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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195화 (195/230)

“부문주님, 정말 무당신룡에게 거는 겁니까?”

“...그래.”

하오문의 부문주 운도혜, 그리고 그녀의 수행원들은 지금 운남성 어딘가의 작은 장원에 침투해있었다.

하오문에서 준비한 여러 안가들 중 하나.

각종 기관장치와 독무 등으로 인질 등을 가둘 때 유용한 곳이다.

물론 그녀의 수하들은 집문을 열고 들어가듯 간단히 장원에 침투했다.

‘할머님 성격에 여자들을 기루에 둘 리가 없어.’

적의 목표가 명확한데 그곳에 둘 이유가 뭐란 말인가.

차라리 그녀는 다른 수를 노릴 것이 뻔했다.

‘그리고 할머님은 이미 무당신룡이 왔다는 걸 알고있었고.’

그가 떠나고 난 뒤 곧바로 할머님의 수하 중 하나가 찾아왔었다.

하오문에서 은밀히 키우는 살수부대의 대장.

이름도 얼굴도 몰라 그저 은명(隱名)이라 불리는 자였다.

그녀는 할머님의 명령을 보여주듯 먼저 나선 수하의 목을 단숨에 베었다.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십시오, 부문주.

힘이 약한 하오문의 검으로 키운 만큼, 그녀의 실력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운도혜는 머릿속으로 쉼없이 주판을 튕겼다.

할머님에게 당하긴 했지만, 할머님도 자신이 숨겨둔 수가 무엇인지는 모를 것이다.

그녀는 노회한 여우대신, 듬직한 곰같은 사내를 택했다.

“끄아악!!”

“막아!!”

그렇게 앞길을 막아서는 은명을 비장의 수단으로 따돌리고, 이 작은 장원으로 달려왔다.

저렇게까지 쫓아오는 모습을 보아하니 분명 여자들은 이곳에 있을 터였다.

“부문주님! 찾았습니다!”

“당장 데리고 나와!!”

부하의 외침에 뒤쪽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몇 배는 살벌해졌다.

이젠 숫제 충차마냥 부하들을 썰어버리며 다가오는 은명.

결국 그녀의 모습이 장원 안쪽에 나타나고, 번뜩거리는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일탈은 여기까집니다, 부문주.”

아직 꽤 거리가 멀었음에도, 냉막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피안개가 순식간에 장원을 가득 메웠다.

“아...”

피분수를 뿜으며 갈려나간 수하들의 시체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잘못의 대가는 팔 하나로 치루겠습니다.”

심장이 멈춰버릴 듯 진한 살기에 칼이 떨어지는 것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러다 언뜻, 먹빛의 잔상이 그녀의 옆을 스쳤다.

스각.

검이 허공을 가르고, 운도혜는 몇 년만에 만난 정인을 보듯 반갑게 소리쳤다.

“주인님!!!”

“운도혜, 왜 여기 있는 거지?”

“제가 다 설명드릴 수 있어요, 주인님. 그러니... 뒤, 뒤에!!”

“비켜라, 검둥이.”

사라진 검 대신 허공섭물로 집어든 도를 은명이 휘둘렀다.

등을 돌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무진으로서는, 그 공격에 당할 게 분명해 보였다.

“위ㅎ...!!”

꽈드득... 콰앙!!

위험해요, 라고 외치려했던 운도혜는 그대로 다시 입을 닫았다.

고개만 살짝 틀어 도를 회피한 주인은, 쇳덩이 같은 주먹을 은명의 명치에 꼽아넣었다.

발로 찬 돌멩이마냥 펄떡거리며 날아간 은명.

그녀가 입에서 울컥 피를 쏟으며 몸을 일으키려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몇 번이고 쓰러졌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녀.

“쿨럭, 이... 새끼...”

절대와 초절정의 차이가 이정도일까.

운도혜는 자신이 잡은 동아줄이 튼튼한다는 것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주인님이... 승리하신 걸까?’

도망쳐온 모양새는 아니었다.

헌데 절대 고수 둘과 싸웠는데도 상처 하나 없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운도혜, 내가 내린 지시는...”

“부문주님!”

둘의 시선이 동시에 옆으로 향했다.

운도혜의 수하들이 안색이 파리한 여인 셋을 부축해오고 있었다.

냉막하던 주인의 인상이 밝게 펴졌다.

“잘했다.”

“아... 네, 네!”

사실 새카만 피부라 잘 모르겠지만, 하얀 이빨이 보이도록 웃었으니 다행인 거 아닐까?

“여자들은 우선 조금 떨어진 곳에 데려놔. 운도혜, 저 여자는 뭐지?”

“살수대장 은명입니다. 하오문에서 비밀리에 육성하던...”

“부문주, 미쳤습니까...!”

앞섬이 전부 피로 물든 은명이 기어코 다시 검을 들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주인은 보자기에 쌓였던 무언가를 그녀에게 던졌다.

툭.

“아...”

운도혜는 데굴데굴 굴러가는 무언가가 누군가의 머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은명의 시선 또한 같은 것을 알아차렸다.

“운몽은 뒈졌다. 천마신교에서 온 둘도 내가 처리했고.”

“...”

“네가 섬기는 건 하오문이냐, 운몽이냐?”

주인의 질문은 자신에게도 묻는 듯 했다.

가슴에 남은 미약한 정(情)은 분명 할머님이었다.

허나 머릿속은 이미 눈앞의 사내로 가득차있었다.

운도혜는 할머님의 머리를 본 순간 슬픔과 동시에 해방감을 느꼈다.

은명은 묵묵히 옛주인의 머리를 바라봤다.

중원의 절반을 호령할 거라던 큰 꿈은 어디로 가고, 머리통만 남아 허망하게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암영대는 부문주를 따르겠습니다.”

“사마횐지 뭔지 그 새끼들 정리하고, 운남성 정리해놔. 할 수 있지?”

“...”

“그, 그러도록 해요, 은명.”

“존명.”

운도혜는 주인이 아닌 자신의 명령에 대답하는 걸 보며 시선을 돌렸다.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난 곧바로 서장으로 향할 거다. 돌아왔는데도 개판이면... 알지?”

“네, 주인님. 책임지고 전부 정리하겠습니다.”

“그래, 잘하면 돌아와서 상을 주마.”

두터운 손이 볼을 쓰다듬다 턱을 가볍게 쥐어 눈동자가 마주치도록 만들었다.

깊고 우묵한 흑색의 눈동자에, 아랫도리가 저릿하게 달아올랐다.

‘읏... 모, 몸이...’

어젯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꼿꼿하게 선 유두가 속곳을 스치고, 보지가 촉촉하게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그와의 밤은, 황홀 그 자체였다.

“네, 네...”

“마차를 준비해놔. 제일 큰 걸로다가.”

“...핫, 네!”

어느새 주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운도혜는 달뜬 몸을 식히며 은명에게로 다가갔다.

“...할머님의 명령을 받던 건 압니다. 우선 지금은...”

“암영대는 하오문주의 것입니다. 지금 문주에 가장 가까운 분은 부문주시니, 개의치 마십시오.”

그녀는 은명의 돌변한 모습에 적응이 안됐지만, 서둘러 명령을 내렸다.

장원 바깥, 운남의 시내는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괜찮아, 다들?”

내 눈앞에 앉은 세 여자는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얼굴 이면에 죄책감이 보였다.

큰소리 탕탕치며 강호로 출사표를 던졌는데, 그 결과가 사랑하는 이의 발목을 잡는 거라니.

난 아무렇지 않게 그녀들을 대했다.

“천마신교가 나타났어. 아마 사파련주가 죽은 틈을 타 슬슬 본색을 드러내려는 거겠지.”

“...처, 천마신교요?”

“그럼 그 두 고수가...?”

“응. 너희들은 어쩔 수 없었던 거야.”

허리에 찼던 화란의 검을 돌려주고, 셋을 위로했다.

서현과 화란은 눈물을 꾹 참으며 미안하다 내게 흐느꼈고.

비연은 그저 품에 안겨있다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맹에서 가져온 영약이야. 바로 출발할 거니까, 잘 지녀뒀다가 나중에 먹도록 해.”

“사형, 저는 멀쩡하니 거기서라도...”

“아니, 화란이랑 같이 비연을 지키고 있어. 감이 좋지 않아.”

서현의 부탁을 매몰차게 자르고, 비연을 업고선 밖으로 향했다.

장원의 구석진 곳에 가자 안예인과 철기가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것이 보였다.

역시 대환단은 대환단인지, 시체같았던 철기의 안색이 조금 생기를 띠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둘이 몸을 일으켰다.

“...감사하오.”

“...고맙, 군.”

안예인은 초탈한 표정으로 포권을 했고, 철기는 이빨을 갈며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이놈과는 사이가 더 나빠질 예정이니 신경을 껐다.

“바로 마차를 타고 서장으로 향할 것이오. 가면서 전부 얘기하지.”

“알겠소이다.”

“부인, 정녕... 교를 배신할 생각이오?”

“부군. 교는 무너져도 다시 세울 수 있지만, 부군은 돌아오지 못해요.”

“...부인.”

뜨겁게 서로를 바라본 두 연놈이 득달같이 끌어안았다.

왜 여기서 연애질을 하는 건지.

물론 그럴수록 우리 철기가 맛볼 고통이 커가니 잠깐 내버려뒀다.

자꾸 껄떡대는 자지를 잠재우고 말했다.

“가지.”

서현과 화란이 나란히 걷고, 비연을 업고선 장원을 나섰다.

바깥은 전쟁터였다.

하오문의 쪽수와 암영대의 실력에 사마회가 조금 밀리는 듯 했다.

하지만 곧 죽어도 마교의 년들이라 그런지 그렇게 형세가 좋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막상막하.

내가 건넨 손이 저울추가 되는 싸움이었다.

“가서 정리하는 것 좀 도와주시오, 안 소저.”

“크흠... 이 나이에 소, 소저라는 말은 조금...”

“무슨 소리요, 부인. 내겐 언제나 소녀같은데.”

“이, 씹...”

“미안하오.”

주책을 떠는 철기 대신 안예인이 사과를 했다.

혈도를 조금 짚어줘서 반절 정도의 내공을 운용하게 된 그녀가 창을 들고 뛰쳐나갔다.

“장로님이 나타나셨다!!”

“네년들은 이제 뒤진 목숨이다!!”

안예인의 모습에 화색을 띠는 사마회.

밝은 목소리가 절망에 물드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창끝은 방심한 사마회 무인의 육신을 둘로 분리했다.

“아아악!!”

“이 개년! 교를 배신하는 거냐!!!”

사마회의 무인들은 갖가지 욕을 쏟아내며 마교의 장로였던 그녀를 저주했다.

애초에 인원이 많지 않았기에 정리는 금방이었다.

곧 운도혜가 말 네 마리가 이끄는 커다란 사두마차를 몰고 왔다.

“주인님! 마차입니다!!”

“나도 보면 안다. 얼른 타지. 너희들도 어서 타.”

오는데 삼일, 처리하는데 하루.

가다가 사천에 서현들을 내려두고, 이 주책맞은 잉꼬 부부를 다시 데려가야했다.

서장에 가면 분명 쓸모가 있을 연놈들이었다.

‘상황이 바뀌었으니 말이지.’

주인 잃은 집구석을 옆집이 냉큼 차지했다.

‘혈교를 이미 천마신교가 취했다.’

사파에 있는 저 두 연놈을 보고 든 처음 들었던 의심.

장원까지 오면서 몇 가지 물은 결과 안예인은 그 의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도연합군이 그렇게 밀릴 리는 없겠지만...

서둘러 가야하는 건 자명했다.

“주인님, 다시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말고. 잘 정리하면 와서 하오문주 자리를 줄지 생각해보마.”

“네... 웁, 우움... 츄룹...”

마차에 타기 전 운도혜와 길게 입술을 맞췄다.

타액 한가득 미약을 섞어 그녀의 목구멍 안쪽으로 넘겨줬다.

슬며시 입술을 떼어낸 그녀의 얼굴은 발정난 암캐로 변해있었다.

“날 기다리고 있도록.”

“네, 네에...”

미련없이 몸을 돌려 마차에 올라탔다.

“사천으로 가지.”

“예.”

하오문의 마부가 고개를 끄덕이고, 네 마리의 말이 힘차게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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