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50. 빙염의 마법사(3).
어색해진 분위기.
“그래, 잘 지내지?”
최한별, 어제 술자리에서 보았던 당찬 모습은 어디 가고, 그녀가 사내 앞에서 우물쭈물한다.
사내가 옆에 있는 우리를 보더니, 살짝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십니까. 블리자드 길드의 길드장 고종수입니다.”
이름을 듣자마자 화가 난다.
사람 이름을 듣고 화가 나는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
고종수, 그 이름을 어제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많이 들었다.
출세 때문에 여자를 버린 파렴치한.
실력이 너무 뛰어나다고 최한별을 길드에서 추방한 좀팽이.
B급 헌터면서 뒤에서 몸이나 사리는 겁쟁이.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여자친구의 아이템까지 길드에 투자한 악덕 길드장.
밤새 계속된 촤한별의 술주정 때문인가? 이름을 듣고 놈을 보자, 알 수 없는 적개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게 세뇌의 무서움인가?
‘그런데 다들 같은 마음인가보다.’
팀원들이 최한별 좌우로 서더니 고종수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놈이 움찔한다.
“게르르르!”
말볼까지 제 여자를 지키려고 그러는지 최한별 앞에 서서 고종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반갑습니다. 나태준 헌터라고 합니다.”
“아, 요즘 소문이 자자한 슈퍼 루키 나태준 헌터시군요.”
어디서 내 이름은 들어봤나 보다.
서로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가까이에서 본 고종수.
남자가 봐도 잘 생겼다.
키는 왜 이렇게 크고, 목소리는 또 왜 이렇게 좋아.
기생오라비 같은 놈.
놈이 웃으며 물었다.
“혼자 활동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길드엔 관심이 없으십니까?”
“왜 없겠습니까? 조건이 맞는 곳이 없어서요.”
고종수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저희 블리자드 길드 어떠십니까? 다른 길드보다 더 우대해 드리죠.”
“하하, 그런데 제 조건이 좀 까다로워서요.”
“한번 말해보세요. 저희는 열린 길드니까요.”
“길드장 시켜주면, 열심히 하죠.”
“네?”
고종수의 잘생긴 얼굴이 찡그려지며 붉게 변했다.
내가 한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뭐하는 겁니까?”
고종수 뒤에 있던 덩치 큰 길드원들이 다가왔다.
손을 놓았다.
“와! 손아귀 힘이 대단하시군요.”
고종수는 도구 계열의 헌터.
힘이 셀 리가 없었다.
길드원들이 다가오자, 고종수가 손을 들어 막았다.
“하하, 그쪽도 힘이 대단합니다.”
겉으론 평온한 척하지만,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500명의 헌터가 있는 블리자드의 길드장으로 이런 일로 화를 낼 순 없겠지.
고종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뒤에 있는 그 인원으로 C급 게이트는 공략할 수 있겠죠. 하지만 오늘 들어가는 B급 게이트부터는 괴수 숫자가 수 배에서 수십 배가 늘어납니다. 그럼 길드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지요. 그리고 지금은 우리 블리자드가 중급 길드지만, 머지않아 반드시 탑 10안에 올라, 이름을 빛낼 겁니다.”
“맞습니다. 우린 저런 사람 필요 없습니다.”
“오늘 우리 길드의 힘을 똑똑히 보여주죠.”
고종수 옆에 선 길드원들이 길드장의 짧은 연설에 고개를 끄덕이며, 의지를 다졌다.
“잘도 그러겠다!”
최한별이 앞으로 나섰다.
“길드장에게 아부나 하고, 동료나 시샘하는 것들이 10대 길드? 병신들 꼴값하고 있네.”
“뭐?”
“저...저게.”
최한별이 제정신이 돌아왔나 보다.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녀의 발언에 블리자드 길드원들의 성난 이빨을 드러냈다.
“최한별, 넌 우리 길드에서 쫓겨난 주제에 말이 많군.”
“맞아, 길드위원회 만장일치였지. 아마.”
최한별이 웃었다.
“크하하! 길드위원회? 웃기는군. 야! 양태섭, 이 코 흘리기 새끼야. 내가 너 구해준 게, 1년이 됐냐? 한 달이 됐냐? 바로 보름 전이야 보름 전. 그리고 노하연, 너 똥오줌 구별 못 해? 게이트에서 괴수보고 오줌 지린 년을 B급까지 키워줬더니, 길드위원회 만장일치? 지랄하고 자빠졌네. 다른 놈들도 한번 떠들어 볼까?”
최한별이 다른 길드원들을 노려봤다.
그러자 그들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우린 그들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블리자드 길드의 역사를 만든 당사자에게 들었으니까.
최한별, 고종수.
두 사람은 한 살 터울로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다.
둘 다 같은 지역의 킹카와 퀸카로 이름을 날렸고, 연인이 되었다. 그러던 그들이 놀이동산에 놀러 갔다가 한날한시에 각성했다.
한 명은 도구 계열, 한 명은 마법 계열.
최한별은 각성자 테스트에서부터 E등급을 받으며, 헌터로 두각을 나타냈다. 마법 천재로 여러 길드와 대기업에서 그녀를 스카우트하려 했다.
하지만 고종수는 그러지 못했다.
평범한 능력에 클래스도 나중이 돼야 빛을 바라는 도구 계열.
당장 얼굴 잘생긴 거 말고는 쓸모가 없었다. 그를 원하는 길드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최한별은 고종수를 버리지 않았다.
두 사람을 함께 영입하는 조건으로 작은 길드로 들어가 실력을 쌓았고, 4년 전 최한별이 C등급 헌터가 되자, 고종수와 함께 길드에서 나와 독립했다.
그때 생긴 것이 블리자드 길드였다.
이는 최한별의 마법 특성을 고려한 이름이었다.
각성자 테스트를 통해 실력이 좋은 헌터들은 전부 대기업과 대형 길드에서 데려갔고, 힘없고 실력이 떨어지는 헌터들만 남았다. 두 사람은 그런 헌터들을 하나둘 영입하기 시작했고, 조건이 좋지 않은 게이트를 공략해 가며, 길드의 덩치를 조금씩 키웠다.
처음엔 최한별이 길드장이었으나, 고종수가 B급 헌터가 되자 자신이 길드장을 하고 싶다고 했고, 그녀는 허락했다.
그리고 현재는 헌터만 500명에 달하는 중급 길드가 되었고, 고종수는 최한별이 게이트를 공략하는 사이에 몰래 헌터 협회 이사와 약혼을 해버렸다.
“최한별, 그만하지. 그래도 한때 네가 몸담았던 길드야.”
고종수가 입을 열자, 최한별이 살짝 움츠렸다.
하지만 한번 고개를 흔들더니,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그래서 더 쪽팔리다. 너나 이런 놈들을 위해 몇 년이나 봉사했다니.”
“말이 심하군.”
“심하긴, 게이트 클리어하고 보상으로 받은 아이템들 전부 너와 길드원들과 나눴잖아. 씨팔, B급 헌터인 내가 유니크 아이템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냐?”
“그거야 네가 자진해서 한 일이고.”
“뭐?”
최한별의 주먹이 움찔거렸다.
자신에게 온갖 칭찬과 미사여구를 날리며 길드장인 자신과 길드원들의 실력을 높여야 한다며 아이템을 팔아 나누도록 분위기를 만들었던 고종수가 비웃고 있었다.
“그래도 모르겠어? 네년의 비위를 맞춘다고 나나 길드원들은 모두 지쳤어. 그래서 너를 내보낸 거야. 알아.”
“뭐, 이 새끼가.”
그녀가 점점 이성을 잃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나섰다.
“이제 그만 하지. 저쪽 헌터들은 이미 게이트에 들어갈 준비가 끝난 거 같네.”
국가 헌터원 소속의 헌터들이 한참 작업 중인 크레인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진이와 윤상희가 씩씩대는 최한별을 데리고, 게이트 앞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하늘 위에서 커다란 괴수 한 마리가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괴수다!”
“모두 비켜!”
앞으로 나선 것은 국가 헌터원의 이광옥 헌터였다.
파지지지지직!
백색의 섬광이 괴수를 향해 쏘아졌다.
“쿠웨웨웨웩!”
괴수는 공중에서 전격을 맞고 아래로 떨어졌다.
콰앙!
작은 노점상을 박살 내며 떨어진 괴수의 몸에선 지독한 악취와 함께 검은 그을음이 피어올랐다.
“실력이 대단하군.”
정기용이 전격 마법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역시 B급 헌터의 실력은 명불허전이었다.
이제 조금은 진정된 최한별을 바라보았다.
“한별씨.”
“왜요?”
그녀는 별로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몇 년 동안 사랑했던 놈에게 받은 상처였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얼음 마법의 사정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사정거리요?”
“방금 이광옥 헌터의 전격 사정거리는 30미터 정도 되던데, 얼음 마법은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한지 궁금해서요.”
그녀가 덤덤하게 대담했다.
“그건 마법마다 다른데, 아이스 블라스트의 경우 10미터고, 아이스 에로우는 50미터, 프로즌 웨이브는 한 15미터, 그리고 얼음 장벽은 5미터 정도 될 겁니다. 나머진 원거리 기술이 아니라서.”
모두 알려진 대외적으로 알려진 얼음 마법이었다.
아이스 에로우의 사정거리는 매우 긴 편이었지만, 위력이 약했고, 위력이 제일 강한 아이스 블라스트는 사정거리도 짧았고, 괴수가 10미터 이내에 들어왔을 때만 쓸 수 있어 위험하기도 했다.
“그런 걸 왜 묻죠?”
“팀원의 기량을 알아야 팀플을 할 때, 서로 호흡을 맞춰 싸우죠.”
“아!”
갑자기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빵빵!”
진입 금지 구간에 최고급 승용차 하나가 빠르게 들어오고 있었다.
“저건 뭐지?”
검은색 승용차는 곧 바리케이드 부근에 멈췄고,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정장을 입은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모습을 보자, 뭔가 쓴 약을 먹은 듯 입속이 텁텁해졌다.
서윤아, 6학년 3반 친구이자, 신귀족이었고, 헌터 협회 이사인 그녀가 약혼자를 위해 직접 이곳에 방문한 것이다.
‘울보가 A급 헌터가 됐군.’
대체 귀족들로부터 어떤 짓을 당했길래, 아니 어떤 지독한 훈련을 했길래 서윤아까지 A급 헌터가 된 것일까?
그녀는 애들이 조금만 장난치거나 서운한 일이 생기면 참지 못하고 울어버리는 그런 울보였다.
그런 순한 성격을 가진 서윤아가 대형 골렘을 부리며 괴수와 싸운다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슬쩍 최한별을 봤다.
서윤아를 바라본 그녀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레이저가 쏘아질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남자를 빼앗은 여자가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서윤아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때리고 싶어도 참아요.”
슬쩍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서윤아에게는 악감정이 없습니다. 꼬신 여자가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넘어간 놈이 잘 못 한 거지.”
“아,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고요.”
그녀는 생각보다 쿨했다.
대화를 나누던 서윤아가 약혼자 고유성과 이쪽으로 다가온다.
얼마 전 처음으로 나간 반창회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와는 15년 만이었다.
물론 나는 TV나 신문, 인터넷에서 많이 봤기에 그녀의 얼굴은 익었다.
그런데 아는 척을 해야 할까?
하지만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나태준, 오랜만이네.”
먼저 그녀가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서윤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쳐다봤다.
한쪽은 헌터 협회의 이사였고, 과거 영웅이라 불리던 인기 헌터 서윤아였고, 다른 쪽은 요즘에 뜨고 있는 슈퍼 루키 나태준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서로 연결 고리가 전혀 없어 보였다.
“반 친구들이 네 활약을 지켜보고 있어.”
“그래? 나를 지켜본다니 고마운걸.”
연희는 몰라도 다른 애들도 나를 지켜본다니, 소름이 살짝 돋았다. 김상국, 그 녀석도 나를 주시하고 있을까?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야?”
“보다시피, 내 약혼자가 게이트에 들어간다고 하니, 배웅나온 거야.”
“함께 들어가지그래?”
서윤아가 웃었다.
“호호호, A급 게이트면 몰라도 B급은 좀 그렇지. 내가 들어가면 다른 헌터들이 경험치를 하나도 못 먹을 거 아냐. 보상도 마찬가지고.”
그녀의 말투는 상당히 건방졌다.
정말 그녀가 울보 서윤아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 있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슬쩍 아까부터 생각한 미끼를 던졌다.
“이 게이트 누가 클리어할 것 같아?”