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하고 박살을 내놨군.”
연합군의 진영은 초토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위풍당당하게 휘날리던 정파 무림의 깃발들은 박살나고 부서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마교의 기습 부대는 충분한 활약을 하고 사라졌다.
“여기 부상자가 더 있습니다!”
“어서 의원들 쪽으로 보내게!!”
그래도 아수라장까지는 아니었다.
무사들은 체계적이고 신속하게 피해를 수습하고 있었다.
소문이 퍼져나갈 걸 우려해 일반 무사들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수뇌부 쪽은 어느정도 작전의 개요를 파악하고 있었다.
생사를 걸고 싸우지 말고, 적당히 물러나라.
마교의 장로들은 비수가 될 것이다.
마교의 무사들이 연합군 진영을 기습하기 몇 시진 전, 들었던 이야기였다.
“정말 그분의 계획대로 될까?”
“어쩌겠나, 마교의 장로년들을 잡아온 게 신룡이시니, 그분이 정하는 게지.”
한바탕 피와 땀을 흘린 수뇌부들이 숨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쉽게 내어준 것이 아닌가.”
“맞네, 그정도의 전력이면 마교에게 혈교를 내놓으라 할 수도 있었는데.”
무혈입성. 무혈승리.
피를 흘리지 않고 승리의 과실만을 취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곧 그들의 불만은 조용히 수그러들었다.
입구에서부터 강대한 존재감과 낮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다들 잘해주시었소.”
연합군 수뇌부 막사에 새카만 피부의 사내가 거침없이 들어왔다.
뒤로는 천극혜검과 무림맹주를 거느린 채.
정파의 기둥인 두 여인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사내의 앞으로 걷지 않았다.
곧 그가 상석에 앉자, 그 옆으로 두 기둥이 다소곳이 앉았다.
그것이 자신의 자리라는 듯.
누군가가 그 모습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진정... 중원 무림이 저 시커먼 놈의 손에 들어가는구나.’
그녀의 아들은 사내를 탐하는 미친놈이 되어버렸고.
딸은 두 번째 혈사에 휩쓸려 큰 부상을 입었다.
‘찢어죽일놈...’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련이 이를 으득 갈았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넘어갔다.
이대로 정도연합군이 승리한다면, 무당신룡은 범접할 수 없는 성역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그것을 훼방놓았다간 천마의 발아래에 짓밟힐 노릇이었다.
‘어찌 해야하는가!’
남궁련이 눈을 부라리며 주변을 흝었다.
해남파의 장문인, 오인혜가 여상스러운 얼굴로 앉아있었다.
눈이 마주친 그녀와 조용히 시선을 나눴다.
오인혜의 아들인 오도결 또한 남색에 푹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묘한 동질감이 두 여자의 사이에 감돌았다.
‘뭔데 갑자기 째려보는 거야.’
그냥 잘했다고 한 마디 했는데 그게 그렇게 꼬운가.
난 남궁련을 살짝 흘기고는 말을 이었다.
“못미더운 계획인 것은 알고 있으나, 여기 두 분께서도 허락하셨으니 믿어주시길 바라오.”
아직 내 권위가 부족하니, 소율과 서화 누님을 빌렸다.
어차피 내 여자들이니 그게 그거다.
“허면 이제 어쩌실 생각이시오?”
잠깐 이어진 침묵에 남궁련이 못 견디겠다는 듯 물어왔다.
“정공법으로 갈 것이오.”
“정공법이라니?”
“한 걸음씩 차분하게, 마교의 숨통을 죄어갈 것이오.”
다들 얼굴에 조금씩 불만이 서렸다.
해야되는 일은 해야되는 게 맞지만, 그래도 불만이 생기는 게 바로 인간이다.
남궁련이 쏘아붙이듯 입을 열었다.
“이쪽의 전력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폭풍처럼 몰아쳐 마교놈들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주면 안됩니다.”
“맞소, 무당신룡께서 아직 전쟁을 잘 모르시나본데. 본디 전쟁은 흐름이란 것이 있는 법이오.”
“이미 한 번 습격을 당했으니, 반격을 꾀해야 하오. 이리 꾸물대면 무사들의 사기도 더 떨어질 거요.”
남궁은 오대세가의 필두였다.
비록 지금은 후계가 죄다 박살나서 빌빌거리고는 있지만.
남궁련이 당당하게 나오자 다른 세가들이 한 마디씩 보탰다.
여기서 바로 당근을 줘서 불만을 잠재워도 좋겠지만, 그래서야 만만하게 보일 뿐이다.
나는 슬그머니 막사 안쪽을 내 기세로 가득 메워갔다.
“허면, 바로 돌격하자는 뜻입니까?”
“큼큼, 그것은 아니더라도...”
“굳이 이런 계책을 벌여 적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자는 거였소.”
궁색하게 변명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제일 앞장설 것이 누구 같소, 남궁 가주?”
정직하게 팩트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살짝 창백해진 안색의 남궁련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와 천극혜검, 그리고 무당의 이장로 운휘가 나설 것이오. 맹주님께서는 후방을 위해 남는다 하더라도, 전부 무당 출신이오.”
“...”
“듣자하니 습격에 왕대식이라는 마교의 일장로가 직접 왔었다는데, 누가 막았소?”
이번에도 답은 없었다.
나는 오자마자 보았던 소율의 상처에 화가 났었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녀가 다쳤다.
‘만유라면 전부 흘려낼 수 있었을 텐데.’
대식이가 그렇게 강했던 걸까.
살벌해진 내 기세에 숨결이 거칠어진 남궁련을 보며 기운을 가라앉혔다.
옆에선 소율이 내 팔뚝을 슬며시 쓰다듬었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결국, 절대에 이른 우리들이 나서겠지. 그대들은 무얼했소?”
우리가 하는 게 맞지만, 또 우리 밖에 없었다.
조금 억울하다는 얼굴을 한 세가의 가주 하나가 입을 열었다.
“무사들을 이끌지 않았습니까. 맹주님의 명대로, 최대한 손실을 피했습니다.”
“그래서 잘했다 하지 않았소? 정도연합군은 순조롭게 승리로 나아가고 있고, 마교의 장로들을 보낸 것은 잘 짜여진 계획이었소.”
어차피 싸우긴 할 거다.
하지만 이년들이 밀어붙여서 싸우는 모습은 안된다.
오롯이 내 선택으로 정도연합군은 움직여야 했다.
“불만 있으시면 당장 무사들을 데리고 돌아가시오. 말리지 않겠소.”
“...죄송합니다.”
“후... 아니오, 그럴 수 있지. 믿기 힘든 계획이니.”
이쯤에서 살짝 풀어줬다.
어차피 자기 권리를 위해 내게 불만을 표출하는 거니까.
상벌을 내리는 건 상급자의 역할.
누가 위인지 각인시켜줘야 했다.
“하니 걱정말고 승리하는 것에만 최선을 다하시오. 마교와 혈교를 제압하고 나면, 그 빈 곳을 우리가 관리해야 하지 않겠소?”
승리 후에 떨어질 보상을 입에 올렸다.
지금까지 아무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
무림맹주와 천극혜검조차 말하지 않았던 것을 내가 꺼냈다.
막사 안에선 작은 탄성과 호응이 몰아쳤다.
“꼭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의 것이 아닐 수도 있소. 무림맹의 이름으로, 다른 문파들 또한 권리를 챙겨갈 수 있을 것이오.”
결국은 그리 크지 않은 것들이겠지만.
땅은 넓으니 갈라먹을 수 있는 것도 많았다.
“뭐, 우리 무당에서 가장 많이 가져갈 거라는 건 알아두시오.”
이에 대해선 이견이 없었다.
무려 절대 고수 셋이 무당 출신이었다.
나와 그녀들이 없다면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그럼 이만 회의를 파하도록 하겠소. 내일 아침 다시 혈교로 진군할 것이니 그리들 전하시오.”
연합군 수뇌부들이 빠져나가고 침묵이 막사 안에 감돌았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건 소율의 신음성이었다.
“으음...”
“...괜찮아?”
“괜찮느니라. 오랜만에 싸워 감이 좀 떨어졌던 게지.”
“아닌 것 같은데.”
소율의 옆구리 쪽에 길게 난 검상.
그 위에 덮인 붕대를 가볍게 매만졌다.
“읏... 아프니라.”
“칠칠맞게 진짜.”
“쯧, 오늘은 내가 끼어들 틈도 없겠구나. 밖이나 둘러볼테니 염장질 잘하고 있거라.”
나가는 소서화를 따라나와 배웅하고, 소율과 함께 내 천막으로 돌아왔다.
그새 흥건하게 피가 묻은 붕대를 갈고 함께 침상에 누웠다.
소율이 내게 뭉그적대며 안겨들었다.
“흐흥, 좋구나.”
나는 말없이 그녀의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살랑거리는 머릿결에서 달콤한 내음이 풍겨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맡아지는 연한 피냄새.
‘대식이는 뒤졌다.’
이름에 걸맞게 평생 노예로 살게 해줄 거다.
그렇게 다짐하며 천천히 소율의 옷을 벗겨냈다.
호롱불에 은은하게 드러난 피부를 쓰다듬고, 입을 맞추며 끌어안았다.
“흐응... 욘석, 본녀가 그리웠더냐.”
“응, 엄청.”
그리워할 새도 없이 딴 여자랑 떡쳤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거짓말쟁이구나. 오면서 그년들이랑 질펀하게 즐겼을 것이 뻔한데.”
“...크흠.”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는 소율의 손길을 즐겼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 속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응... 그랬지.”
소율의 눈빛이 반짝였다.
슬며시 내 손을 잡고선, 앙증맞은 배꼽 위에 올려뒀다.
처음엔 고개를 비스듬하게 세웠다가, 이내 뜻을 알아차리고 입을 벌렸다.
“...설마.”
“왜 설마느냐? 본녀의 나이가 좀 있다해서...”
“아니, 진짜로?”
“그래, 진짜로.”
나는 그녀의 배에 귀를 가져가 기울였다.
아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 속에, 소율은 무언가 느꼈던 걸까.
벌써 세 번째라 막 벅차오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은은한 미소를 띠며 그녀와 입을 맞췄다.
내 아이를 품은 여자는 언제나 사랑스러웠다.
“축하해.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구나. 시기가...”
“아니야. 애초에 천마를 상대할 건 나였고, 다른 이들은 서화 누님과 이장로면 충분할 거야.”
일단 수정이 되면 아기가 자궁에 착상할 때까지는 괜찮다.
내가 파악한 바로는 그랬다.
그런게 아니면 이 미친 세계에서 임신이 가능할 수가 없다.
‘그래도 결국 힘을 제대로 못 쓰는 건 매한가지지.’
아기가 어찌될지 모르니 왕대식에게 밀리는 것도 어쩔 수 없었을 거다.
나는 배꼽이 맞닿도록 소율을 꼬옥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셋째네, 벌써.”
“딸만 둘이니 아들이면 좋겠구나.”
“쓰읍... 소율을 닮으면 승질 더러워서...”
“이놈이!!”
찰싹거리며 내 몸을 때리는 그녀를 제압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더 이상 입으로 나눌 대화는 없었다.
조용히 달아오른 몸을 겹치고, 진한 정을 소율의 안에 쏟아넣었다.
다친 걸 고려해 적당히 하기는 했지만 소율이 오히려 내게 달라붙었다.
오늘의 싸움이 피곤했는지 곤히 잠든 그녀를 눕히고 막사를 나섰다.
“들었느냐.”
“네, 이것참... 제 정력이 너무 좋아서 걱정입니다.”
“...미친놈.”
“누님도 원하시면 말씀하세요. 소유도 삼촌이나 이모가 있으면 좋겠죠.”
“이 미친놈이!!”
한바탕 소란이 나고서야 소서화가 분을 삭혔다.
“후... 아무튼, 천마를 만나고 온 것이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지 못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모를 뿐이지.’
하지만 애초에 모르는 게 정상이다.
적의 상황을 전부 알고 싸우던 지금까지가 쉬운 거였지.
“어떠하더냐. 네가...”
나는 조심스레 물어오려는 서화 누님에게 담담히 답했다.
“이길 겁니다. 천마도 여자더군요. 혈교주는 놓쳤으니, 천마는 놓치지 않을 겁니다.”
“...이제 애가 셋이나 생기니 좀 진중해질 줄 알았건만, 그대로구나. 그래, 그래야 네놈답지.”
“저다운 게 뭔지 더 느끼고 싶지 않으십니까?”
“...뭐?”
모두가 잠든 막사 밖에서 무림맹주와 몰래 하는 섹스는 스릴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