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우웅, 우웅...
혈교주의 비처, 이제는 천마가 자리한 곳에 거대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검보랏빛을 띠는 기운이 쉼없이 그녀의 몸 주변을 지나다녔다.
이미 한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육신이 다시 한 번 영기를 받아들여 강해져갔다.
이내 한 점으로 뭉친 영기는 혁무린의 정수리를 통해 체내로 전부 갈무리되었다.
‘도움이 되는군 그래도, 무당신룡.’
영기를 깨우쳤다는 것은 상단전의 통로가 하늘에 닿아있다는 뜻.
그녀는 무당신룡과의 일전과, 장로들에게 걸려있던 사술을 제거해내며 또다시 발전을 이루었다.
‘이런 느낌이었던가.’
혁무린의 손에서 은은한 빛줄기가 흘러나왔다.
마치 실처럼 뽑아진 빛줄기가 막 하늘을 날아오르려던 참새에게 달라붙었다.
“옳지.”
순식간에 그 미물의 영혼을 장악한 빛줄기를 타고 혁무린의 의지가 흘러들어갔다.
포르르 자신의 앞으로 날아와 그 작은 몸을 숙이는 참새.
혁무린이 슬쩍 손가락을 뻗어 참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운이 연결되기는 했지만 강제력은 없었다.
그녀가 행한 것은 오직 의지뿐.
“흠, 쓸만하군.”
장로들의 몸에 있던 사술을 응용한 기술.
그녀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참새를 날려보냈다.
뒤편에서 누군가 조심스레 기척을 내며 다가왔다.
“감축드리옵니다, 지존. 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셨군요.”
“왔는가.”
왕대식이 주인의 신위에 감복하며 입을 열었다.
이내 몸을 일으킨 혁무린이 그녀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왕대식은 보지 못할 하얀 기운이 그녀에게로 날아가 달라붙었다.
“...지존?”
“본좌를 공격해보거라.”
“어찌 그런 말씀을...”
“싫다면 강제로 해봐야지.”
“예...? 아, 아니!!”
갑작스레 내려진 명령과.
갑작스레 움직이는 육체.
‘몸의 통제가...!!’
한 번 튕기긴 했지만 결국 검을 뽑을 것이었다.
마교란 그런 곳이니까.
허나 지금 검을 뽑아 지존의 목을 향해 휘두르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절대 아니었다.
왕대식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지, 지존! 속하의 몸이 통제가 되지 않사옵니다!!”
“흠, 역시 쓸만하군. 벗어날 수 있겠나?”
“큭... 지존, 속하를 멈추어 주십시오!”
혁무린은 엉성하게나마 자신을 공격해오는 왕대식을 비껴지나가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사군 필두인 그녀가 애를 썼지만 마령사(魔靈絲)라 이름 붙인 기술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래도 저항은 가능한지 덜컥거리는 왕대식의 육체.
혁무린이 마령사를 회수했다.
“풀어주었으니 따라오게.”
“지, 지존? 어, 어디 가십니까!”
기묘한 자세로 멈춰선 왕대식이 황망한 얼굴로 달려왔다.
혁무린은 그런 그녀를 보며 며칠 간의 성과를 갈무리했다.
‘이정도만 되어도 장로들은 반항하지 못할 터.’
영기에 저항할 수 없는 이상, 장로들은 천마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정파에서 무슨 짓을 당했든 간에 더는 자신을 위협할 수 없으리라.
‘중요한 순간에만 발휘해도 효과가 좋겠군.’
사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팔장로 안려인이 했던 말이 컸다.
-이장로와 삼장로는 진심으로 그를 따르는 듯 보였습니다.
아무리 사술을 썼다하지만 절대 고수의 정신력을 지닌 둘을 완벽히 제압했다?
마냥 믿기에는 어려운 이야기였다.
안려인은 그 미심쩍은 부분을 제기했다.
‘오히려 수십 년간 함께 살아온 친족의 말이 믿을만 하지.’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건지, 안려인에게는 사술의 흔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온전한 정신으로 바라본 언니의 모습이니 더욱 믿을만 했다.
-혹, 팔장로도... 놈에게 범해졌나?
-소, 속하는 그런 적 없사옵니다.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안려인이 푹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더 남은 듯 했는데 묻기가 꺼러졌다.
‘또 그런 음탕한 말들이 나올까 꺼림칙하군.’
실상은 제 언니에게 범해지고 절정에 다다른 안려인이 수치심에 입을 다문 거지만.
혁무린은 언니 부부의 치태를 동생의 입으로 다시 듣는 게 꺼려진 것이었다.
‘아무튼, 감히 본좌의 수하들을 이리 만들다니. 무당신룡이 꼭 값을 치루게 만들어야겠군.’
그 값으로 놈의 목숨과 지조 없는 하초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지존을 뵙사옵니다!!”
교주전으로 들어선 혁무린을 향해 우렁찬 인사가 들려왔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더 높아진 옥좌에 올라 앉았다.
“전황을 보고하게.”
혁무린의 명령에 지선 사마유가 고개를 숙였다.
“예, 지존. 현재 정도연합군은 이곳 납사성을 향해 빠르게 진군 중이옵니다.”
포달라궁이라고도 불리는, 서장 납사성의 홍궁.
서장의 중앙에 위치한 명실상부한 혈교의 중심지였다.
몇백여 년간 혈교도들이 축조한 납사성은 단 한 번도 외적의 침략에 뚫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천마신교의 수중에 떨어지고, 이젠 정파의 무리까지 이곳을 넘보고 있었다.
사마유는 그 사실에 그리 큰 감흥을 느끼진 않았다.
“주변의 다른 성이나 마을은 건드리지 않는 겐가.”
“예, 지존. 다른 성은 우회하고 마을은 조용히 지나가며 납사성을 향해 직진으로 오고 있사옵니다.”
그동안 몇 번 더 마교의 기습 부대를 보냈지만 정도연합군의 방어는 단단했다.
저번의 습격에 화들짝 놀라 바짝 약이 오른 듯 보였다.
‘혹은 역으로, 그때만 약하게 보였던 것일 수도 있지.’
허나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다.
네 명이나 되는 마교의 장로들을 놓아준다?
그들을 통제할 방법이 있다면 몰라도, 어리석은 계획이었다.
‘어차피 지존이 계신다면 그 어떤 반역도 성공할 수가 없어.’
며칠간 폐관을 마치고 모습을 보인 천마는 또다시 강해졌다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미 하늘에 선 상태에서 그리도 빨리 올라갈 곳이 더 있다니.
“지선이 준비한 함정이나 진법은, 어떻게 되었는가?”
“...조금 소득을 보았으나... 저쪽의 군사도 만만치 않아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사옵니다.”
“그런가.”
사마유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가치를 보이지 못했으니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목숨이었다.
하지만 천마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더 강해져서 그런 걸까.
자신같은 자잘한 인물에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이 속도로 언제쯤 그들이 납사성에 당도하겠는가?”
“사흘이면 도착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옥좌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천마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일장로. 지선을 도와 출정 준비를 시작하게. 다른 장로들도 폐관을 풀고 준비하라 이르고. 납사성 앞 평야에서 추악한 정파 무리들을 격살한다.”
“존명!!”
우렁찬 왕대식의 대답 뒤로 사마유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 지, 지존. 아,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지선! 감히 지존께서 정하신 작전에 불만이 있는가!"
왕대식의 눈이 번뜩였으나, 그녀로서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혁무린이 손을 휘저어 왕대식을 물렸다.
"되었다. 그러라고 있는 군사이니. 말해보거라."
“감사하옵니다. 지존, 납사성은 애초부터 침략에 대비해 축성한 곳이옵니다. 굳이 성의 이점을 버리시고, 평야의 회전을 택하시는 건...”
군사라면 응당 나은 방법을 제시해야했다.
지금까지 전부 실패했던 사마유는 정석을 입에 담았다.
허나 천마는 여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본좌는 무인일세. 병사가 아니라.”
“죄, 죄송하옵니다. 속하의 뜻은...”
“그만하시게, 지선! 지존께서 정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따르면 될 뿐이네. 알겠나?”
"...알겠습니다."
내심 힘과 힘이 격돌하는 회전을 바랬던 왕대식이 사마유를 다그쳤다.
천마도 그쯤하면 됐다는 듯 왕대식을 말리지 않았다.
‘이런 미친 싸움광 새끼들...’
이성적인 사마유로서는 참기 힘들었다.
굳이 악수를 택하는 저 머저리들이.
혈교고 마교고 그녀에게 맞는 짝이 없었다.
“그럼...”
천마, 혁무린은 옥좌에서 일어서 선언했다.
“사흘 뒤, 정도연합군이 납사성에 가까워질 때쯤 출정하라.”
“존명!!”
“천세! 천세! 천천세!!”
*
깊은 밤.
작은 누각 하나에 두 여인이 몰래 숨어들었다.
“지존께서 우리를 믿고 있으실까요?”
“말 똑바로 해요, 삼장로. 우리가 존대할 분은 공자님 뿐이에요.”
“...아무튼. 어찌 생각해요?”
유미연의 말에 안예인이 눈을 감았다.
마교로 돌아온 며칠간, 천마에게서 다른 행동은 눈에 띄지 않았다.
‘미색령의 통제를 풀어내고선, 우리를 저택에 연금 시켰지.’
아마 그 뒤로 기운이 더 강해진 걸 보면, 또다시 한 걸음 나아간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과 장로들은 수십 년 고련해서 쌓아온 길을, 천마는 단 며칠 만에 해내고 있었다.
아마 마교를 등진 이유엔 거기서 나오는 열등감과 패배감도 있을 것이다.
길을 바꾸자 마음 속 깊이 숨어있던 열패감이 자신을 적셨었다.
‘마교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내 마음이 조금 달랐을까.’
태어날 때부터 천마를 섬겼다면 그 강함에 매료되었지 질시하지는 않았을 거다.
허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괴물년. 네년도 공자님 아래에 깔려서 울부짖는 꼴을 내가 꼭 볼 것이다.’
안예인이 가볍게 고개를 털며 눈을 떴다.
황홀했던 마차에서의 나날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랫도리가 푹 젖어왔다.
그걸 모르고 살아온 지금까지의 인생이 전부 손해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우리를 믿지 않고 있던 천맙니다. 그대로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죠.”
“...이장로는 공자님을 굳게 믿고있군요.”
“삼장로는 아니란 소리로 들립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 또한 공자님을 섬기기로 한 몸인데요. 그냥... 조금 아쉬운 것 뿐이지.”
이제 꽤 아문 상처를 쓰다듬으며 유미연이 투덜거렸다.
하다못해 다리나 팔을 공격했으면 공자님과 잘 수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만한 남자를 또 찾을 순 없겠지.’
눈으로 본 것과, 입으로 느낀 것이 있었다.
그것이 가져올 쾌락을 그리는 순간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다.
“아무튼, 우리는 공자님의 명에만 따르면 돼요.”
“...알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둘은 갈라져 각자의 저택으로 향했다.
안예인은 돌아오자마자 정원을 서성이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부...인...”
“아, 부군. 안에 있으라 했잖아요.”
천마가 다녀간 이후로 어느정도 이지를 회복한 철기.
안예인은 철기를 토닥이며 안쪽으로 향했다.
“자자, 내일 정도연합군이 올 테니 방으로 가서 코 자요. 알았죠?”
“아랐소...”
안예인은 철기를 데리고 자신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철기의 수혈을 가볍게 짚어 잠재운 그녀는 욕실로 향했다.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큰 각좆을 들고서.
그녀는 활짝 넓어진 비부를 쑤시며 얕은 교성을 흘려냈다.
“부인...”
그리고 혈도를 짚혀 잠든 줄 알았던 철기가 눈을 떴다.
그는 아내가 들어선 욕탕을 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무당신룡 이 육시랄 놈. 네놈의 여인들을 전부 찢어죽여주마.’
혁무린의 천마기로 이지를 회복한 그는, 욕탕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교성에 딱딱하게 발기한 자지를 잠재우려 애썼다.
다음날 정오.
정도(正道)라 쓰여진 깃발을 위풍당당히 세운 연합군이 납사성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