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른 전당.
과거 혈교의 교주전이었던 이곳에선 이제 붉은색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검보랏빛의 깃발들과 휘장이 휘날리고.
천마신교라 적힌 편액이 전당의 대문 앞에 당당히 걸려있었다.
그 안에 수많은 인물들이 몸을 납작 엎드린 채 한 존재를 향해 경배하고 있었다.
"천세! 천세! 천천세!!"
그중에서도 가장 앞줄이 있는 여인은 목이 터져라 그녀의 신을 추앙했다.
오늘의 승리도 지존 덕에 승리한 것 아니겠는가.
시시각각 몰려오는 정도연합군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 오늘의 전투.
마교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았다.
그리고 마교의 일장로, 왕대식은 전당의 바닥이 더 낮지 않은 것에 한탄했다.
조금 더 지존을 우러러 보아야하는데 전당 바닥은 너무 높았다.
'지존의 옥좌를 더 높이 올려야겠군.'
전당 바닥을 팔 순 없으니 지존의 자리를 올리면 된다.
간단히 고민을 바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존이시여, 오늘 무도한 정파 무리에게 감금당한 천마신교의 장로 넷을 구해왔사옵니다!!"
"수고했네, 일장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숫제 황제에게나 할 법한 인사에 혁무린의 안색도 미미하게 떨렸다.
'언제나 왕 장로는 적극적이군.'
기반이 없는 자신을 지금까지 한 치의 의심없이 보필해온 그녀.
다른 누구라면 몰라도 왕대식은 그녀의 마음 한켠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장로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천만 다행으로 한 명을 빼곤 자잘한 부상을 입었을 뿐 멀쩡하옵니다."
"한 명? 누구지?"
"사장로 철기의 부상이 조금 심하옵니다. 속히 안정을 취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들이 정파에게 무슨 짓을 당했을지 모르니 현재는 구금 상태였다.
혁무린은 마교의 장로들을 아직 믿지 않았다.
제대로 그들을 보아온 시간은 겨우 몇 년 남짓.
잡혀있던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몰랐다.
-사장로 철기의 정신이 무너진 것 같사옵니다. 지존의 천마기(天魔氣)로 살펴보심이 어떠한지요.
뒤이어 들려온 일장로의 전음.
마교에서 육체적인 부상은 흔하지만, 아예 정신이 나간 정도라면 보고도 조심해야했다.
중요한 전쟁을 앞둔 지금 아군의 사기를 굳이 깎아먹을 필요는 없었다.
'헌데, 사군의 칭호를 받은 사장로를... 무너트렸다라.'
무진과 싸우고 돌아온 그녀는 아직 장로들을 보지 못했다.
수하가 보고를 하러 온 것은 이미 마교가 퇴각한 지 한참 후였으니.
혁무린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바라보던 사내를 떠올렸다.
'그리 악랄한 자는 아닌 듯 보였는데.'
사장로 철기는 절대지경에 오른 무인이다.
그 말인즉, 그 정신력만 해도 범인 따위가 골백번 죽어도 넘볼 수 없는 수준이란 뜻이었다.
대체 잡혀있는 동안 무슨 짓을 당했길래, 절대지경의 무인이 생을 포기하고 정신을 놔버렸을까.
"모진 고문을 당했을지도 모를 터, 심처로 옮겨 상처를 치료하게."
"존명!"
혁무린은 그리 명을 내린 뒤 전당을 나섰다.
그녀의 뒤에는 일장로 왕대식이 뒤따랐다.
주변의 시선과 기척이 사라졌을 무렵 혁무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동에 모두 옮겨놓았는가."
"예, 지존. 네 장로 모두 혈도를 제압하고 산공독을 먹여두었습니다."
왕대식은 수십 년간 함께 해온 장로들에게 독을 먹이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동안 지존의 앞에서만 고개를 숙이던 장로들을 휘어잡을 기회였다.
‘그리고 지존이시라면,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실 것이야.’
혁무린과 왕대식의 발걸음이 본래 혈교주의 것이었던 비동으로 향했다.
혈기의 특성상 역하고 질척한 기운이 가득할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달랐다.
왕대식이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역시 본교의 천마비동과 비슷하군요."
"그래, 오히려 몇백년간 쓰지 않은 탓에 그곳보다 영기가 짙지."
오히려 혈교주의 비동은 전설 속의 무릉도원처럼 영험한 기운이 물씬 풍겨왔다.
은은하게 깔린 안개와 청명한 수목, 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혈교 또한 처음의 뜻은 달랐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하겠지. 본디 종교란 그런 질척하고 역겨운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고고해야하는 것이니까."
혈교 또한 처음엔 순수한 의미의 종교였으리라.
그것을 증명하듯 이곳은 순수하고 깨끗한 영기로 가득했다.
천마의 비동처럼 영기를 수련하기에 정말 좋은 곳이었다.
'언젠가부터 피가 가진 광기에 사로잡혔었겠지.'
마기를 지닌 천마신교도 그처럼 변질될 수 있었으나, 순수하게 힘만을 추구해온 덕분일까.
혁무린은 자신의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맑음을 알고있었다.
'아니, 하나가 조금 걸리는가.'
문득 내리깐 시선이 가슴팍으로 향했다.
조금 튀어나온 것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절벽.
뒤에 걷고있는 왕대식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계집다우라니. 본좌에게 그런 것이 왜 필요한가.'
크기만 한 젖가슴은 싸움에 방해가 될 뿐이다.
자신이 혼인하여 아이에게 젖을 물릴 것도 아니건만.
'근데... 또 예쁘다니, 크흠...'
무공이나 오성, 전투에 대한 칭찬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던 그녀에게.
평범하디 평범한 아름답다는 칭찬은 처음이었다.
설령 그것이 적에게 받은 것일지라도.
"웃으라니..."
"예?"
"일장로. 웃으라는 게, 이리 입꼬리를 끌어올리면 되는 것인가?"
문득 궁금해져 그녀에게 물었다.
왕대식은 항상 자신을 보며 잘했다, 최고다 웃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니까.
"...그리하시면 무서울 뿐입니다. 물론 지존께서 위엄을 보이실 땐 그리해도 되옵니다."
"그러지 않을 땐?"
"눈도 같이 웃어야지요. 이리 말입니다."
"...흠."
뜬끔없는 물음이지만 왕대식은 최선을 다해 답했다.
지존이 원하는 일은 곧 그녀가 원하는 일이니까.
다행히도 경국지색이라 할만한 미모의 지존은, 어색한 웃음도 가슴이 떨리도록 아름다웠다.
"역시 지존. 웃으시는 자태마저도 천하에서 따라올 자가 없사옵니다."
"크흠, 이제 가지."
"예.“
괜스레 부끄러워진 혁무린이 발걸음을 빨리했다.
비동의 안쪽으로 향하자 네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하면서도 조금은 불편한, 그런 넷이었다.
'오늘로써 확실히 본좌의 위치를 확고히 하겠다.'
천마라 불리는 여인이었고, 십만대산의 무수한 신도들이 따르는 교주다.
하지만 이제 겨우 약관에 이른, 소녀티를 조금 벗어낸 여인일 뿐이었다.
오롯이 홀로 서기엔 아직 부족함이 많았다.
시간도, 실력도.
그녀가 꾸욱하고 쥔 주먹을 바라보았다.
‘무당신룡, 그 사내는 분명 본좌의 위였다.’
사내는 짐짝보다 조금 나은 취급을 받는 이 무림에.
그만한 남자 고수가 있다니.
내심 그의 주변에 그리도 많은 여인들이 있는 게 이해가 갔다.
‘허나 그저 본좌의 적일 뿐이지.’
마교의 부흥과 일신의 무력을 위해 달려온 20년의 세월.
고작 사내 따위에 무너질 자신이 아니었다.
"이장로부터 보겠네. 일장로는 그만 가보아도 좋아."
"존명."
왕대식은 깊게 고개를 숙이고 비동을 빠져나갔다.
곧 이장로 안예인의 앞에 혁무린이 자리했다.
"몸은 좀 어떠한가."
"지존의 보살핌 덕에 많이 괜찮아졌사옵니다."
"살이 좀 빠진 듯한데, 건강해보여 다행이군."
다소곳이 절을 하는 안예인이 흠칫했다.
쉬지도 않고 무진과 몸을 섞었으니 살이 빠질만도 했다.
그토록 많은 정을 받았으니 몸에 보양식이 따로 없었고.
"고생했네. 다만, 이장로를 본좌가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있겠지."
"맹세코 그들에게 말한 것은 없습니다. 고작 고문 따위에 굴복할 속하가 아니옵니다!!”
안예인의 억울하고도 당당한 목소리에 혁무린이 눈에 영기를 집중했다.
‘흠?’
그녀는 안예인의 머릿속에서 이질감을 보았다.
유일하게 영기를 다루는 그녀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
아주 은밀하고 섬세하게 안예인의 영혼을 옭아맨 끈 같은 것이 보였다.
"진실로 당한 기억이 없는가? 무엇이라도 좋네, 말해보게."
정황상 안예인이 무언가 당한 것은 확실했다.
급히 영기를 퍼트린 결과 안려인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같은 증세였다.
'허나, 영기로 보인 이상 지워낼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
혁무린은 그 전과 후를 비교하고자 했다.
마기와 영기가 뒤섞인 천마기를 끌어올리며 그녀가 안예인을 타일렀다.
"전쟁을 앞둔 시기에 확실히 해야하지 않겠나. 이장로 휘하의 이들을 위해서라도."
배신자라면 그 아래의 모든 것을 쳐낼 준비는 되어있었다.
전력이 약해질 지라도 독을 품고 싸울 수는 없는 법.
안예인이 우물쭈물하며 망설였다.
"배신자니 지금 죽여달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나?"
망설이던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뒤 부끄러운 듯 수치심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범...해졌습니다. 그놈에게."
“...범해져? 본좌가 생각하는 그 뜻이 맞는가?”
“...예. 그 사내는 속하의 몸을 지독하게도 탐했습니다.”
혁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예인 정도의 고수에게 사내란 날마다 갈아치울 수 있는 종류의 쾌락 중 하나였다.
삼장로인 유미연이 그러했다.
‘허나 이장로는 사장로와 각별하지.’
부부의 연을 맺은 지는 수십년째.
그 아래에 자식은 없지만, 둘 사이의 금슬은 참으로 좋았다.
둘 모두 다른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일장로가 그에 대해 허투루 보고했을 리는 없으니, 흠...’
그녀는 곰곰이 생각했다.
안예인의 몸에 다른 부상이나 고문의 흔적은 없다.
그렇다면 무당신룡은 순수하게 이장로와 몸을 섞었다는 의미.
하지만 그녀의 영혼엔 무언가 남아있었고, 정사를 하는 와중에 그랬다면...
‘색공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종류의 무언가였다.
“그와... 교접하면서, 다른 일은 없었나? 빠짐없이 이야기하게.”
“...그, 별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그저...”
“그저?”
“...기분이, 정말, 정말로... 좋았습니다. 눈앞이 하얘지고, 허리가 절로 들썩이며 짐승처럼 교성을 내질렀습니다.”
“...”
“그의 정력은 끝이 없었습니다. 제 비부에 그의 정액이 채워지고, 또 채워지고, 그만하라 울부짖어도 계속해서...”
“그만.”
“...예.”
안예인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얼굴엔 희미한 쾌락이 서려있었다.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열락이 물들어 있었다.
‘...정말이로군. 읏...’
영기를 다루는 혁무린은 상대의 감정변화에 민감했다.
안예인이 떠올리고 있는 폭력적인 쾌락이 영혼의 울림을 타고 넘어왔다.
서둘러 영기를 거둔 혁무린이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그는 사장로 철기의 앞에서 저를 범했습니다. 오는 내내,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정파의 인물이 아니던가?”
“맞습니다. 그는 사장로가 괴로워하는 것을 즐기며 끊임없이 저를...”
“범했다는 이야기는 좀 그만하게. 기분 좋았다는 거 알겠으니까.”
“...예.”
더 이야기를 들었다간 자신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 같았다.
그래도 사장로가 무너진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우선은, 자네에게 씌여진 사술을 하나 벗겨내도록 하지.”
“사술이라니요. 속하 그 무엇도 당하지...”
“그만. 그놈 하나를 이기지 못해 줄줄이 잡혀간 이장로가 할말은 아닐세. 이후, 폐관에 들어가 전쟁 전까지 몸과 정신을 다스리게나.”
안예인이 알겠다는 듯 낮게 몸을 엎드렸다.
곧 혁무린이 손을 뻗어 천마기로 그녀의 몸을 훑어냈다.
찌직, 찌지직...!
“흐으읏...”
“읏...”
천마기를 타고 사술이 자신에게 넘어오려다 산산이 부숴졌다.
도대체 정파라는 놈들이 이런 추악한 사술이나 쓰다니.
‘절대로 질 수 없겠군.’
혁무린이 전의를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