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살자-49화 (49/149)

# 49

49. 빙염의 마법사(2).

한수진과 최한별, 두 사람이 힘을 모아 괴수를 잡기 시작했다. 최한별은 B등급 헌터로 이제 막 C급 헌터로 올라선 한수진보다 더 잘 싸웠다. 하지만 한수진은 미니맵이 있었고, 원거리 스킬을 보유했기에 죽인 괴수 숫자는 오히려 더 많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열심히 괴수를 잡아도 좀처럼 숫자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늘어났다.

“아씨, 힘들어 죽겠는데 헌터 새끼들 왜 이렇게 안 와.”

“걱정하지 마세요. 곧 제 동료들이 올 겁니다.”

“뭐? 동료?”

최한별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돈도 안 되고, 위험한 이곳에 일반 헌터들이 왜 오겠나.

국가기관인 국가 헌터원이나 대괴수 부대나 오겠지.

그리고 그들이 오더라도 먼저 주변 지역을 봉쇄하고, 괴수가 더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그다음에 진입할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앞으로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냥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낫겠다!”

여자가 소리쳤다.

얼음 창을 연거푸 대형 괴수에게 적중시키자, 그녀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그럼 이 사람들은 빠져나가지 못할 거에요.”

한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나태준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다고 깨톡을 보냈으니, 곧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얼음 장벽(Ice wall)!”

높이 4미터의 얼음벽이 괴수들의 앞길을 막았다.

쾅! 쾅!

하지만 괴수들이 몸통박치기를 하자,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제길, 더 막기 힘들겠는데.”

자신 혼자라면 얼마든지 몸을 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빠지면 이 사람들은 꼼짝없이 여기서 죽을 것이다.

“내가 여길 막을 테니, 이 사람들을 좀 데리고 나가줘요.”

한수진이 최한별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뭐? 혼자 남겠다는 말이야?”

“무슨 소리야 언니!”

하지만 한수아는 동의할 수 없었다.

“언니가 남는다면, 나도 여기 남을 거야.”

“하지만 지금 상황이...”

다른 사람들은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우리라도 빠져나갑시다.”

“그래요. 어서 데리고 가줘요.”

사람들의 말에 최한별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미친 것들!”

“네?”

“목숨을 걸고 지켜준 사람을 놓고 달아난단 말이야? 난 안 갈 테니 여기서 꺼져!”

최한별은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매우 화나 있었다.

“우리 모두 달아날 필요가 없겠네요.”

“뭐?”

한수진이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화살을 꺼내고 있었다.

“퀘에에엑!”

“꾸악!”

콰직! 빠직!

얼음 장벽에 괴수들의 녹색 피가 번졌다.

그리고 반대편 얼음 장벽에서 괴수들의 비명과 무언가 잘리고, 부러지고, 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장벽을 거둬주세요.”

“지금?”

“네. 우리 대장이 왔어요.”

화사하게 웃는 한수진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뭐지? 대장이 왔다고?

최한별은 혹시 몰라 장벽을 유지하기 위해 한 손은 땅바닥에 고정하고,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반투명한 얼음 창이 위로 솟아올랐다.

“준비해!”

한수진이 활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촤악!

얼음 장벽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한 사내가 칼과 갈고리를 들고 괴수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갈고리를 던져 B등급 괴수 마카이로의 목덜미를 감고, 쇠사슬을 육중해 보이는 발로 감아 당기자 괴수가 힘없이 딸려왔고, 서슬 퍼런 칼날이 괴수의 눈을 찔렀다.

“비대각(批大卻)! 도대관(導大窾)!”

사내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외치자 칼이 번쩍였고, 놈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쿵!

마카이로는 숨통이 끊어졌다.

“태준 오빠! 생각보다 빨리 왔네.”

“수진아, 너 나중에 기태한테 밥 한번 크게 사야 해.”

“왜요?”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그리고 놀러 와도 하필 명동이냐?”

“뒤에 괴수!”

닭대가리 괴수 잘루스가 빠르게 달려오다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꾸에엑!”

갑자기 놈이 바닥에 미끄러지더니 벽에 부딪혔고, 몸을 돌려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다.

“뭐? 괴수가 달아나?”

너무 놀란 최한별이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밖으로 내뱉었다.

“대장, 옆에서 또 와요!”

사방에서 또 다른 종류의 괴수들이 달려왔다.

그리고 주변 건물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나와 수진이의 뒤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태준은 백정의 칼을 고쳐 쥐었다.

명동을 전부 다 지킬 필요는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만 지키면 충분했다.

“내가 정면을 맡을게. 수진이가 좌측을! 그리고 얼음 미녀께선 우측을 맡아줘요.”

“네!”

“네...”

최한별도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렇게 한바탕 전투가 또 시작됐다.

그리고.

“쿠오오오크!”

“형!”

이수호가 오크들과 달려왔다.

오크 두 마리가 커다란 괴수를 향해 몸통박치기를 했고, 뒤따르던 두 마리가 위로 덮쳐 도끼와 철퇴를 내려찍었다.

괴수는 순식간에 다진 고기가 되었다.

그리고.

“주군 제가 왔습니다!”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푸른색 검날이 번쩍였다.

자신을 상산에 조자룡이라 떠드는 사내는 괴수들 사이를 누비며, 놈들의 머리를 베어 넘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더는 달려드는 괴수가 없었다.

간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놈들이 있긴 했지만, 명동 바닥을 휩쓸던 괴수들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상희 언니는요?”

“집에서 애들 본다.”

“아.”

“수호야 오크들 경계시켜.”

“네!”

이수호가 오크들과 주변을 경계했다.

일행의 뒤에 있던 건물에서 이백여 명의 사람들이 나왔다.

“목숨을 살려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와아아아! 헌터 만세!”

태준과 헌터들을 향해 사람들이 박수와 갈채를 날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국가 헌터원의 헌터들과 대괴수 부대가 올 때까지 사람들을 지켰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자, 한수진이 최한별에게 다가갔다.

“언니, 고마워요. 전 한수진이라고 해요.”

“어?”

한수진이 최한별에게 고개를 숙였다.

“언니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이 무사할 수 있었어요.”

쌍둥이가 번갈아가며 최한별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나태준이 다가왔다.

“나태준이라고 합니다. 우리 팀원을 구해줬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블리자드 길드 이제 아니지, 프리랜서 헌터 최한별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악수했다.

최한별은 나태준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를 알아보았다.

슈퍼 루키라고 신문과 TV에 나왔던 헌터.

하지만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 유령 헌터라는 소문이 도는 그 사람이었다.

“여긴 이제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밥이나 먹으러 가죠.”

“밥이요?”

“네, 제가 쏘겠습니다.

“술이라면 모를까, 밥은 좀...”

“그럼 술도 사겠습니다.”

어차피 술도 다 깬 상태였다.

아직 밤은 길었으니, 혼자 마시는 술보단 함께 마시는 술이 시련과 길드 퇴출이라는 두 가지 아픔을 겪은 여자에게 더 나을 것이다.

***

<뉴스 속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어젯밤 명동 상공에 B등급 게이트...

역사상 가장 큰 사상자를 낼 뻔한 참사를...

국가 헌터원의 빠른 대처로... 시민들은...

이번 일로 국가 헌터원의 신뢰성이 크게 회복...>

거실에서 간간이 들리는 TV소리.

눈을 떴다.

낯선 천장?

“으윽!”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여긴?”

낯선 방안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검은색 아다다스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체육복?’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옷이 바뀌었다.

누가 자신 몰래 옷을 갈아입힌 것이다.

‘납치당한 건가? 아니면... 설마?’

불길한 상상에 분노가 들끓었다.

‘어떤 새끼인지, 죽여버리겠어!’

손끝에서 날카로운 얼음 칼날이 뿜어졌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어떤 개새끼야!”

거실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그중에는 어린 소년도 둘이나 있었다.

순간 이상한 낌새에 얼음 칼날을 집어넣었다.

“언니 일어났어요.”

수진이었다.

어제 명동에서 만났던 쌍둥이 헌터.

“어, 여기 내가 어떻게?”

이수호가 말했다.

“제 오크들이 업고 옮겼습니다. 모두 동상에 걸려 다시 소환하는데 시간 좀 걸렸습니다.”

“에? 그럼 이 옷은?”

“그건 제가 갈아입혔어요. 내 옷이 좀 작죠.”

수진이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왜? 저런 표현을 하지?

순간 자신의 도드라진 가슴이 보였고, 민망함에 슬쩍 손을 올려 가렸다.

“그리 앉아요. 곧 점심 준비 끝나니까.”

부엌에 있던 윤상희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침이 아니라 점심이었다.

대체 어제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딴 빌어먹을 놈 잊어버려요.”

“네?”

기태가 다가가 최한별의 손을 당겨 소파에 앉혔다.

“아줌마, 힘내요.”

“뭐? 아줌마?”

이제 스물일곱의 처녀에게 아줌마라니...

“세상에 남자는 많고, 아줌마는 젊어요.”

“그, 그게 무슨 말이니.”

“고종수, 그 아저씨는 틀림없이 아주 못생긴 아줌마 만날 거에요.”

갑자기 얼굴이 타는 듯 붉어졌다.

‘아 쪽팔려! 내가 대체 어제 무슨 말을 한 거야!’

나태준이 최한별을 보며 웃었다.

“한별씨, 그리고 그런 쓰레기 길드, 나오길 잘했어요. 실력이 부족하면 노력해서 올릴 생각은 안 하고, 실력이 너무 뛰어나다고 쫓아내다니, 길드장이 어떤 놈이지 얼굴 한번 보고 싶네요.”

“아, 예...”

대체 안 한 이야기가 없었다.

술기운에 자신의 속을 모두 보여준 것 같아 창피했다.

늘 사람들 앞에 당당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완전히 망가진 모습을 보였으니, 이런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어?”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개(?)가 어슬렁어슬렁 최한별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녀의 한쪽 다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너 뭐니?”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말볼이 최한별의 종아리를 감싸 안더니 그 짓을 하기 시작했다.

순간 최한별의 얼굴이 타오를 듯이 붉어졌다.

누가 이 모습을 봤다면, 화염의 마법사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윤상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말볼, 재 요즘 왜 저러지?”

“아무래도 욕구불만인가 봐요. 조만간 공원에 산책 한 번 데리고 가야겠어요.”

그녀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최한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옷 어딨죠?”

“그거 빨래 중이에요. 어제 오바이트를 너무 많이 해서. 그냥 놔둘 수가 없었어요.”

대답한 것은 화장한 남자, 박수무당 정기용이었다.

그가 이 집에 빨래 담당이었다.

“헛! 그거 드라이해야 하는 건데.”

“아, 그래요? 몰랐어요.”

천만원짜리 옷이 아동용처럼 쪼그라들 것이다.

“수진아 이 체육복 좀 빌리자. 아무래도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최한별이 나가려했다.

그러자 나태준이 말했다.

“어디 갑니까? 최한별씨.”

“네?”

“게이트 공략하러 가야죠.”

“게이트라니요?”

“어제 저와 계약한 것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제가요? 계약을요?”

태준이 인벤토리에서 손으로 대충 쓴 계약서를 꺼내 최한별에게 내밀었다.

“앞으로 우리와 C급 이상 게이트 다섯 개를 클리어할 때까지 함께 하기로 계약했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계약서에 적힌 주소와 전화번호, 그리고 사인이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술에 취했음에도 사인은 왜 이렇게 정확하게 한 것인지...

“일단 밥 먹고 조금 있다가, 이동할 겁니다. 오늘 우리 팀과 국가 헌터원, 그리고 헌터 협회의 헌터들과 함께 명동에 있는 B급 게이트를 공략할 겁니다.”

최한별은 뭔가 더럽게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B등급 게이트]

그렇게 점심을 맛있게 먹고, 명동으로 향했다.

국가 헌터원에서는 전에 칠성그룹의 박애란 팀장을 체포할 때 참여했던 거구의 강태산과 전격 마법사 이광옥 헌터가 대표로 왔고, 수십 명의 헌터원 소속 헌터들도 데리고 왔다.

그리고 헌터 협회 측에서는 하필 최한별을 쫓아냈던 블리자드 길드의 길드원들이 대거 참여했다.

“최한별, 네가 여기에 왜 있어?”

블리자드 길드장, 고종수가 최한별이 나타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시팔! 내가 다시 술을 먹으면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화장도 안 하고, 체육복을 입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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