
우주홍황(宇宙洪荒)
담축성(坍缩星)
“골통은 남겨주지. 증거는 있어야되니까.”
“안된다!! 이런식으로, 이렇게는!!!”
운몽이 기겁하며 지하를 벗어나려 용을 썼다.
하지만 애초에 가두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만든 장소 아닌가.
그녀는 그녀가 만든 감옥에 갇혀 울부짖었다.
“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울리고 얼마 뒤.
나는 겉옷을 벗어 운몽의 머리를 싸맨 뒤 기루로 돌아왔다.
“무너진다아아앗!!!”
“돔황챠!!”
기녀들과 남창, 다른 시비들이 미친 듯이 기루를 벗어나고 있었다.
하기사, 바닥에 커다란 공동이 생겼는데 이만한 건물이 버틸 수가 없지.
나는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이곳에 매장되는 것이오?”
“마교에서도 이런 허망한 죽음은 딱히 없었겠지, 안 그런가?”
“차라리 칼로 베어 죽이시오!”
기절한 남편을 끌어안은 채 꼿꼿하게 소리치는 여자.
창은 돌려줬지만 혈도를 짚힌 그녀로서는 드는 것조차 버거워보였다.
“이름이 뭐랬지?”
“...안예인이오.”
“쉽게 알려주는군.”
“...패했으니까.”
역시 그래도 강자존이라 그런가, 패자의 위치를 잘 안다.
승자의 권리를 조금 더 행사해봤다.
“마교의 계획은 뭐지?”
“알려줄 수 없소.”
“그럼 뭐, 남편과 함께 여기서 장례식 치루던가. 골골대는 걸 보니 다 무너지기 전에 죽겠네.”
“...”
안예인의 눈빛에 망설임이 스쳤다.
아무리 고수라도, 살고싶은 건 매한가지다.
하물며 정점에 이른 자가, 기회를 놔두고 초개처럼 목숨을 던지는 건 쉽지 않을 거다.
쏟아지는 건물의 잔해를 기막을 둥글게 펼쳐 막아냈다.
“...무슨 짓이오.”
“살려주지. 대신 내게 모든 걸 바쳐라.”
“그냥 깔려 죽겠소.”
“남편을 살려주지.”
또 한 번 망설임이 스쳤다.
보통 이럴 땐 교인 놈들은 전부 죽음을 택하던데.
애달픈 눈길이 힘겹게 숨을 내쉬는 여자의 남편에게 향했다.
‘생각보다 천마의 통제력이 약한가?’
나로선 나쁠 것 없는 이야기였다.
“...정녕 살릴 수 있소?”
“한 번 거절했으니 대가가 커질텐데?”
“살려낸다면, 뭐든 받아들이겠소.”
나는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려는 걸 참아내며 품속에서 작은 목갑을 하나 꺼냈다.
“이걸 주지.”
“그건... 대환단!”
“그래, 소림의 방장사태가 내게 직접 건넨 단약이다.”
이번에 맹에 갔을 때, 청하가 전해준 물건이다.
목숨값과 더불어 큰 은혜를 갚는 것이라 하며.
그 자리에서 덮쳐버릴까 하다가, 청하와의 섹스는 불상 앞에서 해보는 게 짜릿할 것 같아서 참았다.
영롱하게 빛나는 황색 단약을 바라보던 안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겠소.”
“우선 나가지. 그 잠깐도 못 버티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알겠소."
반쯤 무너진 건물은 이제 막을 수 없다.
나는 둘을 내공으로 띄워 운몽루를 나섰다.
그 시각, 운도혜는 어느 작은 장원을 미친 듯이 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