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아...?”
소율은 언뜻 불쾌한 감각을 느끼고 막사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저녁 노을이 빠르게 지평선을 덮어가는 시간.
그리고 저멀리로 사라지는 무진의 신형을 보았다.
“소율아.”
“서화. 너도...”
“그래, 무언가 느껴졌느니라. 헌데 무진인...”
“우리가 느꼈으니, 녀석도 느꼈겠지. 아무래도...”
둘의 머릿속에 같은 존재가 떠올랐다.
천마(天魔).
아직 그에 대해 겪어보지 못한 소서화와 담소율이었다.
마교 장로들의 설명으로 그 무위와 무공에 대해 엿듣기는 했지만, 언젠가 직접 마주할 천마는 애초에 필설로 형용될 존재가 아니리라.
“쫓아가 봐야할까.”
“저놈 성격에 그러길 바라지는 않을 게다. 여기서 때를 기다려야겠지.”
“쯧, 알겠다.”
소서화가 먼저 자리를 떴다.
어느새 자신의 오랜 친우도 무진을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비록 그 방법이 조금, 저속하기까지한 방법이지만.
애초에 자신도 그에 못 버티고 무진을 마음 속 깊이 따르게 되었던 것 아닌가.
‘아니지, 본녀는 애초에 미혼이고 처녀였지.’
한 번 갔다온 녀석과는 엄연히 다르다.
작은 승리감과 함께 소율 또한 자리를 떴다.
*
꽤 멀었다.
천마가 나를 부른 거리는.
서장의 위쪽 경계.
신강과 맞닿아있는 어느 들판에 누군가 서있었다.
‘바로 돌아가는 건 무리겠군.’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없어도 절대지경에 이른 자들은 셋이나 더있었고, 마교의 장로들까지 합친다면 마교 전부가 달려들어도 문제 없을 터였다.
‘그건 그렇고, 여기가 진짜군.’
초록색 들판 위에 고고하게 서있는 여인.
하늘하늘한 보랏빛 장포 위로, 밤하늘을 비단으로 엮은 듯한 머리칼이 휘날리고 있었다.
슬쩍 눈에 내기를 집중하자 막대한 힘의 파동이 엿보였다.
‘고작 둘셋 정도가 아니야.’
마교의 장로들이 전부 달려들어도 천마를 어찌하지는 못하리라.
그정도의 격차가 천마와 장로들 사이에서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쪽이 그 이름 높은 천마겠군.”
“그쪽은 무당신룡, 맞는가.”
“그래, 백무진이다.”
“본좌의 이름은, 알고 있을 테지.”
천마가 우아한 몸짓으로 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요요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였다.
"혁무린."
혁무린 또한 절색이라 부를 만한 미인이었다.
절로 아랫도리가 딱딱해지는 관능적인 얼굴.
허나 그녀에게선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가 풍겼다.
마치 신선같은 느낌이랄까.
아름다운 얼굴에 풍기는 신선같은 분위기, 소율이 생각났다.
‘하지만 품은 것이 다르지.’
소율의 눈빛이 사슴이라면, 혁무린은 호랑이였다.
내뱉는 말과는 달리 자색 눈동자에선 호승심이 치솟는 것이 보였다.
무표정에 저런 눈빛만 가능하다니 신기했다.
“강하군, 그대. 이... 본좌가 읽을 수 없다니.”
나는 말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격차가 느껴진다는 건, 내가 장로들과 천마의 간극을 읽어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적어도 힘의 우위는 내게 있었다.
“날 부른 이유가 뭐지?”
“이유가 있겠나. 내 숙적을 보고싶어 그리했지.”
“숙적이라... 누가 누구와 맞붙게 될 줄 알고?”
“감일세.”
천마는 여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힘의 차이는 확실했지만, 솔직히 그녀가 뒤집지 못할 거라고 보이진 않았다.
허나 나도 뒤집혀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뒤로 따먹을 생각은 있어도.
“감이라.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해도 되나?”
“되더군. 주먹만 내질러도 전부 해결되니까.”
생각보다 머리를 안 쓰는 쪽인가 싶었다.
아니,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을 뒤바꾼 거다.
여기는 몸이 좋으면 머리가 고생할 필요가 없다.
양측이 대립한 지금도 결국은 주먹질로 해결되는 것 아니겠는가.
천생 무인인 년들이 바글바글하니 어쩔 수 없다.
‘떡협지도 무협은 무협이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해결하자고 부른 건가?”
출발할 때쯤 노을이 지던 하늘은 이제 완연한 어둠에 휩싸였다.
하도 거리가 먼 탓에, 막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알기는 힘들었다.
‘잘해주겠지.’
마교가 전력으로 오는 게 아니라면, 막아낼 수 있다.
애초에 이번 작전은 적당히 뚫리는 게 요체다.
소서화와 소율이라면 희생을 적게 만들 수 있을 거다.
“잘도 본좌의 수하들을 데려갔더구나.”
“날파리처럼 달려들길래. 이 두 손으로 잡아줬지.”
덤으로 아랫도리까지.
휘하의 장로들이 자신보다 내 자지를 더 따르는 걸 보면 어떤 얼굴을 할까.
나는 조금씩 기세를 끌어올리며 혁무린을 살폈다.
‘혈마는 놓쳤지만...’
두 번은 놓치기 싫었다.
이왕 떡협지 속에 떨어진 거, 천마는 따먹어 봐야지.
무림맹주랑 어디어디 장문인 정도는 이제 쉽다.
솔직히 세가의 가주도 내가 원하면 따먹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혁무린은 내 마지막 목표가 되기에 충분했다.
‘삼류일지 일류일지, 궁금하군.’
스산한 바람이 들판을 스쳤다.
조용히 날 바라보고 있던 혁무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본좌도 자네의 수하 몇을 잡아가기로 했네.”
“쉽지 않을텐데?”
객관적인 전력상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마교의 사군인 유미연, 안예인, 철기를 통해 교차검증한 마교의 전력.
절대지경에 이른 무인의 숫자도, 전체적인 무사들의 숫자도.
어디까지나 전부 이쪽이 우위였다.
‘살짝 불안하긴 하네.’
천마 혁무린은 원작에 없던 존재다.
즉, 내가 파악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영기(靈氣)로 무얼 더 할 수 있지?’
혈기처럼 수하에게 자신의 혈기를 나눠줌으로써 강화할 수도 있나.
천마의 힘을 지닌 초절정 고수라면 소율과 서화가 나서야 겨우 막아낼 거다.
하지만 그정도의 힘을 나눠줬다기엔 천마가 가진 여력이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그정도가 아니면 그 둘에게 막힐 텐데.’
난 초연한 천마의 눈을 보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걱정은 언제나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천마가 말장난으로 시간을 끄는 것일 수도 있다.
가볍게 상념을 털어냈다.
“불안해하는군, 네 여자들이 걱정되나?”
“걱정은 항상 하지. 그런데 그때마다 별일 없더라고.”
“이번은 다를 텐데.”
“아니, 이번도 같을 거다.”
강렬한 기운을 담은 자색 눈동자에 불이 붙었다.
“무릎을 꿇어봐야 깨닫겠구나.”
여름이 지나 가을이 다가오는 저녁은 쌀쌀했다.
천마가 기습적으로 내지른 수도는, 그보다 훨씬 서늘했다.
마치 공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바로 눈앞에 혁무린이 나타났다.
그녀의 손날이 매끄럽게 반월을 그렸다.
“큽!”
서걱.
왼쪽 가슴팍이 길게 그어졌다.
빠르게 허리를 비튼 덕에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
쿠콰과과광!!
내 뒤로 길게 폭음이 터져나갔다.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연격이 날아들었다.
“호오, 본좌의 첫수를 피해내다니.”
“천마신교 수준이 생각보다 별로군.”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는 족족 살결이 갈라졌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베고 지나가는 것처럼.
‘영기인가.’
아니면 천마신공일 수도.
사군 셋은 천마의 무공이 공간을 제어한다고 말했었다.
찢고, 가르고, 우그러트리는.
별다른 초식도 없는 무공이 그토록 강한 이유.
천마의 무공은 애초에 법칙을 뒤트는, 절대지경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다.
‘방금 위력을 봐선 피부만 갈라지는 내 몸이 이상한 거지.’
콰드드득!!
어느새 머리 위의 공간이 그대로 무너져내리는 듯 나를 짓눌렀다.
그녀는 손을 넓게 편 채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고 있었다.
“짓눌려 죽거라.”
“흡!!”
짧은 기합성과 함께 내기를 폭발시켰다.
그동안 쉴 새없이 쌓인 내 내공은 몸 전체를 그릇 삼아 압축되어갔다.
한계없이 받아들인 무한한 힘이 몸 바깥으로 폭사되었다.
“흠...”
넘치는 내력에 갈라지고 베어졌던 상처들이 빠르게 수습되어갔다.
혁무린은 쉽게 가를 수 없는 내기의 밀도를 보고선 뒤로 물러났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로 빽빽하게 공간을 메운 사내의 내공.
부서놨던 공간이 다시 강제로 메꿔지고 있었다.
“감히 본좌를 상대로 간을 본 겐가.”
“피차 시간을 끌고 싶은 건 마찬가지 아닌가?”
“본좌만 노림수가 있는 건 아니다... 그래, 그정도는 되어야 본좌의 숙적이지.”
혁무린 또한 내가 그냥 오지는 않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얼굴이 살짝 굳었다.
‘누구의 계획이 성공할지 보자고.’
그 뒤로 몇 번 더 그녀와 공방을 나눴다.
혁무린은 아직 내게 전력을 다할 시기가 아니라는 듯 그 이상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하지만 이미 내 절대가 무엇인지 그녀는 알고있을 거다.
감추려고 노력도 안 했고, 감춰지지도 않는 거니까.
‘안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어차피 오늘은 서로를 향한 탐색전.
너른 들판이, 거친 파괴에 풀 한 포기 남지않고 비워져갔다.
얼마나 그녀와 주먹을 섞었을까.
멀리서부터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한참 전부터 그를 느낀 나와 혁무린이 멀찍이 서로를 물러섰다.
“오늘밤은 본좌가 승리한 듯 하군.”
“...”
달려온 인영은 힘을 바닥까지 긁어썼는지 마기를 풀풀 피워내고 있었다.
하긴 혁무린이 날 불러낸 거리가 어지간히 멀었어야지.
“어찌 되었느냐.”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네 장로분 모두 구출했습니다!”
“그런가.”
“이런 씹...”
나는 분을 못 이긴 척 소식을 전하러 온 년에게 내기를 가득 담아 던졌다.
살벌한 기세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이 보였다.
콰아아앙!!!
하지만 그 얼굴이 뭉개지지는 않았다.
먼지구름 속에서 여상하게 들려오는 한 마디.
돌풍이 휘몰아치며 시야가 드러났다.
“쯧쯧, 사내라 그런가 마음이 좁군.”
“어차피 네년이 막았겠지.”
실제로도 혁무린이 손을 뻗어 공격을 막아냈다.
목숨을 건진 놈은 희희낙락한 웃음을 보이며 혁무린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지존!!”
“이만 물러가지. 다음에 볼 땐 좀 더 사내다운 처사를 보이도록.”
“너도 좀 더 계집다웠으면 좋겠군.”
“뭐라.”
툭 던진 말이었는데, 혁무린의 눈빛이 눈에 띄게 스산해졌다.
“무슨 뜻이지?”
다회간의 경험으로 무언가 잘못 말했다는 걸 깨달았다.
계집답다라는 건 여자답다는 뜻.
나는 빠르게 혁무린의 몸을 살피고 금방 결론을 냈다.
‘껌딱지군.’
천마면 좋은 거 많이 먹을 텐데, 전부 내공으로 갔는지 젖가슴이 나보다 작았다.
‘애초에 내 근육보다 가슴이 작은 여자가 많기는 하다만.’
저건 진짜 껌딱지였다.
손등에 젖꼭지만 달린 꼴이랄까.
그것보다 좀 낫기는 했지만.
빠르게 상념을 마치고 답을 내놨다.
“좀 웃으란 거다. 그 예쁜 얼굴로 맨날 무표정이면 보는 맛이 없지.”
“흥, 주위에 계집이 많다더니 입발린 소리는 잘하는군.”
“아니, 진짠데...”
“다음에 보면, 네놈과 본좌 둘 중 하나는 죽어야할 것이다.”
“아니...”
섬뜩한 경고를 내린 혁무린이 눈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남은 마교의 여무사도 헐레벌떡 그 뒤를 쫓았다.
나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연합군으로 서둘러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