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48. 빙염의 마법사(1).
초저녁.
아직 술에 취하긴 이른 시간이지만, 그녀는 남들을 의식하지 않았다.
“씨발 것들, 내가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줬는데!”
쾅!
테이블이 크게 흔들릴 정도로 손바닥을 내려친 여자를 향해 시선이 모였다.
“내가 부담된다고? 병신들! 자기들 약한 건 생각 안 하고...”
말투는 또박또박했지만, 얼굴엔 이미 취기가 가득했고, 머리가 무거운지, 자꾸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술주정을 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몇 번이나 다가와 조용히 시켰지만, 안하무인이었다.
“고종수 개새끼, 죽일 놈. 날 버리고 다른 년한테 가. 흠냥.”
횡설수설하던 여자가 책상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단발머리 사이로 보이는 뽀얀 얼굴, 짙은 속눈썹, 갸름한 턱.
여자가 게슴츠레 눈을 뜨자, 주변에 있던 사내들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심지어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사내들까지 여자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게다가 높은 콧날에 도톰한 입술까지 성형외과 입구에 사진이 걸려있을 법한 미녀였다.
옆 테이블에 있던 20대 초반의 두 사내가 아까부터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로 은밀한 눈짓을 주고받더니, 테이블을 옮겨 여자의 양옆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누나.”
“어? 너희는 누구냐?”
“누나, 혼자 마시면 술이 맛이 없지. 제가 한잔 따라드릴게요.”
또로로로록!
자신들의 테이블에서 가져온 독한 양주를 맥주잔에 가득 따라 건넸다.
“자, 건배!”
“건배!”
남자들은 잔에 입만 대고, 여자는 양주를 한 번에 털어버렸다.
그 모습을 본 종업원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연거푸 몇 잔이 들어가자, 오른쪽에 앉은 청년이 말했다.
“누나, 우리 자리 옮겨서 한잔 더해요.”
“저희가 쏠게요.”
이미 여자는 책상에 머리를 박은 상태.
두 청년이 서로 눈짓을 하며 여자를 일으키기 위해 양옆에서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윽!”
“앗!”
끔찍한 차가움에 손을 바로 뺐다.
“소, 손이 얼었어!”
“이런 씨발 년, 헌터였어!”
그 모습을 보고 종업원이 말했다.
“손모가지 안 자르려면 어서 병원에 가는 게 좋을걸.”
“으...으아악!”
한기가 몰려오자, 두 청년이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대체 몇 명째야.”
종업원들도 난감했다.
내보내고 싶어도 몸에 손만 대도 극심한 한기가 몰려오니, 어떻게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 주위엔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청년들이 욕정에 눈이 멀지만 않았어도 눈치챘을 것이다.
“헉! 술값?”
종업원이 밖으로 쫓아나갔다.
하지만 놓치고 잠시 후에 들어왔다.
“아이씨, 놓쳤어.”
“괜찮아. 한 놈이 핸드폰 놓고 갔어.”
“뭐야, 그럼 괜히 뛰었잖아.”
방금 밖에서 들어온 종업원이 창문 밖을 쳐다봤다.
“그런데 오늘 밖에 무슨 일 있나 봐.”
“왜?”
“사람들이 미친 듯이 뛰어다녀.”
“뭐? 괴수라도 나왔나.”
“크큭! 게이트 사라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또 나왔겠어.”
“하긴.”
그 순간.
챙강!
유리창이 깨지며 검은 물체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탈로리안, 거대한 입과 네 개의 다리를 가진 E급 괴수.
콰직!
놈이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남자의 머리를 통째로 물었다.
너무 순식간이라 모두 몸이 얼었고, 아무도 손쓸 틈이 없었다.
“으으...으악!”
“괴수다!”
앞에 앉아 있던 여자친구는 남자친구가 눈앞에서 잡아먹히는 모습에 기절하고, 사람들은 앞다퉈 계단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 달아나!”
“비켜!”
순식간에 가계는 아수라장이 됐다.
사람들은 밀치고, 서로 내려가겠다고 난리를 부리다가 계단에서 우르르 굴러떨어졌다.
그래도 종업원 하나가 용기를 내 쓰러진 여자를 끌고, 카운터로 이동하고 있었다.
“꾸에에엑!”
놈이 사내를 통째로 삼키곤 고개를 돌렸다.
주변에 인간은 셋.
가장 가깝고 손쉬운 먹이가 테이블 위에 쓰러져 자고 있었다.
놈은 망설이지 않고, 여자를 향해 큰 입을 벌리며 달렸다.
헌터라지만 자는 상태.
여자는 죽을 것이다.
종업원이 소리쳤다.
“아! 위험해!”
탈로리안이 여자의 상체를 물려는 순간.
여자가 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손에서 백색 안개가 쏘아졌다.
으지지지직!
“헉! 어떻게?”
눈을 감았다가 뜬 종업원은 괴물이 동상처럼 얼어있는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새낀 뭐야? 괴수네? 왜 술 먹는데 방해하는 거야.”
여자가 일어나 주먹을 들었다.
휘이이잉!
주먹 주위로 백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주먹과 팔목이 하얗게 변했다.
얼음 주먹?
콰앙!
여자가 휘두른 주먹에 E급 괴수 탈로리안의 머리통이 박살 났다.
“이봐! 여기 물!”
“네?”
“물 가져와.”
“예.”
거리에서 비명이 들리고, 건물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여자의 말대로 물 한잔을 가져다주었다.
왠지 이 여자 옆이 제일 안전한 느낌이다.
여자는 물을 한 번에 원샷했다.
“더!”
“네?”
“더 줘.”
여자의 말대로 물병을 가져가 여자의 잔에 따라주었다.
그런데 여자가 물병을 낚아채더니 통째로 마시기 시작했다.
“캬!”
1리터가 넘는 물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통에 물까지 계속 마셨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마셨기에 배가 볼록 튀어나와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알콜 제거!”
파파팡!
손을 든 여자의 몸에서 희뿌연 수증기 같은 것이 뿜어나왔다.
“아, 이제 술이 좀 깨네.”
으득! 으드득!
여자가 고개를 흔들고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문으로 이동해 하늘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 거대한 B급 게이트가 블랙홀처럼 이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제길, 오늘 술은 다 마셨네.”
여자가 창문으로 뛰어내리려 했다.
그러다 멈칫했다.
고개를 돌려 종업원과 기절한 여자를 보며 말했다.
“이봐! 밖으로 나다니지 말고, 좁은 공간에 찌그러져 있어.”
“아...네.”
“그리고 내 이름은 최한별이다. 그 여자 잘 보호해, 만약 딴짓거리 하면 내 이름을 걸고 죽여주마.”
“네? 네...”
종업원은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에게서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최한별이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괴수들이 게이트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등급이 약한 놈들은 그 자리에 즉사했고, 강한 놈들이나 탄력이 좋은 놈들만 살아서 사람들을 공격했다.
거리는 이미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고, 인간의 시체와 형체를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군데군데 보였다.
“아, 괴수 새끼들 아수라장이 따로 없네.”
괴수 공습 싸이렌이 계속 울리고, 대피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그때 최한별을 향해 검과 총을 든 헌터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괴수다! 어서 달아나!”
“아! 놈들이 너무 강해!”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야.”
최한별은 달아나며 자기들끼리 말하는 헌터들을 보고 비웃음을 날렸다.
그들은 인근 헌터 지구대에 있는 자들로 등급이 낮은 헌터들이었다.
“병신들, 헌터가 괴수를 보고 달아나면 어쩌겠다는 거야.”
그녀는 오히려 헌터들이 달려왔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사거리에서 남자의 비명이 들렸다.
최한별이 모퉁이를 돌자, D등급 대형 괴수 카라일이 한 인간을 통째로 입에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감히! 인간을...”
촤촤촥!
그녀의 손끝에서 기다랗고 끝이 뾰쪽한 얼음의 창이 만들어졌다. 최한별은 곧장 카라일을 향해 달렸다.
“죽여주마!”
놈도 지지 않고, 커다란 입을 벌렸다.
그녀가 창으로 놈의 배를 찌르려 했다.
그때였다.
퍼억!
커다란 카라일이 갑자기 옆으로 쓰러졌다.
놈이 쓰러지면서 벽에 머리를 박았고, 건물 한쪽이 우르르 무너졌다.
“뭐지?”
카라일에 머리엔 작은 화살이 박혀있었다.
하지만 그 파장은 컸기에 두개골이 함몰되고 뇌가 터져나갔다.
최한별이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삼거리에서 한 여자가 사람들을 보호하며, 달려드는 괴수들을 향해 계속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달아나지 않는 헌터도 있었네.”
최한별이 손을 올리자, 얼음 창이 그녀의 손으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삼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긴 키에 날렵하고 날씬한 몸매, 하지만 얼굴은 아직 앳돼 보였다.
‘예쁜데! 게다가 실력도 제법이고.’
최한별이 놀란 것은 그녀의 활 솜씨였다.
괴수를 보지도 않고 화살을 날렸다.
그런데 그 화살이 빗나가지 않고 괴수를 정확히 맞췄으니, 그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저기요. 거긴 위험해요. 이리 와요.”
‘응? 내게 하는 말인가?’
화살을 쏘는 헌터 뒤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갔다.
“우리 여기서 죽을 거야.”
“나 오늘 생일인데... 흑흑흑!”
사람들이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자 모자를 쓴 한 예쁘장한 여자애가 몸을 돌려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언니가 지켜줄 거에요. 그리고 곧 헌터들이 올 거예요.”
‘미안하지만, 그 헌터들 달아났다.’
최한별은 모자를 쓴 여자애와 화살을 쏘는 여자애를 번갈아 쳐다봤다.
‘쌍둥이네.’
그때였다.
콰앙!
한별이 지나온 길에 커다란 놈이 떨어졌다.
“크아아아아!”
놈은 엄청난 굉음을 지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괴수가 고개를 돌려 먹잇감이 한곳에 뭉쳐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마카이로(B등급) - 오래전에 멸종한 검치호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지만 그 크기는 5배 이상 컸고 더 사나웠다. 1미터나 되는 송곳니와 날카로운 발톱이 무시무시하다. 바위 같은 강인한 근육으로 몸통박치기를 하며, 엄청난 식욕으로 등급이 낮은 괴수들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다.]
파아아앙!
활을 든 그녀가 괴수를 향해 화살을 쏘자, 화살이 매섭게 회전하며 날아갔다.
그리곤 전면으로 달려오는 다른 괴수를 향해 다시 화살을 쏘았다.
화살을 쏜 사람은 한수진이었다.
그녀는 오늘 오랜만에 동생 수아와 함께 명동에 쇼핑하러 왔다. 태준에게 받은 돈이 너무 많아 처음으로 과소비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 위에 게이트가 생기고, 괴수가 나타난 것이다.
무섭게 달려오던 B등급 괴수 마카이로가 화살을 보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한수진이 쏜 화살은 허공을 뚫고 지나갔다.
최한별이 소리쳤다.
“이쪽 괴수, 안 죽었어!”
“에?”
“마카이로, 저놈은 달리면서도 방향전환이 빨라.”
한수진이 고개를 돌리자, 정말 괴수가 쓰러지지 않고 계속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연이어 두 발의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두 발 다 놈은 피해버렸다.
그러자 한수진이 크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자신의 뒤에는 어렵게 찾은 동생 수아와 사람들이 있었기에, 끝까지 포기할 순 없었다.
“크아앙!”
놈이 지척이다.
마지막 화살을 걸고 놈의 이마를 겨냥했다.
일부러 피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더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시위를 당겼다.
파아아앙!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오자, B급 괴수 마카이로는 몸을 바짝 숙였다.
화살은 놈의 어깨에 살짝 스치며 방향을 바꿔 건물에 부딪혔다.
이젠 끝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여자가 땅에 손을 대고 외쳤다.
“아이스 블라스트(Ice Blast)!”
펑! 펑! 퍼퍼퍼펑!
땅 위로 얼음 파편과 냉기가 폭발하더니 달려오던 마카이로의 다리를 휘감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괴수가 멈췄고, 놈의 네 다리가 얼음으로 결박당했다.
“뭐해! 눈을 공격해!”
최한별이 소리를 질렀다.
“아, 예!”
한수진이 화살을 활에 매기고 스킬을 발동시켰다.
이번에 헌터 등급이 C급으로 오르면서 생긴 기술!
많은 마나를 소모하고, 준비 시간이 길기 때문에 자주 쓰지 못하는 필살기를 준비함이다.
스킬을 발동시키자, 화살이 발사되기도 전에 엄청난 바람이 화살 주변에 모이기 시작했다.
“폭풍의 화살!”
부아아아앙!
퍼걱!
굉음과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이 발버둥 치던 마카이로의 눈에 박혔다.
아니 눈을 뚫고, 뇌를 뚫고, 뒤통수를 뚫어버렸다.
쿠웅!
엄청난 타격을 받은 괴수가 앞으로 쓰러졌다.
“고, 고마워요. 헌터시군요. 전 한수진...”
“비켜!”
콰앙!
최한별의 손에서 뻗어 나온 긴 얼음 창이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D급 괴수의 목을 뚫었다.
“인사는 나중이다! 전투에 집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