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214화 (214/230)

“꽤 높은 곳까지 가는군.”

“괜히 아랫것들에게 피해를 줄 일은 없잖나?”

“천마치곤 너무 상냥한데.”

“함부로 본좌를 재단하지 말도록.”

소설에서 항상 보던 천마랑은 조금 달랐다.

혁무린에게선 평범한 20대 여인처럼 언뜻언뜻 상냥함이 비쳤다.

어느새 구름을 넘어 올라온 나와 혁무린.

널따랗고 하얀 구름장판 위에 그녀가 사뿐히 발을 딛었다.

‘신선같구만.’

듣자하니 무당파의 개파조사인 장삼봉은 등선을 해서 신선이 되었다던데.

신선을 따먹는 쾌락은 어떤 느낌일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하얀 구름과는 대비되는 보랏빛 장포가 넘실거렸다.

천마(天魔) 혁무린.

아름답고 고아한 얼굴과 여상한 눈빛이 보였다.

“그대는 확연히 눈에 띄는군. 피부색이 독특해서 그러한가.”

“...그쪽은 오늘도 아름답군.”

“쓸데없는 소리.”

조용히 하라는 듯 그녀가 무심히 던진 기운을 쳐냈다.

아래쪽에 있던 구름이 뻥 뚫리며 그 아래에 점처럼 보이는 지상을 드러냈다.

조금씩 전열을 밀어내는 정도연합군의 무사들.

이대로 납사성까지 밀어내게 되면, 비수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무엇을 보는가?”

“곧 내가 가지게 될 성.”

파직, 하고 나와 그녀 사이의 기세가 맞붙어 스파크가 튀는 듯 했다.

그녀의 장포처럼 검보랏빛을 띠는 기운.

허나 더없이 맑아 거친 느낌은 전혀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마기와 영기를 합쳤군. 그게 천마인가.”

“그대의 기운 또한 색다르지 않은가. 평범한 내공은 아니야.”

“그렇지. 평범하진 않지.”

모든 걸 흡수하는 흑천묵지신공의 내기는 당연히 평범하지 않다.

지금도 자제하고 있을 뿐, 혁무린이 사용하고 있는 마기와 영기가 합쳐진 기운 또한 집어삼킬 수 있었다.

‘벌써부터 놀라면 재미없으니까.’

절대에 이른 후 흑천묵지신공의 흡수력은 한층 더 발전했다.

물론 살을 섞는 게 효과는 제일 좋지만.

쿠오오오...

이내 천천히, 천천히 서로가 한 걸음씩 내딛었다.

그럴수록 희미했던 색은 진해지고, 서로를 향해 쏟아지는 압박감이 더해갔다.

부딪힌 기운이 거센 와류가 되어 폭풍처럼 일어났다.

“하나 제안하지.”

“들을 가치도 없다 여겨질 것 같지만. 죽기 전에 무엇을 못 들어주겠나. 뭐, 말해보게.”

당연히 거절할 것 같지만.

그래도 말하는 데 별다른 수고가 드는 건 아니니까.

진짜 진심을 담아서 그녀에게 물었다.

“내 네 번째 부인이 되는 건 어떤가. 천마신교도 그대로 세를 불리고, 혈교의 영역인 서장도 넘겨주지. 천마 혁무린, 그대는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내 옆에서, 내 여자로.”

혁무린의 여상한 눈빛에 살짝 분노가 담겼다.

폭증한 기운에 내 영역이 반발짝 밀리며 거친 압박감이 가슴을 옥죄었다.

“지금, 본좌를 무시하는 건가.”

“아니, 동등한 상대로 보기에 이런 말을 건네는 거다.”

동등한 위치가 아니었으면 벌써 좆집이었지, 이년아.

나는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우리 천마 양은 화가 많이 난 듯 했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선고했다.

“본좌가 살아있는 한, 천마신교는 그 누구의 밑으로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꼭 서로를 죽일 필요는 없지 않나?”

“그딴 물렁한 생각을 가진 사내를 본좌는 배필로 맞이하고 싶진 않군.”

이런데선 또 천마같네.

아무튼 딱 여기까지가 그녀의 한계선인 듯 했다.

한 마디만 더 쓰잘데기 없는 소리했다간 바로 주먹이 날라올거다.

“그렇군. 그럼 시작하지.”

그 말과 함께 서로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무진도, 혁무린도 날 선 기세가 오히려 깔끔하게 갈무리 되었다.

한 톨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극정(極靜)의 세계.

구름 위, 바람 한 점 없어진 그 하얀 판석 위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두 개의 선이 질주했다.

콰아앙!!

주먹과 주먹이 맞붙었다.

눈처럼 맑은 새하얀 영기(靈氣)가 물씬 피어오르는 혁무린의 주먹과.

칠흑(漆黑)으로 덮여져 더욱 새카매진 무진의 주먹이 공간을 격해 부딪혔다.

흡사 흑과 백이 부딪히는 것 같았다.

쾅! 콰앙!

일초에 수십번씩 권을 나눈 그들의 주위로 일순 진공이 형성되었다.

꾸드득, 꽈아앙!!

폭음과 함께 밀려난 공기가 돌아오며 터져나오는 거친 충격파.

바닥에 깔린 구름이 그 흔적을 한오라기도 남기지 못하고 흩어졌다.

“큽!”

언뜻 백중세인 듯 보였지만.

먼저 밀려난 것은 혁무린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되었던 그녀의 머리가 바람에 거칠게 휘날렸다.

‘힘과 내공은 단연 저쪽이 우위인가.’

천마로써 수많은 영약과 영기를 흡수해온 그녀도 무진의 끝을 보지 못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여인과 몸을 섞어온 그의 육신은, 근육 한 가닥에도 내공이 깃들어 있었다.

자신의 우위를 알아챈 듯 사내의 몸이 잔상처럼 흔들렸다.

그리고 막힘없이 이어지는 연격(聯擊).

주먹 뿐만이 아닌, 발과 팔꿈치, 어깨, 무릎까지 섞인 거친 박투가 시작되었다.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근육과 단단한 뼈가 그녀의 육신을 부수기 위해 쏟아졌다.

훙! 후웅!

귀를 스치는 섬뜩한 파공음에도 혁무린은 낮게 읊조렸다.

“역시, 그대가 정도의 최강이군.”

“당연한 소릴.”

제대로 걷어내지 못한 그의 주먹이 칼날처럼 피부를 베었다.

묵직하게 올려찬 무릎을 막아낸 다리뼈에 금이 갔다.

‘이 무슨 육체란 말인가.’

강골(强骨).

그리 말하기에도 부족한 육체였다.

칠흑으로 덮여진 그의 몸은 공성추와 같이 그녀의 몸을 두드렸다.

쾅! 쾅! 콰아앙!!

‘허나, 겨우 이정도라면...’

적에 대한 인정과 함께 혁무린의 눈빛이 변했다.

새하얀 영기에 보랏빛 한줄기가 섞여들어갔다.

순식간에 검보랏빛으로 뒤덮인 혁무린의 육체.

두 개의 기운이 공명하며 무진에게 맞서듯 강렬히 터져나왔다.

“이정도면 내 마누라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구만!”

“아직도 그딴 소리를 하는가!!”

사내의 헛소리에 혁무린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런 그녀의 입가엔 핏줄기와 함께 희미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저 몰상식한 주둥아리에는 화가 났지만.

몸은 전력을 다해 싸울 수 있는 상대를 만나 희열에 차올랐다.

그녀는 천생 무인이었다.

‘본좌의 전력을 다해 부숴주마, 백무진.’

반격을 준비하는 그녀가 마침내 검보랏빛 기운을 육신에 담았다.

마기와 영기가 뒤섞인 천마기(天魔氣).

본디 유순했던 영기에 거칠고 폭급한 마기가 뒤섞이며 조화를 이뤄냈다.

강점을 더하고 단점을 상쇄해 완전무결한 기운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을 이루지 못하면 천마로 인정받을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천마의 모든 무공은, 이 천마기(天魔氣)가 시작이었다.

‘부순다.’

혁무린이 눈앞의 무도한 사내에게 일권을 내질렀다.

꽈드드득!!

“큭...!!”

전처럼 폭음이 터지는 대신, 무언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혁무린과 주먹을 부딪힌 무진이 다급히 뒤로 몸을 빼냈다.

‘손이...’

중지와 약지가 망치에 맞은 듯 뭉개져 고깃덩이가 되어있었다.

한 발 뒤로 뺀 무진에게 혁무린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어딜 도망가는가!”

“큽!”

허공을 거칠게 내딛은 진각과 이어지는 발차기.

정확히 명치를 노리고 쏘아지는 발을 손등으로 걷어내자, 이번에도 손등이 뭉개졌다.

무진의 입에서 이를 악문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게 천마의 법칙인가.’

마교의 장로들에게 들었던 천마의 무공.

공간을 마음대로 다룬다는 희대의 신공.

칠흑이 덮인 무진의 육체는 단순한 힘싸움으로는 상처조차 입히기 힘들었다.

그것을 뚫기 위해선 보다 상위의 힘, 절대지경의 법칙이 필요했다.

“고민이 길군. 네 모든 것을 꺼내보아라.”

아직도 상대를 재고있는 무진에게 천마가 손을 그었다.

발차기를 맞고 멀리 떨어진 그에게는 닿지도 않을 일격.

허나 무진은 섬뜩함을 느끼고 재빨리 제운종을 펼쳐 자리를 피했다.

“감이 좋군. 막아냈다면 그대로 죽었을 텐데 말이야. 아쉽게 됐어.”

새파란 하늘에 빗금이 그어졌다.

빗금 주변으로 거미줄처럼 균열이 갈라지고, 이내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거친 파열음과 함께 하늘에 선이 그어졌다.

말 그대로, 하늘이 갈라졌다.

무진은 식은땀이 난 손을 꾹 말아쥐며 탄성을 터트렸다.

“엄청나구만.”

“후우, 언제까지 힘을 숨길 거지? 고작 그정도라면 본좌의 배필은커녕 노예가 되기에도 부족하다.”

혁무린이 다시금 천마기를 끌어올리며 그의 반격을 대비했다.

‘아직 여력은 충분하다. 놈이 무얼하든 공간째로 찢어버리면 그만.’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진은 끝이 조금 잘려나간 머리칼을 매만지며 눈동자를 굴렸다.

슬쩍 아래쪽을 쳐다본 그가 혁무린에게로 다시 시선을 보냈다.

충분히 멀어졌고.

비수는 날카롭게 준비되었다.

“이렇게 높이 올라온 거, 나한테도 나쁠 게 없었네.”

그의 웃음기 어린 말투에 혁무린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무얼 한 게냐.”

“우리 싸움은 싸움이고, 전쟁도 이겨야하지 않겠어?”

“...이 치졸한!”

감히 대결 중에 한눈을 팔다니.

혁무린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히며 다급히 아래쪽으로 마령사(魔靈絲)를 쏘아보냈다.

허나 높이 올라온 만큼, 그 거리는 독이 되었다.

“혈교주때 한 번 겪어봐서 말이지. 이길 땐 확실하게 짓밟아야 된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 전 마누라 어쩌고 하던 장난스런 사내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불길한 어둠이 혁무린의 발아래를 갈랐다.

영기를 쓸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다.

무진은 천마에게서 뿜어지는 영기의 실타래를 잘라낸 것이다.

혁무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끊어졌다.’

수십수백 리를 격해 정도연합군의 세력을 읽어냈던 영기다.

마령사 또한 이정도 높이는 충분히 날아가 장로들을 통제할 수 있었을 터.

허나 사내가 휘저은 손에 마령사가 하릴없이 끊겨나갔다.

실이라곤 하지만 이것에 힘을 주면 능히 한철도 잘라낼 강도거늘.

혁무린의 심장이 긴장과 흥분으로 거세게 뛰었다.

“그 어둠이 그대의 절대군. 들어본 적 있다.”

“맞아본 적은 없지?”

“...”

“너도 막지 말고 피해라.”

사내의 담담한 조언.

어둠이 그의 주변에서 뿜어져나왔다.

흑천묵지신공(黑天墨地神功)

우주홍황(宇宙洪荒)

칠흑경(漆黑境)

혁무린의 주변으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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