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28. 게이트병(1).
쏴아아아!
후두두둑!
비가 창문을 두드린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폭우가 태양에 달궈진 도시를 식힌다.
한쪽엔 남산이 보이고, 다른 쪽엔 서울역과 도심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의 수많은 차와 오가는 사람들.
비가 오는데도, 그 난리를 겪었는데도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또 살아간다.
‘잊어버리는 것이 좋겠지?’
스스로 물었다.
배를 곯고 피난민 시설을 전전긍긍했을 때도, 용산 헌터 시장에서 힘들게 물건을 나를 때도, 던전 청소부가 되어 악취 속에 괴수 사체를 처리했을 때도, 언제나 TV에 나오는 연희와 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언젠간 저들 옆에 서고 싶었다.
그들은 나의 영웅이었고, 나의 희망이었다.
두 번째 게이트에서 수진이 또래의 젊은 여자를 죽였다.
암살자라곤 하지만, 사람을 해친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 그 느낌은 찝찝하고, 불쾌하며,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이 게이트 안에서의 비정한 현실이었다.
‘너희도 마찬가지였겠지.’
죽지 않으려면, 죽일 수밖에 없었을 거다.
어린 너희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겠지.
그들은 말 그대로 사냥개였다.
스스로 큰 것이 아니라 먹이를 얻어먹으며, 주인을 위해 싸우게끔 훈련받은 사냥개.
최규환의 말에 따르면, 도중에 실패한 것은 도하준, 그놈밖에 없었다. 그럼 연희 역시 헌터들을 죽이며 등급을 올렸을 것이고,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거다.
- 이연희 헌터, A급 게이트를 클리어하다!! -
서울역 앞 전광판에 그녀의 얼굴과 이름이 올라왔다.
많은 헌터가 이번에도 A급 게이트로 들어갔지만, 게이트를 클리어한 것은 연희였다.
사람들은 말한다.
최초의 A급 헌터, 최초의 S급 헌터를 넘어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SS급 헌터는 이연희가 될 거라고.
그리고 연희는 누구보다 괴수 퇴치에 열성적이다.
괴수가 출몰하는 곳엔 늘 앞서 달려갔고, 쉴새 없이 게이트를 소멸시켰다.
그렇게 끊임없이 괴수와 게이트를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연희는 게이트 발생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고아들과 이재민들을 위해 연간 수천억원의 돈을 기부한다. 사람들이 그녀를 여신이라 부르고 좋아하는 데는 이런 커다란 선행도 한몫하고 있었다.
하지만 창수는...
그 미련한 놈을 지금의 처참한 모습으로 만든 일에 연희도 관련이 있을까?
답답하고 궁금했다.
고개를 흔들었다.
더는 생각하기 싫었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제길, 잠은 다 잤네.’
컴퓨터를 켰다.
벌써 메일을 보내다니, 그래도 정보력은 어느 정도 갖췄나 보다.
한성 실업의 내부자료들.
낮에 최규환에게 부탁했던 것이었다.
친절하게 전문가가 분석한 내용이 주석으로 달려있어 크게 머리 쓸 일은 없었다.
다른 것은 당장 제쳐놓더라도 도하준, 그놈은 절대 이대로 물러설 놈이 아니었다.
그놈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에 미리 대비해야 했다.
놈의 최대 무기가 돈이었으니, 돈줄을 공략하는 것이 승리의 포인트가 되겠지.
‘잠도 안 오는데 이거나 읽어 보자.’
밤새 뒤척였다.
두 시간이나 잤나?
다음 날 일찍 남산을 올랐다.
흉포한 마그투스의 각반을 이용해 하체와 체력을 단련했다.
10톤의 힘!
잘못하면 펜트하우스 바닥이 내려앉을 수도 있었기에 가까운 남산을 오르며 적절한 힘 조절과 다리 근력 강화에 힘썼다.
몇 번이나 산을 오르고 내려오며 어제 최규환에게 들었던 것들을 마음 속에 정리했다.
내 일상이 변한 건 없다.
목표가 흔들릴 것도 없다.
나는 올라갈 거다.
그리고 연희처럼 S급 헌터가 될 것이고, 어쩌면 인류 최초로 SS급 헌터가 되어 이 땅에서 게이트를 영원히 소멸시킬 것이다.
그래야 연희와 창수, 그리고 친구들이 겪었던 일을 누구도 다시 겪지 않을 테니까.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커다란 욕조 안에 누워 회복의 룬을 이용해 다리근육을 풀었다.
확실히 각반을 켜고 조금만 무리하게 단련하면, 다리가 아파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회복의 룬이 아니었다면, 단련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
용산 헌터 시장을 찾았다.
창수 가게는 여전히 문이 잠겨 있는 상태.
막상 놈의 사정을 알게 되자, 더 보고 싶었다.
‘어디서 뒈진 건 아니겠지...’
발걸음을 돌려 황노인의 약재상으로 향했다.
“오! 어서 오게. 우리 나태준 헌터!”
“왜 그러십니까 징그럽게? 그리고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제 TV에서 봤지. 이상한 사진이 나왔지만, 단번에 자네인 줄 알아봤지.”
역시 장사꾼의 눈썰미란.
“어서 인벤토리 좀 풀어보게. 자네가 오길 눈 빠지게 기다렸네.”
장난감을 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황노인의 표정엔 기대감이 가득했다.
“이번엔 게이트 두 개를 돌았기에 종류가 좀 많습니다.”
“오! 뭐든 다 내놓게. 내가 다 사지.”
인벤토리에서 C급 괴수 오도나타의 날개를 꺼냈다.
사실 C급 괴수는 감식할 수 없었기에 가장 돈이 될 만한 날개를 챙겼다.
그리고 D급 괴수 쏠라돈의 고기와 내장을 꺼냈다.
모래 속에 살았던 도마뱀형 D급 괴수 카나헤의 눈과 뇌, 허파, 발톱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남은 티볼(F)의 쓸개를 모두 꺼냈다.
황노인은 정신없이 다니며, 일일이 물건을 살피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세상에! 이 많은 걸 대체 어떻게 구해 오는지...”
황노인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자넨 정말 물건이군. 물건이야.”
“저 말고, 물건 상태는 어떻습니까?”
“역시 최고야. 모두 합쳐서 90억에 매입하지.”
“좋습니다.”
“헌터증이 있으니 이젠 계좌로 입금하면 되겠군?”
“아니요. 현금으로 주십시오.”
“뭐? 90억을? 인벤토리에 공간도 부족할 텐데. 이젠 계좌를 하나 트지그래?”
“괜찮습니다.”
황노인의 말처럼 인벤토리에 공간이 부족했다.
승급하기 전이라면 말이다.
내 헌터 등급이 오르면서 70개였던 슬롯이 170개로 늘었다.
이젠 내 인벤토리는 340kg을 보관할 수 있는 커다란 창고와 같았다.
현금을 인벤토리에 넣자, 거래가 완료됐다.
“왜 벌써 가려고?”
“마석도 팔아야죠.”
“허! 이러다 자네 곧 귀족 되겠어.”
“네?”
황노인의 말 한마디에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분명 귀족이란 소릴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귀족이라니요?”
“왜 귀족 모르나? 용산 헌터 시장을 찾는 큰손 말이야.”
황노인에게 들으니, 가격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특이하고, 좋은 물건만을 찾는 고레벨 헌터들을 상인들은 귀족이라 불렀다.
“그렇군요. 다음에 또 오죠.”
“아, 잠깐. 다음 주중에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나?”
“왜요?”
“전에 말했던 내 친구놈 기억나나? 화장품 회사를 하나 한다는.”
“아, 기억납니다.”
왜 잊겠는가.
티볼의 쓸개를 개당 2천만원에 전량 가져간 사람이다.
“그놈이 자네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는군.”
“뭐, 좋습니다. 연락드리죠.”
황노인은 주변에 구두쇠라고 소문이 나 있었지만, 좋은 물건은 귀신같이 알아보고 돈을 아끼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내게 산 물건은 큰 이익을 남기며 되팔 것이다.
“헉헉! 여기 있었네.”
황노인의 가게를 돌아서자마자, 한 여자 경찰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윤상희였다.
“나를 찾아다녔어요? 그냥 전화하지.”
“미...미안한데 급해서 그러는데, 돈 좀 빌릴 수 있을까?”
“네?”
겨우 게이트 한번을 함께 클리어한 사이였다.
돈을 믿고 빌려줄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아니, 다음 게이트 공략 때는 꼭 함께 참여할 테니까, 가불한다고 생각해줘.”
손을 벌리는 그녀는 나와 눈도 못 마주쳤다.
평소 당당하던 그녀였기에 뭔가 이상했다.
“선금이야 줄 순 있습니다만, 어디에 쓰이는지는 알아야겠습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아들이 게이트병이야.”
게이트병.
누군 게이트가 발생해 헌터가 되고, 어떤 사람들은 게이트 때문에 병을 얻는다.
의사들이나 과학자들도 게이트병이 왜 생기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저 게이트가 발생하는 시기에 많은 사람이 이유 없이 쓰러지고, 식물인간이 됐다.
초기엔 많은 사람이 이 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석 생명유지장치로 그나마 생명을 연장할 순 있었다. 문제는 그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전에 게이트에 함께 참여하지 못한 것도 아들이 갑자기 위독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좋습니다. 선금을 주죠. 얼마를 원하세요?”
“원래 계약한 금액만.”
인벤토리에서 7천만원을 꺼냈다.
“이미 다음 게이트 공략 일정이 잡혔습니다. 그땐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와야 합니다.”
“물론이지. 고마워.”
“참, 다음엔 정식 게이트니까. 헌터증을 만들어야 합니다.”
“뭐? 헌터증을?”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만들어 놓지.”
대답한 그녀는 다급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쯧쯧, 불쌍하게 게이트병이라니...”
황노인이 옆에서 혀를 찼다.
“아직도 치료 약이 나오지 않았나 보죠?”
“아니 있어.”
“네? 있어요?”
“그런데 워낙 귀해서 물건 구하기가 쉽지 않아. 가격도 매우 비싸고.”
“혹시 여기 있나요?”
“마침 나한테 한 개가 있는데, 상태가 별로라 이걸론 최소 3, 4개는 있어야 한 명을 치료할 수 있네.”
황노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왜?”
“한번 보여주죠.”
“쩝, 보여주긴 할 텐데. 바로 인벤토리에 넣어야 해 공기 중에 노출되면 10분도 못 버티고 부식되거든.”
“어서 줘봐요.”
“다시 말하는데 가격도 가격이지만, 물건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서 정말 조심해야 해.”
“아, 네.”
물건을 건네받았다.
[레벨이 부족하여 감식할 수 없습니다.]
한눈에 봐도 괴수의 부산물 같아 보였지만, 감식하지 못했다.
자신의 감식(lv2) 스킬로는 D등급까진 감식할 수 있었으니, 이 괴수는 최소 C등급 이상이란 소리였다.
그리고 물건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원래 모양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알아낼 방법이 없을까?’
그 순간.
황노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헉! 자네 지금 뭐하는 건가?”
배낭에서 말볼을 꺼내 냄새를 맡게 했다.
“말볼, 이 냄새를 잘 기억해!”
“께끙끙.”
사냥개처럼 킁킁거리며, 이놈의 냄새를 확인했다.
“게이트에 들어가면 무조건 이 냄새부터 찾아. 알았어?”
“껭께껭!”
대답도 잘한다.
착한 놈.
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에 게이트에 들어가면, 말볼이 이 냄새를 추격할 것이다.
물건을 다시 황노인에게 건넸다.
“침은 안 묻었겠지?”
“그냥 냄새만 맡은 겁니다.”
황노인이 인벤토리에 물건을 넣었다.
“저놈이 자네 사냥개인가?”
“뭐, 그런 셈이죠. 그런데 비싼 괴수 부산물이나, 게이트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약재 같은 거 있습니까?”
“그건 왜?”
“가장 비싼 것만 일단 모두 꺼내 보세요.”
황노인은 자신의 인벤토리에 있는 귀한 약재와 부산물을 몇 개를 꺼냈고, 말볼에게 하나씩 냄새를 맡게 했다.
“냄새 잘 기억해라. 떼돈 좀 벌자.”
지금도 잘 벌고 있었지만, 더 잘 벌고 싶었다.
그래야 그들을 따라갈 것이 아닌가.
***
[D등급 게이트]
약속대로 최규환에게 국가 헌터원이 확보한 게이트를 공짜로 소개받았다.
그놈이 이 게이트 하나를 넘기며 얼마나 뻐기는지, 욱하는 마음에 헌터 협회를 찾아 갈뻔했다.
“저번처럼 암살자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오면, 다시는 국가 헌터원하고 일하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게이트 입구를 지키는 심선경 헌터 사무관의 표정은 결연했다.
왠지 그라면 정말 목숨을 걸고 지킬 것 같았다.
“윤상희씨 준비됐어요?”
“오케이. 대장!”
도끼를 든 윤상희의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전엔 풀이 죽었던 사람이 아들이 고비를 넘기자, 전처럼 생기가 돌아왔다.
역시 어머니는 강했다.
그리고 이번 게이트에서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보너스를 주겠다고 하자, 강철도 부숴버릴 정도로 투지가 불타올랐다.
“수진아, 탐색 스킬 켰냐?”
“네.”
“말볼?”
“께게겡!”
“자, 가자!”
그렇게 어둠의 구덩이로 뛰어들어갔다.
[고대의 사원(D등급)]
[클리어 조건 : 우두머리 아키노스(C)를 잡으시오.]
[현재 카운터 : 우두머리 아키노스(C) - 0/1]
[보상 : ?]
[우두머리 아키노스(C) - 이마에 커다란 뿔이 달려 있다. 무리 생활을 한다. 어깨높이 2미터, 몸길이 5미터의 거대 늑대.]
간단한 클리어 조건.
C급 괴수 한 마리만 잡으면 클리어되는 게이트였다.
“껭끙끙!”
말볼이 코를 킁킁대며 달린다.
뭐야 벌써 냄새를 맡은 거야?
돈 버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 말볼을 따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