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227화 (227/230)

“드디어 끝이 보이는 구만.”

“그러게 말이다. 아이고...”

무림맹 본단의 경계를 맡은 두 무사가 앓는 소리를 냈다.

며칠 전부터 본단의 정문을 닫을 새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천하에 이름 높은 구파일방은 물론이거니와, 오대세가의 가주들까지도 전부 이곳으로 왕림했다.

거기에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방파나, 장원, 어디 의원까지 전부 무림맹의 문을 두드렸다.

사람을 가리지말라 일렀기에, 지금의 무림맹은 사람들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내 평생 저런 고수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 보네.”

“흠흠, 그만큼 우리 백무진 대협의 위명이 중원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는 거지.”

“내 남편도 아닌데 뭘 그리 자랑스럽게 말하나.”

그리 말하는 무사의 말에선 부러움이 뚝뚝 떨어졌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정문 입구나 지키고 있다니.

“그건 그렇고, 흑천맹으로 가는 파견인원을 뽑는다던데, 지원은 해봤나?”

“쩝, 어차피 떨어지겠지. 쟁쟁한 고수들이나 가지 않겠어.”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무사들이 먼저 자리를 채우고.

그 다음에야 머릿수를 맞추려 일반 무사를 뽑을 거다.

조금 한산해진 틈을 타 무사가 동료에게 다가갔다.

“그러지말고 지원해보게. 호남땅에 엄청나게 큰 본단을 짓는다고 하더라고. 무사가 얼마나 많이 필요하겠어?”

“거기로 다들 빠지면 나도 위로 올라갈 자리가 나겠지.”

“뭐, 그렇긴 하지.”

잘하면 조장급 정도는 자리가 날 지도 모른다.

경비 무사보다는, 그래도 경비 조장이 낫지 않겠는가.

“실없는 꿈 꾸지말고, 자네도 단련이나 더 하게. 위에 자리나면 노려봐야지.”

“쩝, 그 말도 맞네 그려.”

실없는 이야기 사이로 따각따각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정오가 다되어가는 시점, 손님 목록을 들추던 무사가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흠, 오실 분들은 다 왔는데?”

“그려? 그럼 검문해야지. 오늘 같은 날 무뢰배들을 받았다간 사달이 날 터이니.”

어차피 저곳에 무뢰배가 들어가봤자 아무것도 못하겠지만.

그냥 들여보낸 것과 검문을 하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무사가 검병을 쥐고 가까이 다가오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높이 솟은 황색 깃발이 눈에 띄었다.

“음, 웬 깃발이...?”

“잠깐만, 주(周)...?”

주(周)라면 이 나라의 이름이 아니던가.

그러고보니 대로변의 사람들이 전부 다가오는 마차를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백성의 절을 받으며, 주(周)라는 깃발을 쓸 수 있는 자.

“화, 황제 폐하?”

“예끼, 이 사람아. 서, 설마 황제 폐하께서 오셨겠나.”

그나마 짬을 좀 더 먹은 무사 하나가 당황을 수습했다.

이대로 절을 해야하나 싶던 찰나, 안쪽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들은 가서 정자세로 서있게, 어서!!”

“아, 조, 조장님!”

“얼른!! 공주님의 행차시다!!”

“추, 충!!”

공주님?

그러고보니 흑천맹의 창립에 황제 폐하가 사절을 보낸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헌데 무려 공주님을 보내다니.

두 무사는 황급히 정문으로 달려가 최대한 근엄한 자세로 섰다.

조장은 단숨에 마차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다가온 군관 하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곧 황금빛으로 칠해진 마차가 순식간에 문을 통과했다.

“어후, 고, 공주님이라니...”

“내 알기론 공주님이 세 분 계시다던데.”

“마, 맞네. 그리고 아마...”

“혼례를 올리지 않으신 분이 한 분 계셨지...?”

두 무사의 머릿속에 설마하는 상상이 짓쳐들었다.

*

정오.

하늘의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이르는 때.

무림맹의 본단에는 평소와는 다른 깃발이 걸려있었다.

흑천맹(黑天盟).

무림 역사상 유일무이한 천하제일인이 세울 곳.

중원 무림에서 이름 깨나 날린다 하는 세가나 문파는 전부 와있었고.

홀로 이름을 드높인 자들도 전부 흑천맹의 창립식을 보러 와있었다.

악단의 노래가 끝나고, 흰색 도포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나섰다.

“반갑소이다. 본인은 무림맹주이자, 흑천맹 섬서 지부장을 겸하게된 소서화라고 하오.”

무인들의 연호가 이어졌다.

파천검선 소서화는 모두가 알고있는 정파의 기둥.

흑천맹이 천마신교, 서장, 사파와 정파 모두 아우르는 조직이라고는 하나.

결국 그 수장은 구파일방의 일원인 무당파의 사람이었다.

대다수의 무사들은 흑천맹이 결국 정도의 길을 걸으리라 믿었다.

“그럼, 지금부터 흑천맹의 창립식을 시작하겠소.”

소서화의 눈에 수많은 이들이 보였다.

모두가 무림에서 한가락씩은 하는 자들.

그리고 정오가 되어서야 도착한, 황실의 귀빈.

이렇게나 큰 조직을 창립하는데 봉룡지회 때의 소율처럼 얼렁뚱땅 할 수는 없었다.

“우선, 황실의 축하에 감사드립니다, 자옥공주님.”

탁 트인 대광장에서 커다란 양산과 발까지 드리운 곳에 있던 여인.

모두가 궁금해하던 여인의 정체가 밝혀졌다.

발에 가려진 뒤쪽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본 공주는 그저 황제폐하의 명으로 흑천맹주를 보러왔을 뿐이니, 그리 예를 차릴 것 없습니다. 계속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은 황제가 직접 흑천맹주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관무불가침이라 하지만, 엄연히 무인들도 황제의 백성이다.

그 권위는 신생 조직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그럼, 계속해서 참가하신 귀빈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리오.”

오랫동안 맹주의 자리를 맡은 만큼 소서화는 매끄럽게 진행을 이어나갔고.

교장선생님의 훈수말씀을 듣는 것처럼 멍을 때리던 나는 드디어 앞으로 나섰다.

“오오오... 흑천맹주!!”

“저것이 현 무림의 천하제일.”

“과연 그 피부가 밤하늘처럼 새까맣구려.”

꼬깃꼬깃해진 연설문을 접어서 품에 넣었다.

영단어 외우던 중학생 시절과는 확연히 달라진 오성은 몇천자에 달하는 글자를 전부 외웠다.

‘그것보다, 공주라.’

처음 황제의 칙서를 받았을 땐 조금 당황했다.

이쪽은 진짜 원작에서도 단 한 번의 언급도 없었으니까.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황제의 인정도 받고, 잘하면 공주도...

나는 입술을 핥으며 앞으로 나섰다.

발에 가려졌지만, 윗가슴을 전부 내어놓은 야시런 옷차림의 공주는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의 새빨간 혓바닥이 입술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공주를 바라본 순간, 동류라는 것을 느꼈다.

“반갑소. 본인은 초대 흑천맹주를 맡게될 백무진이라 하오.”

창립식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원래 세계의 회사에서 실적발표 한답시고 벌벌 떨 때와는 전혀 달랐다.

지금은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모두가 떨었으니까.

“본 맹은, 저번 연합군 때의 약속처럼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을 것이오. 작은 다툼, 서로간의 은원, 이런 것엔 관여하지 않으리다. 흑천맹이 추구하는 것은 오롯이 무림의 안녕과 발전, 평화요.”

다른 말로는, 그걸 위협하면 내가 직접 나서겠다는 의미다.

은은하게 퍼진 내 기세가 무림맹의 광장을 뒤덮었다.

그렇게 창립사를 마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더불어, 오찬 후에는 본인의 혼례가 거행될 예정이니, 시간이 남는다면 아리따운 신부들을 보고 가주시오.”

백무진이 자리를 비운 광장.

무인들은 각자의 이야기로 바빴다.

그 시끄러운 가운데에 육감적인 체형의 여인이 일어나 안으로 향했다.

순간적으로 광장에 침묵이 잦아들었다.

“흐음, 맘에 들어.”

“허나 천한 노비였다고 하옵니다, 공주전하.”

“본 공주에 비하면 노비나 귀족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그렇사옵니다만, 그래도...”

“신경쓰지마. 폐하께서도 저 사내에 관심이 많으시니.”

공주가 붉은 입술을 혀로 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

“으음...”

딱딱하게 솟은 자지가 진정이 되질 않았다.

혼례식 전에 신부를 미리보면 안된다길래 방에는 나 혼자였다.

신랑용 화장을 하겠다고 들어온 남자놈 하나는 내 시커먼 얼굴을 보더니 그대로 방을 나섰다.

“레이시스트 새끼.”

벽게 걸린 붉은 장포를 보며 내 여자들을 떠올렸다.

중국의 신부복은 붉은 궁장이었다.

내 취향대로 커스텀하고 싶었는데, 혼례만은 좀 제대로 올리자고 소율이 극구 반대해서 결국 포기했다.

‘뭐, 나중에 옷 그대로 가져다가 다시 쓰면되지.’

하지만 그러면 느낌이 달랐다.

결혼식 날, 날 위해 준비된 옷을 입은 네 명의 신부.

아침부터 목욕재계하고, 곱게 화장하고, 향유를 바르며 아름다움을 물씬 품고 있을 거다.

내 것이 되기 위해서.

‘못참지.’

결국 밖으로 나섰다.

은신잠행이니 뭐니, 그런 무공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내가 기척을 죽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어딨을까, 우리 마누라들.’

숨박꼭질하듯 그녀들을 찾아헤맸다.

무림맹 본단은 물론이고, 섬서까지 퍼져나갈 수 있는 내 기감을 속일 수는 없었다.

허나 넷 중 한 명이라도 느껴지는 기운이 없었다.

‘...진법이라도 썼나?’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날 알아온 소율.

내 정욕을, 성욕을 알고있는 그녀가 손을 쓴 걸까.

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오감을 확장시켰다.

진법이고 뭐고, 내가 알고자하면 알지 못할 것은 없었다.

“거기 있었구나.”

무림맹 본단의 지하.

서화 누님이 항상 집무실로 쓰던 곳.

단숨에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향긋한 분내가 코를 적셨다.

어디론가 급하게 나갈 채비를 하고있는 아리따운 신부들이 보였다.

“아... 오, 오라버니.”

“무진, 금방 찾아왔네요.”

“저, 저, 저놈 저거 가랑이 세운 것 보아라. 본녀의 말이 맞지 않느냐.”

“그래서 이제 어쩔 건가, 천극혜검.”

역시, 소율이 주동자였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살짝 감았다 뜨인 눈동자는, 야릇하게 휘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쩌긴 뭘 어쩌느냐.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지.”

“역시, 우리 소율.”

손가락을 튕겨 방안을 기막으로 덮었다.

내 여자들의 신음 소리는 나만 듣고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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